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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6 3부 : 사랑의 증명법 (56/82)

00056 3부 : 사랑의 증명법 =========================

런던에 도착했다. 지민혁에게서 열심히 달아나는 도피의 시작인데도, 긴 여행의 시작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낮과 밤도 다르고, 들리는 소리도 다르다. 보이는 사람들의 피부색조차 모두 달라 이질감을 준다. 여기 있으면 지민혁과 얽히는 불행과는 한층 멀어진 것 같은 느낌에 오히려 도윤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렸다. 이곳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는 모양이다.

워낙 급하게 온 탓에 한율과 연락을 할 새도 없었다. 핸드폰도 바다에 침수되면서 유명을 달리한 지 오래였다. 회장님에게 쫓기는 순간이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업무용 핸드폰과 개인 핸드폰 모두 지민혁의 손아귀 안에 있는 물건이다. 그 말인즉슨 회장님이 건드렸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도윤은 민혁을 가르치면서 수를 쫓아가야 할 때 가르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은 핸드폰이었다. 자신의 핸드폰 두 대 모두 인덕션 위에서 구워졌을 테니 별 소득이 없을 터였다.

“내 기억 값은 비싸, 이한율.”

도윤을 중얼거리며 히드로 공항 앞에서 더럽게 비싸다는 블랙캡(검은색 영국 택시)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런던은 도윤이 세 번째 도망칠 때 거쳐 간 곳이기도 했다.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다만 한율이 소개해 준다던 관리자 출신의 환생자와 만나는가가 문제였다. 집값이 더럽게 비싼 런던의 특성상, 숙소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으면 곤란하다. 그렇게 된다면 도피 생활은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해야 한다. 도윤은 잠시 한율이 건네준 카드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이었다.

“뭐, 어느 호텔이어도 상관은 없겠네.”

카드가 검은색이면 걱정도 까맣게 사라질 뿐이었다. 한율이 준 카드를 도윤은 허투루 쓸 생각이 없었다. 지한율은 이 카드를 주면서 3주일이 지나거든 폐기하라고 했다. 아마 이유가 있겠지. 반대로 말하면 3주일 정도는 안전하게 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M호텔이요.”

도윤은 히드로 공항 앞에서 블랙캡을 탄 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프랜차이즈 호텔 이름을 불렀다. 런던 택시기사는 모든 길을 다 알고 있어야 시험에 통과한다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돌아오는 질문은 어느 호텔이냐는 것이었다. 도윤은 잠시 고민하다 빅벤 뷰가 보이는 곳이라 대답했다. 택시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운전대를 움직였다.

“더럽게 비싸도 뭐 괜찮겠지.”

웨스트민스터 뷰가 보이는 호텔이라면 비수기에도 숙박비가 더럽게 비쌀 터였다. 하지만 재벌 3세이자 연예인인 한율에게 하루 숙박비는 껌이겠지. 아마 하루에 메이크업 샵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헤어 스타일링을 받는 가격보다 쌀 것이다. 도윤은 사랑에 버려진 채 울 때에도 길거리에서 주저앉아 우는 것보다는 벤츠 안에서 운전대를 때리며 우는 것이 백 배 낫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그 인천 앞바다에서 모래와 바닷물에 빠져 구르고 난 뒤 다시 집에 돌아와서 옷을 말리며 세탁 문제 때문에 결국 세탁소를 찾아가는 것 보다는 런던 생활이 나은 것 같았다.

“비가 왜 이렇게 오냐...”

런던에서의 강수 확률 60%란 처음 60초 동안 비가 오고 그다음 40초 동안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던가. 비가 변덕스럽게도 내리다 말다 다시 내렸다. 딱 적당히 으슬으슬할 정도로 비가 내리는 통에 우산을 쓰기에도 모호한 날씨였다. 배정받은 호텔 안에서 점점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뒤숭숭한 날씨에 마음을 못 잡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마치 저 마음같은 날씨였다.

도운은 집에서 돌아온 뒤 집 안까지 자신을 호출하는 민혁 때문에 잔뜩 겁먹어 있었다. 민혁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손이 베이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인덕션 위에 눌어붙어 있던 핸드폰을 떼어 지퍼백에 넣은 뒤 보물처럼 안고 갔다. 게다가 집 안을 미친 듯이 뒤지고 형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랬고. 돌아올 때에는 도저히 운전할 정신이 아닌 것 같아 자신이 그 비싼 차를 초보 주제에 몰고 왔다.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운은 조용히 민혁의 뒤에 섰다.

“대표님, 저 정도운...”

“정도운씨.”

고작 몇 시간 만에 민혁은 어디선가 심하게 맞고 온 것 같아 보였다. 늘 단정하던 정장이 꼴사납게 흐트러져 있다. 머리카락도 쉴 새 없이 넘기다 쥐어뜯어 까치집 같았다. 눈에는 그늘이 져 있고 입술은 말라 비틀어져 터 있었다. 평소보다 더 망가져 보이는 민혁의 모습에 도운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네, 대표님.”

“하나만 물어봅시다.”

“네.”

“도운씨 대신 도현씨가 근무한 게 정확히 어떻게 됩니까?”

도운은 핸드폰을 켜 일정표를 보여주었다. 지금 무섭다고 거짓말을 했다가는 나중에 더 큰 화가 닥칠 예감이 들었다. 도운은 솔직하게 자신이 빠진 날짜를 짚어가면서 말했다. 급성 식중독 때문에 입원하느라 빠지고, 그 이후에 형이 마음을 정하지 못해 대리 출근했던 날까지. 차근차근 짚어줄수록 민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날입니까?”

“네.”

“그럼 커프스... 그건 뭡니까?”

“네? 커프스요?”

“내게 빨간색과 노란색 커프스를 추천했던 것도 도현씨였습니까?”

“그게 뭐지....아, 그거요!”

도운은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렸다. 일전에 자신에게 옷을 추천해 달라고 할 때가 있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주 부탁했던 일이라 난감해하면서 형에게 물어본 적이 많았지. 빨간색과 노란색의 커프스는 맨 처음에 골랐던 것이라 도운도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추천해줘서요.”

“도현씨가요?”

“네. 형이 어울릴 것 같다고...”

도운은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민혁이 손에 얼굴을 묻고 짐승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신음도 비명도 되지 못한 괴상한 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민혁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도운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민혁은 다리가 풀려 옆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듯 앉았다.

왜 나는 하나만 봤을까. 도운이 얼굴이 붉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운에 처음부터 너무 꽂혀 있었다. 생각해보면 얼굴이 발그레해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다. 숨이 차거나, 긴장하거나, 혹은 약간 아팠거나. 민혁은 생각할수록 더욱 괴로워져 손에 얼굴을 처박듯 파고들었다.

“도운씨, 나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도운이 나가자 민혁은 소파 위에 늘어져 앉았다. 정신을 추스르고 빨리 도윤을 찾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도윤을 코앞에 두고 놓친 것이 아직도 기가 막히고 너무나 안타까워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민혁은 자신의 약한 정신에 대해서 자책하면서도 받은 충격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했다.

“미쳤지, 지민혁...”

민혁은 자신에게 욕을 미친 듯이 퍼부었다.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자신은 한심했다. 자신의 사랑이 크고 굳건해 한눈에 도윤을 알아보고 그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한 것이 얼마나 오만이었다. 민혁은 자신의 눈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닦았다.

“울 자격도 없어, 너는.”

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눈가를 세게 눌렀다. 자신은 울 자격도 없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어서 이 산산이 박살이 나버린 정신상태를 잘 추슬러 도윤을 찾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장 낮은 곳에서 도윤에게 빌어야 했다. 제발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나의 모든 것을 드리오니 다시 한 번만 더 나를 어여삐 봐 달라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민혁은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도윤이 떠나버린 빈자리가 계속 아프게 가슴을 찔러와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도망친 거지?”

민혁은 혼잣말로 조용히 허공에 물었다. 물음은 곧 잔울림을 남기고 사라졌으나 뇌 속에는 깊이 박혔다. 그래, 도대체 왜 사라진 걸까. 도현이 사실은 도운 대신 근무를 한다고 해 놓고 처분을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편지에 쓰기까지 했다. 누가 보아도 핸드폰 두 대를 녹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민혁은 가슴이 선득해졌다.

“혹시 자의로 없어진 게 아닌 건가?”

민혁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스마트폰은 전자레인지에 튀기면 못 쓰게 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완벽하게 물리적으로 파손을 시키지 않는 이상 스마트폰은 전자레인지에 몇 번 돌려도 쓸 수는 있었다. 도윤이 그렇게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그건 꽤 전문적인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납치범이라던가.

“누구지?”

만약, 만약 도현과 자신이 좋은 관계에 있으면 누가 화가 나지? 민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 한 장에 서둘러 자신의 적을 적기 시작했다. 큰형인 지민홍과 한율부터 시작해 조금의 의심이라도 간 사람을 적어 내려갔다. 민혁의 턱이 딱딱하고 부딪히기 시작했다. 조금 전 까지는 슬픔과 자책에 젖어 있었다면, 이제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윤이가,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할 거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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