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2부 : 유리구두 =========================
도운이란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도운이가 아니라 자신은 도현이라고 해명해야 하는데. 온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현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팽팽 도는 것 같았다. 모든 사실이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도현이라는 것을 밝힌다면? 도운이가 걱정된다.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비서진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건강이 나빠 모두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잘릴 것 같았다. 그 뿐이던가. 자신을 보증해 준 삼촌에게도 폐를 끼칠 것이 분명했다. 몰래 눈 감아준 사수님도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랑이 싹튼 작은 마음이 가장 겁에 질렸다.
“괜찮아요?”
하얗게 겁에 질린 ‘도운’의 얼굴을 보고 민혁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아직 기억이 없는 도윤에게 내가 너무 내 감정에만 취해 키스한 것은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도윤은 울면서 말했다. 민혁이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취한다고. 민혁은 늘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옭아매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채운 자물쇠란 것은 늘 그러하듯 쓸모가 없는 것이다.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기에, 자기가 풀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민혁의 사랑도 겁이 나버려 덜컥 한발 물러선다.
그러니까 그들은, 동시에 한 발씩 물러선 것이다.
키스한 뒤 도현과 민혁은 한 발짝씩 물러섰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당장 내일도 도운과 도현으로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은 ‘도윤’이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을지에 대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 어색한 침묵의 고리를 먼저 끊은 것은 민혁이었다.
“도운씨.”
“...네? 네.”
“일단 오늘은 집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도현은 민혁이 ‘실수를 했다’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자신의 상사가 당황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이 잘리지 않도록 변명을 퍼부었다.
“아뇨, 이해합니다. 술이 너무 셌나 봐요.”
“도운씨, 도운씨.”
“저도 취해서 선을 넘었...”
“도운씨!”
“네?”
“실수는 아닙니다.”
민혁은 바보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없던 일로 하고 ‘도운’에게 안도감을 주겠다, 혼란스러우니 조금 쉬어가겠다 하며 뒷걸음치는 최악의 수는 두지 않을 것이다. 도윤이 도망갈 길 따위는 주지 않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이미 있었던 일은 있었던 것이다. 마치 도윤이가 겪은 회귀 같은 것이었다. 도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도윤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다.
도현은 민혁을 보았다. 민혁이 자신의 손을 잡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마저 달아오른다는 것을 느꼈다. 실수가 아니라고 못박는 민혁을 보자 도현의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도현은 그저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도현은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저, 내일 출근해서.”
“내일 꼭 출근하세요. 어디 가지 마시고.”
“네, 네. 꼭 출근할게요.”
도현이 붉은 얼굴로 서둘러 현관 쪽으로 갔다.
“도운씨!”
민혁이 부르는 소리에 한 박자 늦게 도현이 돌아보았다.
“코트 두고 갔어요.”
“감,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봐요.”
“네. 그리고 대표님!”
“네.”
“도현이, 그러니까 형, 형이요. 형은 괜찮아요. 내일 출근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 아니 기사에게 말해두죠.”
“네?”
“제 차를 타고 가세요.”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괜찮습니다.”
“내가 설마 나랑 키스한 사람을 택시 따위 태워서 보낼 것 같습니까?”
“키스. 아니.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는데요, 그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부담...”
“그럼 제가 운전할까요?”
민혁이 강하게 말했다. 도현은 잠시 상상했다. 이런 키스 직후에 상사이자 키스 상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상상을. 그것보다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 가겠습니다.”
“좋아요.”
‘도운’이 차를 타고 무사히 집 앞에 도착했다는 기사의 보고에, 드디어 민혁은 어딘가에 앉을 수 있었다. 검은 소파 위에 주저앉은 민혁은 소파에 기대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온몸이 리듬에 맞춰 쿵쿵거리는 것 같아서, 민혁은 잠시 동안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조절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 숨통이 트인 느낌이란, 마치 오랫동안 물속에 살던 인어가, 다리를 가진 후 쉬는 첫 호흡과도 같았다.
드디어, 드디어 닿았다.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도윤이는 다 잊어버리고 웃고 있었다. 울지도 않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사랑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단지 도윤이이기 때문에 민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할 수 있었다. 가장 비인간적인 공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돌봐준 사람. 그리고 돌고 돌아도 인연이 여덟 번이나 닿은 사람. 민혁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광공스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뻐 속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일 도운이 출근하면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제일 먼저 백화점에 갈 생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사 준 것으로 입혀놓을 생각이었다. 마침 자신이 사 준 정장을 입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옷도 잔뜩 사 줄 생각이었다. 평소에 입을 평상복은 물론이고 잠옷과 양말과 속옷까지. 모두다. J 백화점을 통째로 비워 놓고 눈길이 잠시 멈추었다 하는 것은 모조리 사서 그 발아래 갖다 바칠 계획이었다.
그뿐일까. 민혁은 일전에 김 팀장이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살고 있다고. 김 팀장을 민도윤 찾기에 끌어들일 때도 김 팀장의 누나, 그러니까 도운의 어머니가 지고 있는 빚을 청산하고 등록금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했다. 이제 그것으로 부족했다. 두 사람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그리고 도운은 사옥이란 이름으로 따로 살게 할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수행비서 일을 강조하며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사랑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이미 기억나지도 않는 여섯 번의 삶에서 도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지금 와서 다 닳아버려 더 이상 남은 사랑이 없을까 봐. 도윤이가 다시 사랑해 줄 수 없을까 봐.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이 사랑을 바쳐도 좋았다. 그저 옆에서 도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때처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면 더욱 좋았지만, 다만 한 공간 안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며 나이가 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민혁은 벅차고 행복했다. 민혁은 행복에 겨워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네, 대표님. 비서실장입니다.”
“내일 일정은 모두 다 취소하세요.”
“내일 M그룹 측과 회의가 있습니다만, 취소할까요?”
“취소하고 다시 날짜 잡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편, 행복한 민혁과는 달리 집에 도착한 도현은 심란해졌다. 오는 길에 도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도운은 내일 퇴원한다고 했다. 도현은 당장 자신의 앞에 놓인 상황이 너무 꼬여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도운 대신 좋은 마음으로 출근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일이 비틀릴 줄은 몰랐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긴 해야겠지...”
더 잘못되고 꼬이기 전에 말을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두려웠다. 결국 두려움이 앞선 도현은 도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사와, 그것도 같은 남자와 키스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니 두려워서 결국 전화기를 놓아버렸다. 도대체 무엇을 누구에게 어디서부터 이야기할지가 고민이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도현은 핸드폰을 던져두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도운이가 퇴원하기 전, 하루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하루만 더 ‘도운’이로 출근해 보고 방법을 생각하자.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만 완전히 꼬여버린 상황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민의 깊이가 깊었던 만큼 정신이 시달렸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도현은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