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2부 : 유리구두 =========================
민혁에게 편지를 건네준 도운은 민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혁은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도운이 건네주면서 얇은 종이 너머로 비치는 글자를 보았을 때, 그 편지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형의 단정하고 깔끔한 성격답게 아마도 간결한 문장으로 써 넣었겠지. 그러나 민혁은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려 짧은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도운이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민혁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둘러 다가오는 도운을 향해 민혁은 손짓을 했다. 명백한 축객의 표시였다. 도운은 지금 민혁 옆에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물러섰다.
탁, 하고 문이 닫혔다. 민혁은 그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된 것을 느꼈다. 민혁에게 내려오는 절망은 검고 어두웠다. 절망감이 자신을 온전하게 포장했다. 민혁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자신의 자신감이 지나친 까닭이었다. 민혁은 다시 한번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몇 번을 읽어도 머리로는 알 수 있는 글자가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도운이가 아팠었다는 말로 시작된 편지는 자신이 그동안 사랑해 온 사람이 정도운이 아닌 정도현임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민혁이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사랑에 취해 넘어간 순간들이 떠오른다. 도현씨라고 불렀지만 대답한 도운, 꼬박꼬박 형이라고 했다가 어느 순간 ‘도현이’라고 불렀던 도운, 병원에서 손목 밴드를 가렸던 도운. 수많은 영원 같은 순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민혁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어리석어 또 도윤을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수가 자신과 멀어지면 어떠한 위화감이라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그 위화감을 모두 무시하고 그저 눈앞의 ‘도운’에 빠져 있다가 이런 참담한 결과가 일어났다.
편지에서 도윤, 그러니까 도현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민혁을 속여야 했음에 대해 미안하고, 이에 대해 민혁이 어떤 결정을 하든 달게 받아들이겠다 했다. 하지만 민혁은 이 말이 틀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자신의 다정함과 사랑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민혁은 주저앉아 흘렸던 눈물을 닦았다. 시간이 없었다. 어디 있든, 늦었지만 도현을 찾아 자신의 옆에 데려다 놓고 사랑을 속삭이고 괜찮다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그것이 설령 도현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일이라 하더라도.
굵은 눈물을 닦고 일어난 민혁은 서둘러 핸드폰을 챙겼다. 외투를 챙기지 않았으나 민혁은 그런 것도 몰랐다.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붉은 눈으로 사무실에서 나오는 민혁을 본 비서실장이 한 발짝 물러섰다. 도운은 일찌감치 물러선 지 오래였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란 말에 거역할 사람은 없었다. 민혁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때였다. 한율에게서 전화가 온 건.
“나 한율인데, 형.”
“지금 시간 없어.”
“나도 시간 없어. 환강이 어디 갔어.”
민혁은 울컥 짜증이 났다. 지금 도현을 만나러 가야 했다. 이한율과 떠들 시간 따위는 없었다. 민혁은 한율에게 쏘아붙였다.
“멀리 보냈어.”
“멀리?”
“네가 스스로 찾아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씹어 던지듯 말을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율은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바다를 보고 있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짐작컨대 지금 환강을 저 멀리 보냈다고 하니 당분간 자기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지민혁, 너는 알까. 모든 사람은 사랑에 미친다는 것을. 그럼 무엇이라도 하게 되지. 한율은 도현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바다를 바라보던 도현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주춤거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요.”
무슨 사이비 아닌가. 도현은 이상한 한율의 행동에 덜컥 겁이 났다. 도현이 벗어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강한 충격이 왔다. 도현이 혼란스러운 듯 한율을 쳐다보았다. 이건 한율이 때린 것 같은 감각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좀 더 뇌 안쪽에서 오는 충격 같았다.
“지금, 지금 뭐 하신 거...”
“통하는구나.”
“네?”
“내가 널 알아보는 데는 ‘관리자’의 능력이 필요하지.”
“관리자요? 무슨...”
“그런데 알아봤단 말이야. 그럼 아직 능력이 남아있는 거 아닌가?”
“무슨 소리 하는 건가요. 지한율씨, 한율씨.”
“너는 어리석게도 기억을 잃어서 모르나 보구나.”
“전, 전. 기억을 잃다뇨. 제가...”
“내가 다 기억나게 해 줄게.”
“무슨, 무슨 말이에요.”
“네가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선택하게 해 주겠다는 뜻이지.”
한율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씩 웃었다. 지민혁을 애초부터 믿지야 않았겠지만, 자신도 환생하면서 나름 조용하게 지낼 계획이었다. 수를 찾아 행복하게 해 주고 먼저 사랑을 고백할 예정이었다. 정말로 민혁과 도윤 사이를 방해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민혁이 괘씸하게도 먼저 자신을 물어뜯었다. 한율은 환강을 어디론가 보내버렸다는 것을 알자 화가 났다. 그래서 한율은 가장 먼저 도윤을 찾았다.
“미안해, 도윤아.”
“뭔, 뭔지 모르겠지만 하지 마세요.”
“네가 부탁했는데, 나도 안 되겠다. 미안.”
그렇게 말한 순간, 도현의 눈앞이 희게 튀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호흡이 순간 멈추는 것 같았다. 온몸이 저릿한 느낌이 들며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이 꾸역꾸역 차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도현은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헛구역질이 절로 났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한율은 도현의 반응에 도윤의 기억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율은 덜덜 떠는 도윤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도윤아, 이제 뭘 해야 알지?”
“한율아, 한율아...”
도윤은 헐떡였다. 밀려오는 기억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또 사랑해 버리고 말았다. 너무 사랑하는데, 그래서 두려웠다. 여섯 번을 돌아 일곱 번째 회귀에서 모든 기억을 지웠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이 먼저 사랑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두려웠다. 또 비극으로 끝나버릴까 봐.
“울지 마. 앞으로 더 울 일만 남았을 텐데.”
“한율아, 내가 기억나지 않게 해 달랬잖아.”
“미안. 지민혁이 나한테 그러는데 어떡해.”
“이한율...너 진짜...왜...흑...”
“이제 널 불행하게 만들 사랑에서 탈출하는 거야.”
“또 사랑한 거니, 내가?”
“내가 도와줄게. 멀리멀리 날아가도록.”
한율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도윤이 울며 손을 붙잡았다. 도윤의 머릿속은 이미 여섯 번이나 불행으로 녹아내렸던 적이 있었다. 사랑만 있다면 두렵지 않다며 낭떠러지에 희망을 품고 몸을 내던진 것이 여섯 번. 또 사랑한 것이 일곱 번째. 그리고 이제 여덟 번째의 낭떠러지 앞에서, 도윤은 더 이상 뛰어내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다 내버리고 자신을 맨발로 쫓아오고 있는 민혁이 있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