00057 3부 : 사랑의 증명법 =========================
지민혁의 비서실은 오늘 촉각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정도현의 휴직, 그리고 그걸 ‘잡음 없이 처리하라’라는 지민혁의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그것도 모자라 J그룹 이사와 J그룹쪽 대주주들에게 연락해 최대한 빨리, 비밀리에 약속을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무리 멍청한 비서라도 여기에서는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연신 전화를 하던 임지희가 지쳐 자신의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공유 일정표에 일정 하나를 추가하며 말했다.
“이거, 그거죠, 실장님.”
“말 조심해, 지희씨.”
“저희 야근지옥 레이스 신호탄.”
“그건 맞지.”
옆에 있던 박 비서가 끼어들며 맞장구를 쳤다. 차마 아무도 경영권 싸움의 시작을 위한 신호탄이라고 말은 못 했다. 하지만 머리가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대표님은 엄청나게 ‘약속’이 많아질 테고, 그걸 조정하느라 터져나가는 건 비서실이라는 거. 커다란 덩치의 공룡이 움직이면, 싫어도 티가 난다. 그것도 육식 공룡이 움직이면 싫어도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다. 모두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으니까.
“이제 줄 대려고 오는 사람도 쏟아지겠네요.”
“어허, 지희씨. 조심하라고 했잖아.”
“실장님, 지금 비서실 터져나가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에요?”
“비서실보다는 대표님이 더 터지시겠지.”
“아니, 이럴 때 도현이같이 일 잘하는 애는 왜 휴직을 해서...”
사정을 모르는 지희는 탄식하고 막내인 도운만이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수행비서직에 고정은 되었으니 도운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었다. 엄마에게는 형이 외국 출장을 오랫동안 갔다고 둘러댔으며, 비서진에게는 말못할 집안 사정이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었다. 대표님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게다가 형은 뭘 하는지 대표님이랑 서로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연락이 없었다.
그 와중에 월급은 형의 몫까지 받으며 가장 노릇을 해야 할 판이니 그만두지도 못한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그저 도운이 할 수 있는 것은 시키는 일이나 잘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였다. 도운은 생각을 포기한 머리로 대표실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삼촌의 브리핑이 끝나갈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지민홍 쪽을 파 봐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알겠습니다.”
“지민홍이 우리 큰형인건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민혁이 자신의 조카 중 도현이가 큰형 쪽과 있는 경영권 싸움에 말려든 것 같다고 했다. 당분간 ‘민도윤 찾기’는 그만두고 큰형 쪽을 파 보라는 말에 김 팀장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니, 도현이가 대표님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J가 맏아들에게 납치까지 당할 정도였는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납치당한 도현이가 잘 있는지, 멀쩡한지 초조해진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도현이가 납치당할 이유가 뭡니까?”
“도현씨가 제 수행비서 역할을 도운씨 대신 오랫동안 했더군요.”
“도운이 대신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민혁은 도현이 자신과 함께 연인의 관계로 발전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일단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도운이 아파 도현에게 대신 근무를 서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듣고 있던 김 팀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자신이 보증을 선 토끼 같은 조카들이 사고 친 것은 사실이었으니 민혁에게 미안한 맘에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좋았다. 김 팀장에게는 적당한 정보만 말해주고 도윤을 찾는 데 일조하기만 하면 되었다. 삼촌에게 있는 일을 곧이곧대로 말해서 괜히 김 팀장의 의욕과 원망이 자신에게 엉뚱하게 겨눠지는 것은 사양이다. 네놈이 내 조카를 건드려서 조카에게 이런 일을 당했다고 말하기엔 너무 김 팀장이 이해 못 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전생이라던가, 광공이라던가.
“저희 조카들이 큰 신세를 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다만 도현씨만 무사했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주 고맙습니다.”
김 팀장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민혁은 늘 자신에게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고용주였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자기 자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도현을 당장 찾아달라는 것을 보니 기업 비밀에 대해 도현이가 많이 아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김 팀장은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에게 도현이를 찾도록 지원까지 해 주니까.
김 팀장은 민혁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상대가 또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김 팀장이 가장 먼저 대표실을 나가자마자 찾은 것은 도운이었다. 도운의 등짝을 풀스매싱으로 시원하게 후려갈기며 김 팀장이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아, 아이고 이 자식아!”
“아, 아파요, 삼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대표님 말씀만 따라라!”
“아 부끄럽게 왜 이래요, 삼촌!”
비서진들이 한쪽 눈을 도운에게 두고, 다른 한쪽 눈은 모니터에 둔 채로 도운이 신나게 김 팀장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두들겨 맞는 것을 구경했다는 것은 그 뒷일이다.
“김 팀장 쪽은 된 것 같고...”
한편, 민혁은 김 팀장이 나가자마자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머리를 도끼로 쪼개는 것 같은 아픔이 퍼지자 민혁은 재빨리 두통약을 집어 들었다. 도윤과 관련한 생각을 조금만 해도 자동으로 머리가 아파지곤 했다. 그리고 이 견딜 수 없는 두통 때문에 약을 먹으면, 이 정도 고통도 달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도윤이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도윤이가 했던 마음고생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의미일 거란 생각에 또다시 자신의 나약함을 꾸짖곤 하는 것이다.
“지민홍 쪽은 김 팀장을 이용해 파 보면 되겠군.”
아직 남은 사람들이 몇 있다. 일전에 도윤의 정강이를 걷어찼던 Y업체 이사. 도현을 걷어찬 일로 자신이 주식을 팔아주지도, 편을 들어주지도 않아 대표이사 자리에 결국 오르지 못했다고 들었다. 아버지 쪽도 생각해보았다. 도윤이 저쪽 세계에 있었을 때 자신의 가족이 가장 큰 방해물이었다는 듯이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쪽은 자신이 직접 건드려봐야 할 것 같았다. 가장 큰 용의자인 큰형을 압박하는 건 자신과 대주주들의 연합이 될 것 같고. 큰 형님의 손발을 잘라내어 조용히 살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J그룹이 손에 들어오면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회장님이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해도 지금은 교수들을 데리고 해외 여행이나 다니면서 허허거리는 이빨 빠진 호랑이었다.
민혁은 대표실을 둘러보았다. 지나치게 넓었다. 너무 휑했다. 민혁은 대표실에서 도윤이 처음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를 생각했다. 자신이 커피였나, 무언가를 흘렸을 것이다. 손수건을 내밀면서 닦아주려고 했었지. 민혁은 다시 그 자리에 앉아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나 붉어진 도운의 얼굴에 시선이 돌아가는 자신만이 다시 생각날 뿐이었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보자 커프스가 눈에 들어온다. 터키석의 커프스 단추에 다시 한번 민혁은 두통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통약을 먹고 있지만 늘 두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자신의 영혼을 세게 짓눌러오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두는 곳마다 민도윤이었다. 자신이 차고 있는 커프스 단추에도, 넥타이에도, 정장에도 도윤이 골라주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차를 타면 조수석이라는 공간이 있는 것 만으로도 옆에서 빵을 뜯어 먹여주던 도윤이 떠오른다. 밤이 되면 야경을 바라보면서 도운인 줄 알았던 도윤에게 술을 마시다 키스하던 자신이 생각난다. 온통 민도윤이었다. 어지럽게 민도윤이 피어오른다. 그만큼 숨이 막혀온다.
…
김 팀장을 이용해 도현, 그러니까 도윤을 찾게 한다. 이것은 아직 도윤이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까지 되찾은 것을 모르는 민혁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판단인 것은 맞았다. 안타깝게도 과녁이 어디 있는지를 보지 못하고 쏜 강력한 화살에 불과했지만. 전생을 되찾은 도윤은 큰형에게 붙잡혀 있지도, 지한율에게 매여있지도, Y업체 이사에게 정강이를 차이지도 않고 있었다. 다만 웨스트민스터가 보이는 런던 호텔 스위트룸에서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맨 처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와 소파였다. 자신의 짐을 모두 긁어모아도 여기 호텔에 있는 어매니티보다 양이 적을 것 같았다. 이제 나가서 입을 옷도 좀 사 오고, 먹을 것도 사 와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었다. 그냥, 그냥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여섯 번의 회귀 동안 지민혁과 지독하게 얽혔다. 그 동안 지민혁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에 남기고 간 흔적의 양이란 어마어마했다. 눈을 뜨면 몇 회차인지 모를 지민혁의 다정한 미소가 생각이 난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 자체로 눈물 흘릴 일이 없을 때, 어느 날의 지민혁은 햇살과 함께 포근한 향이 피어오르는 이런 흰 이불 더미에서 자신을 끌어안았다. 단지 날이 밝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방울방울 떠올라 괴로워졌다. 너무나 행복하기에, 지민혁이 주었던 모든 순간이 행복했기에. 그리고 지민혁과 함께 한 모든 끝이 너무나도 괴롭고 아팠기에 다시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늘 느낀 죽음의 공포는 너무나 춥고 외롭고 무서웠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죽기 전에 전력으로 도망친 회차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한 번도 숨돌릴 틈 없이 살아가고 사랑했던 저번 회차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때가 온 것이다. 도윤은 끈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널부러져 생각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이별 뒤의 시간이라는 걸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먼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내는 것도 처음이었고, 자신의 삶을 사랑보다 중요하게 여겨본 것도 처음이었다. 사람의 생존 본능이란 건 참으로 질기고 간사해서 여섯 번의 죽음 앞에서 더욱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비겁하다, 민도윤.”
민도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정면으로 자책해도 동조하거나 비난할 사람도 하나 없는 고요함이 있었다. 자신이 죽느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이별 후의 시간은 참으로 조용했다. 적막할 정도로 아무 존재가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은, 고립된 시간이었다. 도윤은 그 고요 속에서 또다시 눈을 감았다. 배고프지도,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은 멈춰있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