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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3 2부 : 유리구두 (53/82)

00053 2부 : 유리구두 =========================

아침 회의에 들어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본 도현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조금 지나면 자신도 저 자리에 들어가 비서진의 한 사람으로 회의에 참여하겠지. 도현은 자리에 앉아 어떻게 민혁에게 사실을 말할지 고민했다. 회의에 끝나고 말할까, 오늘은 점심 약속이 없으시니 나랑 분명 점심을 먹을 텐데 그때 말해 볼까. 도현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잔잔하게 떨릴 때였다. 자신의 개인용 휴대폰이 울리며 문자가 하나 왔다.

[ 안녕하세요, 도현씨. 저 지한율입니다. 기억나세요? ]

[ 안녕하십니까, 정도현입니다. ]

[ 알게 된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오늘 점심에 시간 되십니까? ]

그 말을 본 순간 도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상 한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환강의 문제였지만, 찔릴 구석이 있는 도현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지금 J그룹은 회사 지분에 대한 삼 형제의 싸움이 치열하다고 들었다. 물론 이제는 후계 순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J그룹의 삼남이란 지위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현은 자신의 경솔함 때문에 민혁이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도현은 밑입술을 깨물며 문자를 보냈다.

[ 점심 이후에 시간이 됩니다. ]

[ 그럼 점심 이후에 만나죠. 이쪽도 급해서요. ]

[ 네, 알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어떻게 할까요. ]

근무가 끝나고 도현으로 가장한 도운과 교대하는 시간을 보낸 뒤 도현은 손톱을 뜯었다.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도운이 아파서 시작한 대체 근무였는데, 어느새 사랑에 눈이 멀면서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도현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속으로 곱씹다가 결국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뭐야, 형.”

도운은 교대하러 오면서 도현이 건넨 편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직서를 받아드는 기분이었다. 도운은 불길한 마음에 봉투를 뒤집어 바라보았다. 봉투에 사직서라는 글자가 없는 것을 보아하니 사직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편지를 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편지.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대표님께 전해줘.”

“오늘 설마 말 안했어?”

“못했어.”

“왜?”

“그럴 이유가 있었어.”

초조하게 말하며 도운의 눈길을 피하는 도현이었다. 도운은 걱정되어 도현을 바라보았으나 도현은 얼이 빠져 있었다. 도현의 그런 모습에 도운이 도현을 툭 하고 쳤다. 그제야 도현이 숨을 들이쉬며 도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내일, 내일 말해줄게.”

도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운은 형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처음 느꼈다. 도운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서둘러 자신을 대표님 옆으로 밀어 보내는 도현을 보며 섭섭함보다는 걱정스러움이 앞섰다. 한편, 민혁에게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교대하고 나온 도현은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핸드폰에는 도현이 인사도 없이 가 버린 것을 알았는지 민혁이 보낸 메시지 몇 줄이 와 있었다.

- 먼저 갔네요.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 내일은 갈 때 말이라도 해 줘요. 시간만 가르쳐 줘도 돼요. 내가 인사할 테니.

- 잘 가요, 회의 끝나면 전화할게요.

- 조심히 가요.

연달아 온 메시지에 죄책감만 커진 도현이 핸드폰을 껐다. 도현은 외투를 여몄다. 그런 도현 앞으로 커다란 밴이 하나 섰다. 도현이 앞을 바라보자 밴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도현씨!”

“네, 안녕하세요, 지한율 님.”

“‘님’자 떼고요. 그냥 한율씨라고 불러주세요.”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도운이처럼 행세하고 그것도 몰라 민혁의 남자 애인이라고 협박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최선의 경우 자신이 회사로부터 징계를 받는 것으로 끝나고, 최악의 경우에는 민혁이 커다란 스캔들의 중심에 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현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있어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치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연예계였다. 여러 번 회귀하며 눈치와 정치질 하나만큼은 절정을 찍은 한율은 잠시 자신이 하려던 말을 멈췄다. 이건 뭔가 있었다. 한율은 잠시 자신이 하려던 환강에 대한 질문을 접고서는 도현의 상태를 좀 더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우리 바다나 갈까요?”

도현은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럴 때, 속이 탁 트인 것처럼 분위기를 전환하려면 바다 만한 곳도 없는 셈이다. 한율은 매니저에게 인천으로 차를 돌리게 했다.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푹 쉬게 한다면. 아마 한율이 아는 도윤이라면 더듬거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을 것 같았다.

바다에 도착한 도현은 한참 동안 수평선 넘어 물결치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쓸려나가고 밀려오는 풍경에 도현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넘실거린다. 한율은 그런 도현의 곁에 가만히 있으면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수천 마디의 말이 도현 안에 담겨 있었다. 한율은 그것이 터져 쏟아져 나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1시간 정도였을까. 바다가 보이는 좋은 전망의 카페는 겨울이라 사람이 없었다. 침묵을 깨며 도현이 입을 살짝 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절 형이라고 알아보셨죠.”

“전 알 수 있으니까요.”

“신기하네요.”

이 말의 뜻은 아마 지민혁은 못 알아봤을 거란 뜻이겠지. 지한율은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지민혁 같으니라고. 하지만 이해는 갔다. 지한율도 처음에는 헷갈렸지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전직 관리자’였기 때문이다. 관리자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본능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친숙한 느낌이 도현이 예전 관리자인 도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기억이 지워진 도윤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 한율은 중요한 부분은 쏙 빼놓고 말했다.

“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능력이요?”

“그런 게 있어요, 도현씨.”

“절 도운이랑 헷갈리시지 않네요.”

“헷갈릴 수가 없죠.”

우리 형은 구분 못 하죠? 지한율의 말에 도현은 잠시 기다리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한율은 J그룹의 셋째다. 많은 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보안 서약서까지 작성했는데, 자꾸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눈물도 함께 차오른다. 도현은 입을 천천히 열었다. 문제가 되지 않을 선에서, 딱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달랠 만큼만. 꼭 그만큼만 한율에게 말하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한편 도운은 회의를 마치고 나온 대표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낮이 짧아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형은 내일 아침까지 집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형제로 살아온 느낌이 그러했다. 도운은 속으로 대표를 욕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사랑한다면서 나랑 형을 구별을 못해? 라고. 하지만 곧 자신의 식중독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연약한 위장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 대신 대리 출근 안 하고, 형이 제 시간에 맞춰 출근만 했다면 없었을 일이다.

도운은 정장 안주머니에 잘 모셔져 있는 편지를 눌러보았다. 종이의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도운은 망설였다. 형이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전해주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도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밤에 퇴근 직전에 전달해 줄 셈이었다.

그 시간, 도현은 한율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승계에 방해가 될까 봐 두루뭉술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하지만 도현의 마음이 예나 지금이나 해바라기같이 지민혁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 한율로서는 다르게 들린다. 도현이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쌍둥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여자친구가 있는데요, 속상해요,” 라는 질문에는 쌍둥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민혁이 그려지는 법이다. “제가 거짓말을 했는데, 친구가 절 과연 용서해 줄까요?” 같은 넋두리에는 도현이 겁이 나 아마도 거짓말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율은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초기라 그런지, 겁이 많지만, 맹렬하게 불타는 도현의 마음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사랑을 찾아야 한다. 지한율은 제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바라보았다. 도윤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도윤, 전직 관리자였던 자신, 그리고 아직 도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 놓친 환강을 가지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어느쪽의 무게가 무거운지는 이미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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