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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0 2부 : 유리구두 (50/82)

00050 2부 : 유리구두 =========================

민혁은 자신이 업무용 핸드폰 외에는 도운의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참 동안 넋이 빠져 있다가 서둘러 잘 들어갔냐는 메시지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내일 직접 얼굴을 보고 직접 물어보기로 한 민혁은 다시 비서실장에게 전화했다. 취소한 시간에 할 일이 많았다. ‘도운’의 환심을 사야 하고, 환강과 한율을 만나게 한 뒤 환강을 빼돌려 한율을 엿먹이는 일도 늦출 수 없었다.

한편, 비서실장은 밤중에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내일 호텔 스튜디오 하나를 빌려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준비하라는 지시에 이어, 백화점 개점 전에 조용히 쇼핑하고 싶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게 뭘까, 하고 고민하다 이어서 스케이트장을 전세 내라는 지시에 비서실장은 감을 잡았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비서진들이 회장님 일정 짜느라 머리가 터지게 한다는 연애의 요정이 찾아온 모양이노라고.

다음 날이었다. 어머니가 깨실까 봐 조용히 집을 나온 도현은 잠시 자신이 무엇을 심각하게 잘못했나 되짚어 보게 되었다. 늘 자신이 택시를 타기 위해 빠져나오는 골목에 화려한 외제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여느 잘 사는 동네에서도 보기 드문 외제차의 모습에 도현이 내심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대표님이 나왔다.

“여기 왜 계시는 거예요, 대표님?”

“도운씨를 데리러 왔습니다.”

“기사는요?”

“오늘은 기사가 운전하지 않을 겁니다.”

“네?”

“내가 오늘은 운전합니다. 오늘 도운씨를 데리고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도현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업무용 핸드폰을 켰다. 어제 확인하고 잔 일정은 M그룹 측과 회의도 있었고, 매일 하는 아침 회의와 내방객도 두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확인한 일정에는 그것이 모두 없어지고 그저 공백뿐이었다. 도현은 어제 있었던 키스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표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옷도 회색 코트에 검은 목폴라티, 그리고 검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른, 조금은 편한 옷차림이었다.

“대표님.”

“네.”

“오늘 뭘 하실 건가요?”

“이것저것요.”

민혁은 도현을 에스코트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조수석에 앉은 도현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일정을 소화하며 잠시 짬이 날 때 즈음 사실은 제가 도현이라 밝히려고 했었다. 하지만 막상 닥쳐온 민혁의 거대한 진심에 도현은 겁이 났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극심한 혼란에 빠진 도현이 조수석에서 손톱만 뜯고 있을 때, 옆으로 민혁이 들어왔다.

“도운씨, 오늘 우리는 먼저 백화점에 갈 거예요.”

“네? 네...”

“백화점을 하루 동안 빌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급하게 결정된 거라 백화점을 통째로 전세 낼 수는 없었어요. 미안해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없으신데요.”

“너그럽네요, 도운씨는.”

그런 걸 가지고 미안하고 너그럽다고 하는 분은 대표님밖에 없으실 것 같습니다. 도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꿀꺽하고 도로 삼켰다. 민혁은 차를 몰고 J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 지하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자 대리주차 직원이 나왔다. 가장 좋은 자리에 차를 주차해 두겠다며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민혁은 먼저 내려 도운의 자리에 문을 열어주었다.

“내려요.”

“네, 대표님.”

어쩐지 화려한 삶의 모습을 조금 엿본 것 같아 기가 죽어 도현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민혁은 그런 모습도 귀엽다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얼결에 민혁의 손을 잡고 조수석에서 에스코트를 받아 내렸다.

이윽고 이어진 쇼핑은 지금까지 도현이 겪어온 삶과는 단위가 다른 쇼핑이었다. 옷이 불편해 보이니 편안하게 입었으면 좋겠다며 눈앞에 보이는 명품 매장에 들어가 후드티와 바지, 운동화를 골라 신겨주는 것부터 기절할 것 같은 노릇이었다. 자신이 백만원짜리 운동화를 신으면 밑창이 닳을까 봐 신지도 못할 것 같은데, 민혁은 그런 신발을 단지 어울린다는 이유로 몇 켤레를 사서 그대로 도현에게 안겨 주었다. 물론 그 짐조차 도현이 아닌 뒤따라온 점원이 들었다.

“대표님.”

“왜요.”

“제가 진짜 이게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아니, 제가 뭘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저는 지금 도운씨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예요.”

민혁은 ‘도운’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대었다. 민혁에게 도운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최고로, 존귀하게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렇게 하는 것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였다. 민혁은 ‘도운’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다행히도 외모는 도윤의 취향대로 태어났다. 감정은 천천히 해결할 문제다. 그럼 가진 건 돈밖에 없으니 그것이라도 들이부어야 했다. 지금 ‘도운’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한없이 부족한 건 이쪽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민혁은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절박했다.

도현은 자신의 손을 별안간 끌어당겨 답지 않게 자신을 응시하는 대표님의 행동에 당황했다. 누구에게도 절대 약한 모습 보이지 않고 감정적일 것 같지 않던 민혁이었다. 그런 민혁이 자신 앞에서 애교 비스무리한 것을 떨다니. 마치 거대한 시베리아 호랑이가 실컷 사냥하고 난 뒤, 피 묻은 입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배를 까고 누워서 쓰다듬어 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한테... 잘 보이고 싶으시다고요?”

“그럼요.”

“왜요?”

“반했으니까요.”

도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망한 것 같았다. 자신이 과연 오늘 안에 도운이 아닌 도현이라고 이야기할 수나 있을까. 과연 말했을 때, 저 사랑의 본질은 변해버릴지, 아니면 대표님이 화를 낼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쪽이 더 무서운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도운이를 사랑할까, 아니면 계속 나를 사랑해 줄까. 아니면 화를 내고 떠나버릴까. 도현은 저도 모르게 잘릴 것에 대한 걱정은 어느새 저 뒤로 제쳐두고 있는 자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H호텔 스튜디오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도현은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계속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말 때문에 맛있는 것을 먹는데도 목구멍으로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내일이면 괜찮아진 도운이가 퇴원할 테고, 그럼 이 상황과 마주하게 되면서 얼마나 황당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반했다는 대표라니.

걱정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도현과는 달리, 민혁은 수컷 공작새가 자신의 화려한 꼬리깃털을 펴 대며 자랑하는 것과 같이 잘 보이고 싶어 온갖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호텔에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도운’ 때문에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는 건가 걱정만 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부담스럽게 나갔다 후회했다. 하지만 스케이트장을 통째로 빌린 거라면 조금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걸고 있었다.

민혁은 ‘도운’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맞은편 스튜디오로 노크한 뒤 들어갔다. 일부러 환강과 한율이 만날 장소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예약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환강과 한율이 만나고 있을 터였다. 노크한 뒤 문을 열자 못볼 것을 봤다는 얼굴인 한율과 환강이 앉아있었다. 제 형이나 상사라니, 참으로 팬미팅에서 보고 싶지 않은 조합이겠지.

“우리 막내가 잘 하고 있나 궁금해서.”

“형..은 가도 돼.”

“형이 네 인기가 대단하다는 걸 느꼈는데 그만 설레는 마음에 와 봤단다.”

“바쁘지도 않나? 기업 물려받으려고 큰형이랑 싸우려면 보통 바쁜 게 아닐 텐데.”

“그래도 막내 팬미팅에 올 정도는 돼지.”

“안 와도 돼.”

“섭섭하게 굴 테니?”

환강씨에게 일이나 더 얹어줘야겠구나. 그 말에 둘 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율이 입을 다물자 환강에게 정답게 말했다.

“복리후생은 참 좋은 편이죠, 우리 회사?”

“그렇네요, 사장님.”

“내가 김 팀장님 덕에 우리 막내 팬도 다 보네요.”

“제가 김 팀장님 덕에 연이 닿은 거죠.”

아마 자신이 이 방에서 나가면, 한율이 환강에게 일자리를 제안할 것이다. 코디든 매니저든 기사든. 하지만 환강은 김 팀장에게 미안해서라도 단숨에 여길 떠나지 못하게 되어있다. 민혁은 그걸 알고 있었다. 둘이 자신을 피해 다시 만나는 약속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환강은 민혁의 밑에서 계속 일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민혁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민혁은 해외에 있는 런던 저택에 환강을 한두 달 정도 보내 둘 계획이었다. 아마 자신이 부탁한 서류를 런던 저택에서 받으면, 환강은 거기에 한두 달 정도 체류해 있게 될 것이다. 그 서류 자체가 환강을 런던 저택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대 두 달까지는 잡아두라는 내용이니까. 민혁이 아마 도윤을 찾지 못했다면 한두 달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윤을 찾았기에 민혁은 아주 너그러워져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민혁은 살짝 웃음 짓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궁금해서 와 보긴 했지만, 여기에 쏟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도윤이었다. 그러니까, ‘도운’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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