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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8 2부 : 유리구두 (48/82)

00048 2부 : 유리구두 =========================

도현은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면 유리 너머로 잠들지 않는 서울의 밤이 내려다보였다. 수많은 빛을 발아래에 두고 있는 감상에 젖으니, 잠시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민혁은 도현에게 들고 있던 술 한잔을 건네었다.

“도운씨도 이 광경이 참 마음에 드나 보네요.”

“...네, 대표님.”

도운이란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도현이 술을 받아들었다. 둥글게 깎은 얼음이 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들렸다. 예전에 친구들과 세계 맥주를 파는 곳에서 돈을 모아 보드카나 몇 번 마셔본 도현으로써는 참으로 낯설고 좋은 향이었다. 센 술일까 망설이며 입에 살짝 대 보니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민혁은 ‘도운’이 잘 마시는 것을 본 뒤에야 자신도 입에 술을 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 드린 숙제는 잘 생각해보셨나요?”

“아, 데이트 말씀이시죠.”

도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텐딩 테이블에 몸을 조금 편히 기댄 도현은 자신이 찾아보았던 데이트 코스를 떠올리며 하나씩 말해가기 시작했다.

“사실 대표님께서 처음에 데이트 코스를 알아보라고 하셨을 때, 저희 또래가 하는 평범한 데이트 코스로는 만족을 못 하실 것 같았어요.”

“평범한 데이트 코스가 뭔데요.”

“영화보고 밥 먹고, 카페가고.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군요.”

“물론, 대표님께서는 영화관을 통째로 빌리시고 레스토랑도 빌리시고, 카페도 통째로 빌리시는 특별함을 보여주실 수 있다고는 생각했어요.”

“백화점도 전세 내서 쇼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농담 아니시죠?”

“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모습에 도현은 민혁이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은 정말로 영화관과 레스토랑, 카페와 백화점을 통째로 전세 낼 계획이었다. 하긴 J그룹 산하에는 백화점이나 면세점도 있었다. 백화점 영업 종료 후에 한두 시간 정도는 더 쇼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어느 백화점은 아랍 부호가 휴점일에 방문해 온종일 쇼핑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제 생각에는 겨울에 스케이트장이나 스키장도 좋을 것 같아요.”

“스케이트 장이나 스키장이요.”

“스키 같은 경우는 알프스산 같은 곳 있잖아요. 그런 데에서 스키를 타셔도 좋을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해보니까, 상대분께서는 스키를 못 타실 수도 있겠다 싶은 거예요.”

“그렇군요. 스키를 못 타면 확실히 자연설에서 스키를 타기엔 어렵죠.”

“그렇죠. 스키를 모르면 가르쳐주면서 더 분위기도 좋아질 수 있는데요.”

“그럼 스케이트장입니까?”

“네. 마치 가로등 같은 노란 조명 불빛 밑에서 스케이트를 두 손 잡고 타면 참 좋지 않을까요? 대표님이면 하루 정도 스케이트장도 빌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노래로는 맨디 무어의 only hope를 틀어놓으시면 좋지 않을까요.”

“왜 그 노래죠?”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분위기가 그렇단 말이죠?”

“네.”

우연인지는 모르겠군. 민혁은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눈앞에 있는 ‘도운’이 정말로 도윤이고, 기억을 사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자신을 위한 노래인지, 도윤을 위한 노래인지 모를 가사에 민혁은 실없이 피식 웃어야 했다. 민혁이 웃는 것을 보고, 도윤은 자신의 제안이 민혁의 마음에 든 것으로 착각했지만.

“그리고 이건 제가 그냥 생각해 본 건데... 제 취향이라서 어쩌면 상대분께 맞을지는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하든 괜찮을 거예요. 말해줄래요?”

도현은 손에 쥐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말했다. 살짝 단 과일 케이크의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제법 달게 감겨오는 술이 입맛에 맞았다. 민혁도 저도 모르게 ‘도운’이 마시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는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을 마시고 있는데도 목이 바짝거리며 타들어 갔다. 스케이트장도, 스키장도. 모두 한 번씩 언젠가 도윤이 말한 것들이었다.

“박물관이나 천문대를 빌리는 거예요.”

민혁이 들고 있던 술잔을 스탠딩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잔을 놓칠 뻔했다. 손이 떨렸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연사 박물관이 좋아요. 뉴욕 자연사 박물관 해양 홀에는 커다란 흰긴수염고래가 있대요. 런던은 메인홀에 공룡 뼈가 전시되어 있고요. 그건 영화에서 봤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직접 가 보셨나 보네요.”

“...아직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도윤을 찾기 전까지는 자신 혼자 갈 수 없었다. 도윤이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말하던 대목이었다. 그곳에 도윤 없이 자신 혼자만 있다는 것을 알면, 정말 세상이 도윤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였다.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커다란 전시물 밑에서 한없이 작아져 혼자 있다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플 것이라는 걸.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다는 것을.

“아니면 유명한 영화 촬영지인데, 캘리포니아의 그리피스 천문대가 있대요. 여기 플라네타리움 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민혁은 애써 자신을 억누르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슨 날이 좋을까요?”

“글쎄요. 아무 날이나 좋을 것 같지만. 역시 크리스마스나 새해 전야가 특별하겠죠.”

민혁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책상을 손으로 잡아야 했다. 커프스 핀을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골라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정장도 고용인들이 회색 정장을 골라 준 적도 있다. 아침도 어쩌면 몸 상태가 좋아서 한두 번 먹을 수도 있다. 박물관이나 천문대 데이트도 지나가다 누군가가 한 것을 보고 민혁에게 추천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겹칠 수는 없다. 도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목소리를 한 사람에게.

민혁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는 입을 누르듯 막았다. 겨우 천 일 정도의 시간이었다. 아마 회귀를 반복한 도윤에 비하면 찰나와도 같은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환생 후에 매일 도윤을 잃어버리고 놓친다는 후회 속에서 살았다. 연약한 도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만 했다. 이 세상 속에서, 어디에서 살아있는 건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다. 큰 절망과 아주 작은 희망 속에서 고문당하고 있을 때, 너그럽게도 도윤이 나타나 준 것이다.

민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민혁은 천천히 ‘도운’에게 다가갔다.

“도운씨.”

“네...?”

가까이 다가온 ‘도운’에게 내려앉듯 입을 맞춘 것은 민혁에게 당연한 이치였다. 민혁도 알았다. ‘도운’과 자신 사이에는 아직 쌓아 갈 서사가 있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이 넘칠듯한 감정은 ‘도운’이 모르는 것이었다. 잘 정제하고 다듬어 하나씩 차근차근 건네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운’이 된 도윤은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도윤에게 민혁이 향하는 것은 처음 숨을 뱉은 아기가 울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빛이 내리쬐면 눈살을 찡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현상이자 이치였다. 민혁은 수없이 그 순간을 상상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진정해야 한다고 했건만, 그 순간 앞에서 민혁은 그저 도윤의 어깨와 입술 위로 무너지듯 내려앉는 것 빼고는 할 수가 없었다.

“대표...님?”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도현은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전혀 보답 받을 줄 몰랐던 짝사랑 상대가 입술을 맞춰왔기에. 정신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것도 지민혁이었다. 지민혁이 자신에게 저렇게 상처받기 쉬워 보이는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솔직한 얼굴로 입을 맞춰오는 것을 본 순간,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화답했다.

순간의 키스는 감미로웠다. 눈을 감았더니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랫입술로부터 젖어 밀려 들어오는 지민혁이 있었다. 내뱉은 숨이 서로의 입술에 닿았다. 눈을 절로 감았다. 키가 훨씬 큰 주제에 자신을 낮추어가며 절박하게 매달려오는 지민혁이 있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민혁의 등을 더듬거리다 목을 끌어당겼다. 민혁의 입에 남은 위스키 향이 느껴졌다. 아침에 옷에 뿌려둔 향수의 잔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을 넘어 목덜미 사이에서 느껴지는 살내음이 있었다.

“도운씨...”

떨어지며 민혁이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도현은, 자신이 도운의 이름으로 여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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