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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1 2부 : 유리구두 (51/82)

00051 2부 : 유리구두 =========================

“저는 스케이트 잘 못 타요.”

아무도 없는 아이스링크. 환하게 켜진 조명. 스케이트 날 자국 없이 투명한 얼음을 보며 도현이 하얗게 질려 민혁에게 말했다. 도현은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낭만적인 데이트’ 중 하나를 기억해 민혁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에는 민혁의 숨겨진 애인에게 해 줄 데이트라고 생각해서 아무거나 말했는데, 자신이 그 애인이 될 줄 알았다면 스케이트는 말하지 않았을 텐데!

“더 잘 됐네요.”

“뭐가요.”

“내가 가르쳐 줄게요, 도현씨.”

도운은 민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한 번 그랬던가, 대표님은 실수를 하곤 했다. 지금 자신은 ‘도운’이로 와 있는데도 가끔씩 도현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하곤 했다. 빤히 쳐다보는 도현의 눈빛에 민혁이 재빨리 말을 바꾼다.

“도운씨. 미안해요.”

“아니에요.”

사실은 좋았어요. 도현은 그 말을 도로 눌러 담았다. 실수인 것은 알지만 사실은 실수가 아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도운이랑 바꿔서 근무 중인걸 아는 건 아닐까? 혹시 자신을 시험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또 희망이 생긴다. 지금 자신이 도운이가 아니라 사실은 도현이라는 걸 밝혀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그렇지만 도현은 너무 겁이 많았다. 겁이 많은 마음이 늘 진실을 말하기 한걸음 전에서 주저앉아버리곤 한다.

도현이 어떤 생각을 하는 줄 모르는지, 민혁은 수행원에게 백화점에서 들고 온 쇼핑백 하나를 건네받았다. 거기에는 새 스케이트가 있었다. 민혁은 도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움직일 생각 없는 도현을 보며, 민혁이 도현의 발을 끌어당겼다.

“스케이트화 신어야죠, 도운씨.”

“직, 직접 신겨주시려고요?”

“네.”

“어, 저, 제가 신어도 되는데!”

“괜찮아요.”

민혁은 정말로 상관없었다. 더러운 아이스링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도현의 왼발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사 온 스케이트화를 신겼다. 조금 뻑뻑하게 들어갔지만, 발에 꼭 맞았다. 눈대중으로 짐작한 것인데도 다행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확신이 든다. 도운이 도윤이란 것을. 예전에 도윤과 함께 밤을 보낼 때 잡았던 도윤이의 발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리고 민혁은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정말 별 것 아닌 것에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마음이 뛰는 자신이 너무 작아 보여서.

흡사 유리구두를 신기듯 ‘도운’의 발에 스케이트화를 신긴 민혁은 두 발로 일어났다. 아직은 평지라 ‘도운’도 비척거리며 잘 일어날 수 있었다. 민혁은 천천히 ‘도운’의 손을 잡고서 아이스링크로 향했다. ‘도운’의 엉덩이가 뒤로 빠진 것을 보니 아마 겁을 먹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도운씨.”

“그래도 미끄러지면..”

“미끄러져도 안 다쳐요.”

“다치면요.”

“제가 평생 업고 다닐게요.”

도현은 민혁의 눈을 바라본 순간, 평생 업고 다닌다는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를 내어 아이스링크에 한 발을 디뎠다. 살짝 밀리는 듯한 느낌에 도현이 우왁 소리를 지르면서 민혁에게 안기듯 지탱한다. 민혁은 기대했다는 듯이 ‘도운’을 폭삭 안았다.

“일단 한 번 타 볼까요?”

‘도운’을 뒤에서 앉고 민혁이 한 바퀴 아이스링크장을 돌았다. 도현은 성인 남성 치고는 아주 작은 체구가 아닌데도 민혁과 함께 있으면 품에 폭 들어가 작아 보였다. 그렇게 한 바퀴 돈 후에 민혁은 다시 ‘도운’의 양손을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떼게 해 보았다. 한 두 번 넘어지고 나니 오기가 생기는지 ‘도운’은 민혁의 두 손을 꼭 잡고 매달리면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아무리 도운의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지만, 좋아하는 사람과의 데이트가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동안 도현은 민혁의 두 손을 잡으며 아이스링크장을 누볐다. 한 시간쯤 되었을까, 얼음의 한기와 열렬한 스케이트 강습로 인해 발갛게 달아오른 도현은 웃으며 아이스링크장을 나왔다. 엉거주춤 걸어가는 도현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챈 건 민혁이었다. 민혁은 ‘도운’의 발개진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도운씨.”

“네, 대표님.”

“민혁씨라고 불러줄래요?”

“네?”

“그리고 핸드폰 번호 주세요.”

“제 번호요?”

“업무용 말고요.”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서 번호를 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도현은 꾸물거리며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민혁이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더니 돌려주었다. 민혁은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다가 생각없이 툭, 하고 말을 뱉었다.

“그런데 도운씨.”

“네?”

“도운씨는 자기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해 놓네요.”

도현은 순간 자신이 아이스링크장에 깔린 얼음의 한기로 이미 볼이 발갛게 변해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다. 도현은 말을 더듬지 않고,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굉장히 여상스럽게 말을 툭, 던진다.

“도현이도 그런걸요.”

“독특하네요.”

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도현이 일부러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받아들고 민혁의 동태를 살폈다.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들키지는 않았는데 뒷맛이 찝찝했다. 도현은 자신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자세히 살폈다. 배경화면은 풍경사진, SNS는 잠금상태였다. 조금 안도해 자신의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며 민혁에게 슬쩍 주제를 돌려 말한다.

“오늘 밤, 전화해도 되나요?”

“좋아요, 도운씨.”

도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웃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도운을 바래다준 뒤 입맞춤까지 한 번 하고 집으로 돌아온 민혁은 걸려온 전화에 잠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실망스럽게도 비서실장의 전화였다. 비서실장이 들으면 참으로 서운할 만한 생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환강씨가 서류를 들고 출국했습니다.”

“그래, 설명은 해 줬습니까?”

“납득은 못 하지만, 받아들이겠다고는 하더군요.”

“조건이 좋으니 어쩔 수 없겠죠.”

“해외여행 두 달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하라 했습니다.”

“김 팀장은 뭐라고 안 합니까?”

“너무 조건이 좋으니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내가 능력 좋은 사람을 고용하긴 했군.”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괜한 걸 묻네요.”

“...죄송합니다.”

“끊겠습니다.”

“네, 대표님. 좋은 밤 되십시오.”

제환강이 출국했다.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두 달 정도 살다가 귀국하겠지. 그 사이에 자신의 어여쁜 동생은 속이 타 미칠 것이다. 별생각이 다 들겠지. 환강이 어떤 일을 당했을까, 잡혀서 어디 감금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민혁의 삶에서 한율과 환강은 그 정도의 비중을 자치할 만큼의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애써 그런 일을 하면서까지 머리 아파지고 싶지는 않았다. 딱 자신이 도윤을 유리벽 너머에서 바라보고 미칠 것 같았던 심정만 다시 겪어보기를 바랄 뿐이었다.

“비서실장이 피곤해지겠군. 조금 전에도 피곤해 보였는데.”

민혁이 전화를 받을 때 비서실장의 피곤했다는 것은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감추려고 노력한 듯 보이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예민하게 잡아내는 민혁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민혁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이런 적이 한 번 더 있었던 것 같았다. 감추려고, 노력하는데, 보이는 것들. 그걸 어디서 봤더라. 그래, 마치 아이스링크장에서 헤어지기 전 ‘도운’의 환한 웃음이 그러했던 것 같았다. 민혁은 순간 불길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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