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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2 2부 : 유리구두 (52/82)

00052 2부 : 유리구두 =========================

집에 돌아온 도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전에 퇴원한 도운을 깨운 것이었다. 입술까지 마를 정도로 피곤해 보이는 자신의 형에 도운이 미안함을 느끼자마자, 도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꺼냈다. 자신의 형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며 무너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도운은 이 망할 놈의 회사가 형을 어지간히도 굴려 먹었나 보다 하면서 형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현의 말이 진행될수록 이해가 느려지고 황당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러니까...형이, 대표님하고?”

도운이 손으로 아련하게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그게 난 줄 알고?”

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지?”

“응.”

“이게 사실이야? 지금 다들 나 놀리는 거 아니지?”

도운은 고민했다. 도현도 도운에게 말하는 순간은 절박해 울음이 좀 터질 뻔했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도현도, 도운도. 이야기할수록 해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형이 원한다면 난 바꿔서 출근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알아.”

“형은 결국 사실대로 말해야 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겠지?”

“응, 형. 지금이라도 빨리 말하는 게 어떨까.”

“그런데 도운아. 나는 너무 겁이 나.”

“뭐가 겁이 나는데?”

“전부 다.”

“그럼 뭐가 ‘제일’ 겁이 나?”

“제일?”

도현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미래가 예상된다. 자신과 함께 책임을 뒤집어쓸 삼촌, 업무가 어그러졌다면서 혼낼 비서실장님, 모른 척하면서도 자신을 위로해줄 사수님, 그리고 당황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같이 수습할 동생.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나한테 거짓말했다고 화낼 대표님.”

“그게 제일 겁이 나?”

“응.”

“형은 정말 대표님을 좋아하나 보네.”

“그런가 봐.”

“예전 같았으면 나한테 미안해서 제일 겁먹었을 텐데.”

“그러게. 미안하네.”

“그나저나 난 형이 남자를 좋아할 줄은 몰랐어.”

“놀랐니?”

“아니. 대표님이면 그럴 만도 해. 나도 이해 간다.”

“그래?”

“그런데 난 아닌 것 같아. 이해만 간다는 거야.”

도운이 자신은 아니라는 듯 선을 긋고 고개를 젓자 도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절박한 표정에 자신은 민혁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간절하게 어필하는 것 같아서. 도현은 잠시 웃다가 웃음을 멈추었다.

“내일은 바꿔서 출근하자.”

“그럼 내가 오후지? 난 좋아. 사실대로 말할 거야?”

“모르겠어. 뭐가 되었든 간에 네가 오전에 출근하면 곤란할걸.”

“그러긴 하겠다. 갑자기 멜로영화 남자주인공인 대표님 보면 당황할 것 같아.”

“너도 난감하겠다.”

“형도 빨리 사실대로 말해줘. 언제까지 이럴 순 없잖아.”

“알겠어. 미안해”

“미안하긴 뭘. 오히려 고마워. 나 대신 출근하느라 고생했어.”

“뭘. 형인데. 할 수 있지.”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

“내가 아무나냐?”

도현은 도운의 등짝을 한 대 치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새벽에 출근하려면 일찍 자 둬야 했다. 내일은 꼭 사실을 말하리라 마음먹었으니, 피곤한 하루가 되겠지. 도현은 눈을 감았다. 민혁이 사실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보고 더이상 도운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겠지. 그 생각 하나에 위안을 받으며.

도현은 도운의 옷을 입고 명찰을 단 뒤에 집 밖으로 나섰다. 짧고 약한 경적소리에 골목을 보니 민혁이 차를 몰고 나와 있었다. 도현은 외투를 추스르고 서둘러 뛰어갔다. 도현이 도착하자 민혁이 자연스럽게 볼을 잡고 입맞춤을 했다. 짧게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운씨, 잘 잤어요?”

“그럭저럭요.”

“나는 도운씨 생각하느라 늦게 잤는데.”

“일도 많으신 분이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현의 얼굴 위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도현이 막 차에 타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도현이 뒤를 돌아보자 도운이었다. 도운이 무언가를 손에 쥐고 삼선 슬리퍼 바람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무엇을 빠뜨리고 간 모양이었다.

“야! 이거!”

형이라고 안 불러줘서 정말 감사하다. 도현은 물건을 받으며 머리를 까닥여 민혁을 가리켰다. 민혁이 직접 도현을 픽업하러 온 것을 알아챈 도운이 입을 멍청하게 벌리다 인사했다. 그래, 대표님과 우리 형은 사귀는 사이였지. 그런데 형을 나로 알고 있지. 갓 깬 도운의 머리가 느리게나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그래요, 도현씨. 오후에 봐요.”

“네, 오후에 뵙겠습니다.”

“그럼 도운씨, 갈까요?”

그 말에 도운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차로 다가가 버렸다. 하필 신고 있던 것도 삼선 슬리퍼라 딱 하고 큰 소리를 내었다. 도운의 한 걸음에 도현과 민혁의 시선이 모두 도운에게 쏠렸다. 도현인 척을 하는 도운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저는... 그러니까 잘 가시라고요.”

“네.”

“어, 도현아.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지만 소개할 때나 몇 번 자신의 성과 이름을 다 불러보는 법이다. 이렇게 친근하게 남을 부르듯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도현은 민혁이 열어주는 조수석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탔다. 민혁은 운전석에 앉으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도운씨가 형이죠?”

“형이요? 아닌데요.”

“그래요?”

“정도현이 형, 정도운이 동생이죠.”

“그렇군요.”

“왜 그러세요?”

“아, 도현이라고 부르기에 동생인 줄 알았습니다.”

“쌍둥이다 보니까요. 형 동생 구분이 없죠.”

너무 많이 실수했다. 도현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면서 깨물었다. 도현을 쳐다보던 민혁은 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 그렇게 말면 상해요.”

“네...”

“왜 그래요.”

“그냥 좀 그러면 안되나 싶어서요.”

“뭐가요?”

“아니 그냥 형 동생 나눠서 불러야 하나요.”

“그건 도운씨 마음이죠.”

“네...”

당황하니 아무말이 나온다. 도현은 어색한 분위기가 돌자 가방에서 뒤적거리며 챙겨두었던 빵과 커피를 꺼냈다. 지금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 드실래요?”

“운전하면서요?”

“먹여드릴 수 있는데.”

“지금 그거 엄청 설레는 말인거 알아요?”

“근데 빵도 안 데워왔어요.”

“상관없어요.”

“빵 부스러기 떨어지는데요.”

“차라면 새로 사면 될 텐데요.”

“우와.”

지금 그 말 엄청났어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고는 적당히 따뜻하게 만들어 온 커피와 빵을 꺼냈다. 오늘은 차 안에서, 기사 없이, 모든 것이 광공의 정석에서 벗어난 아침이었지만 참으로 평화로웠다. 민혁은 한 손으로 운전하며 한 손으로는 ‘도운’이 타 준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가 뱃속으로 퍼지며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런던에 있는 민혁의 자택에서 2달 정도만 사람 있는 행세를 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잠시 하지 말아 달라는 괴상한 부탁에 환강은 처음에 거절했다.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과 어떻게 튼 연락인데. 하지만 모든 체류비를 지원하고, 다녀와서 지민혁과 여러 번 만나게 해 주겠다는 소리에 환강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환강의 실상을 모르는 한율은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출장을 간다고 말했던 환강은 그 이후로 답이 없었다. 실상은 민혁이 새 전화기를 주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외 출장을 보내버린 것이라 답이 없는 것이었지만 한율의 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한율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도윤을 떠올렸다.

도윤은 환생하기 전에 여러 가지를 한율에게 부탁했다. 자신의 기억을 지워줄 것. 쌍둥이로 태어나게 해 줄 것. 자신의 삶을 사는 공간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처럼 만들어 민혁과 애초부터 얽히지 말게 해 달라고 할 것. 한율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번, 제각기 다른 위치에서 환생해도 도윤은 어찌하든 지독하게 민혁과 얽혔다. 아마 이번에도 한율이 어떻게 하든 간에 도윤은 민혁과 얽힐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길게 숨는 방법을 선택한 거겠지. 그리고 덜 아플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억을 잃는 거겠지. 한율의 죄라 하면 그런 도윤의 부탁을 들어준 것밖에 없었다. 다만 민혁이 절박해지라고 앞에서 도윤을 던지고 쇼를 좀 선보였을 뿐. 그렇지만 아무  사정을 모르는 민혁이 이렇게 되돌려 준다면야 한율도 생각이 있었다. 한율은 자신이 이 곳에서 만났던 도윤을 떠올렸다. 한율은 도윤에게 천천히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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