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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5 3부 : 사랑의 증명법 (55/82)

00055 3부 : 사랑의 증명법 =========================

말해봐, 아름다운 꿈에서 깨는 건 과연 행복한 걸까?

예전 같았다면 ‘아니오’라며 금방 대답을 했을 도윤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을 뜨고 꾸는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민도윤을 맞이한 것은 바다와 이한율이었다. 여섯 번의 회귀에서도 같은 이름이었던 지민혁은 자신이 일곱 번째 꿈에서 깨어날 때 거기 없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반복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저주보다 지독한 것이었다. 켜켜이 쌓인 기억이 파도의 물결 소리에 맞추어 함께 도윤을 때렸다. 도윤은 소매가 젖어 드는 것이 파도 때문인지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자신의 눈물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윤은 화창한 하늘 아래 죄인처럼 한없이 작게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세상이 너무나 넓어보이고 자신은 너무나 좁아보였다.

“일어나, 민도윤.”

한율이 손을 내밀었다. 도윤은 바닷물에 젖은 옷차림으로 일어났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덕분인지 자신의 모든 것이 모래사장을 곧장 처박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온 몸에 힘이 없고 그저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칠지 막막하기만 했다. 또 얼마나 깎여나갈까, 이제는 남의 불행을 바라보는 눈길처럼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말했지. 멀리 날아가게 도와준다고. 너 이제 도망쳐야 해.”

도윤은 한율의 말에 한율을 쳐다보았다. 한율은 웃지 않고 있었다. 늘 실실 웃으며 실없는 소리만 하던 한율이 웃지 않는다는 것은 진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도윤은 지금 사회적으로 가장 정점에 서 있는 민혁을 떠올렸다. 도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자, 어이없게도 웃음이란 것이 나온다.

“내가 왜?”

“...”

“이제 시작이야. 내가 지민혁을 만들어냈어.”

“과연 그럴까?”

“이젠 괜찮을 거야.”

하,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났다.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한율의 눈에 시뻘겋게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눈동자에는 강력한 절망이 희미한 광기로 변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절박함이라고 부른다. 도윤은 그런 절박함에 한 번 흠칫했다.

“너 진짜 지민혁을 믿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도망갈 때야.”

“무슨, 그게 무슨 소린데.”

“네가 지민혁을 속였잖아. 도운이라고.”

“그걸 어떻게...아니야, 일부러 속이지 않았...”

“형이 그것 때문에 화났더라.”

“뭐...?”

“지민혁 그것 때문에 돌았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지민혁이 화내면 잘근잘근 밟히는 포지션이라. 살아날 구멍을 찾아야 해서.”

“그래서?”

“지민혁 근처에 사람을 좀 뒀지.”

“아...”

“지민혁은 너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있어. 그것도 아주 크게.”

도윤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도윤은 온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겪은 회귀 중에 지민혁이 자신에게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현실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관리자 일을 하면 엔딩이 바뀐다고 했지, 그게 해피엔딩이라고 했었나. 그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윤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이한율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노려보았다.

“나 차라리 살리려면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러기엔. 나도 좀 사정이 복잡해.”

“그냥 나 좀 혼자 적당히 여기서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지민혁한테 잡혀서 행복하게 살게 놔두지 그랬어. 나 좀 놔 두지 그랬어!”

작게 시작한 한탄은 속을 끊어내는 비명처럼 울리며 끝났다. 한율의 멱살을 잡다 그저 거기에다 고개를 파 묻고 우는 도윤이 보였다. 그제야 한율은 자신이 홧김에 도윤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 도윤을 죽이는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도윤은 정말 살기 위해서 자신의 기억을 지운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수 밖에 없으니까.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환강을 되찾기 위해 도윤이란 패를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이렇게 슬퍼할 때 사람은 나쁜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런던으로 가.”

“런던...?”

“나도 J가 셋째 아들이야.”

“그래.”

“외국에서 나도 공부하고 왔다는 뜻이야. 사업 승계에 목을 매고 있던 형님과 달리 난 재벌 3세들과 방탕하게 놀아 댔지.”

“그래서?”

“그러던 와중에 관리자 한 명을 알게 되었어.”

“지민혁이 알아낼거야.”

“아니, 못 알아내.”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어. 돈 많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리고 전직 관리자 출신이니까 널 더 잘 숨겨줄 수 있을 거야. 그럼 지민혁의 분노가 너에게 닿을 수 없겠지. 너를 원망하는 지민혁 얼굴이 보고 싶어? 한율은 그렇게 말하고는 도윤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 방울이 손에 묻어 도윤의 뺨 위에서 미끄러졌다. 도윤의 지치고 상처받은 표정이 한율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기억하기에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했던 자들이 거기에 서 있었다.

“잘 선택해. 배신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지.”

“아니야. 괜찮을거야. 그렇다고 그냥 거짓말이라도 말해줘.”

“정말 난 진심이야. 도윤아.”

한율은 모래와 바닷물로 엉망이 된 코트를 그대로 들어보였다. 더 이상 입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네 사랑은 이렇게 짓밟힐 거야. 난 봤어. 너에게 속아 넘어간 뒤 분노에 찬 지민혁을. 넌 지민혁을 기만했잖아. 한율은 그렇게 말하며 더욱 공포감을 불어넣기로 했다. 사람을 손에 넣으려면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쉴새 없이 몰아붙이면 된다.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정보를 주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면 되다. 그러면 겁에 잔뜩 질려 자신의 손에 떨어지곤 했다. 마치 자신이 가르치던 자낮수들처럼.

“그리고 네가 도망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뭐, 뭔데.”

“회장님이 아셨어.”

도윤의 시선이 허공으로 붕 하고 떴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공포감이 도윤의 사고를 마비시킨다. 제발 보내달라고 드럼통 속에서 울부짖던 기억. 살려달라고 빌었던 기억. 원초적이고 가장 확실한 생(生)에 대한 공포가 도윤의 신경과 사고를 마비시켰다. 도윤의 이빨이 딱, 딱거리며 부딪친다.

“알 수 없었을...텐데...?”

“너 순진하구나.”

“응?”

“나도 형한테 사람 붙여놨는데, 회장님이라고 못 붙이겠어?”

그리고 도윤은 한율에게 매달렸다. 살려달라고. 극도의 공포감에 매달린 도윤은 한율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판단할 정도의 정신머리가 없었다. ‘회장님이 알았다.’라는 말은 도윤에게 큰 트라우마였다. 한율은 자신의 손에 완전히 떨어진 도윤을 챙기기로 했다. 환강을 돌려받을 가장 중요한 패가 될 것이다.

그 뒤로는 집에 가서 여권을 챙겼다. 짐을 쌀 시간 같은 것도 없었다. 여권에 돈만 챙겼다.  한율은 도윤에게 자신의 카드 하나를 쥐여 보냈다. 아마 지민혁의 카드를 쓸 수는 없으니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오히려 지한율의 카드라면 지민혁이 함부로 추적하지도 못할 것이다. 같은 그룹의 셋째니 카드회사에서도 아버지의 눈치를 봐서 꺼릴 테고. 이럴 때 아버지의 힘이란 편안했다. 협박 카드로 쓸 수도 있고, 재력도 많다. 자신이 J그룹의 셋째로 태어날 수 있을 때 지민혁의 동생인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 이유기도 했다.

한율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전광판을 보니 도윤이 탄 런던행 비행기가 출발했을 것이다. 미몽에서 깨어난 도현은 다행히도 도윤이었다. 도운도, 엄마도, 삼촌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 몸 하나를 챙겨 멀리멀리 날아가는 모습에 한율은 안심했다. 사랑이란 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사고라고 하지만, 공포도 마찬가지다. 한율은 핸드폰을 들어 연락했다. 런던 쪽 관리자는 가장 도윤이 약해졌을 때 부를 계획이었다.

지민혁은 차에 도착하자 급히 도현, 아니 도윤의 집으로 향했다. 민혁에게 잡혀 오다시피 끌려온 도운은 자신의 집 문을 당장 열어달라는 민혁의 명령 아닌 명령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민혁이 어긴 교통법규만 해도 몇 개는 될 것 같았다. 도운은 그 광폭한 운전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하려다, 눈이 시뻘게진 채로 핸들을 한 손으로 주저 없이 돌리는 민혁의 모습에 조용히 안전띠를 매고 어시스트 그립을 잡았다.

도운이 문을 열자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지만 매캐한 냄새가 났다. 도운은 타는 냄새에 의문을 가졌다. 그런 도운을 무시한 채 민혁은 신발을 신은 채로 각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현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 민혁은 장롱 안과 침대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도현의 흔적은 보이는데, 도현만이 거기에 없었다. 민혁은 미칠 것 같았다.

“정도현!”

“윽, 이게 뭐야.”

도운의 목소리에 민혁은 도운 곁으로 가 보았다. 순전히 도윤의 목소리와 똑같아서, 알면서도 희망에 차 가 본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인덕션에 새카맣게 탄 무언가가 늘어져 있었다. 한율이 태운 도윤의 핸드폰이었다. 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맨손으로 집어 올렸다.

“대표님, 손 다쳐요!”

여전히 도운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도운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민혁도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죄책감이 커서 차마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왜 도현이가 도윤이인 걸 몰라봤을까. 왜 나는. 왜 나는 멀쩡하게 달린 두 눈으로 단지 찾았다는 안도감에 취해서 그저 늘어져 있었을까.

우습게도 자책이 시작되자 도운과 도현이 그제야 구별된다. 그것이 더욱 지민혁의 마음을 아프고 날카롭게 찌른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제대로 보지 않았다. 도운은 좀 더 어린 티가 난다. 좀 더 미숙하고 가르마 모양도 달랐다. 도현은 더 누군가를 챙겨온 사람이었다. 눈빛이 따스하고 자신의 작은 것도 섬세하게 보고 있었다.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차이가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다가온다.

손을 다치는 것이 무슨 문제랴. 민혁은 손으로 다 타서 눌어버린 핸드폰 두 대를 집어 올렸다. 터져서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품에 손이 살짝 긁혔다. 아프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잡아 도운이 가져온 지퍼백에 넣었다. 살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핸드폰이 이렇게 소각되었다는 것은 하나를 뜻한다. 지민혁은 눈을 감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디든, 어떻게든. 지금 도윤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을.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어 자신에게서 꼭꼭 숨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 출발은 했는지, 무엇을 타고 갔는지. 아무것도 정보가 없었다. 기막힌 것은 지독하게도 여기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것 같은 점이었다. 민혁은 가만히 서서 세상이 자신에게 무너지듯 덮쳐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이것이 내가 거쳐야 할 시련이라면, 응당 받아들이고 꼭 도윤을 찾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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