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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7 2부 : 유리구두 (47/82)

00047 2부 : 유리구두 =========================

“어, 도운아. 좀 괜찮아?”

“물만 먹고 있어. 금식이라 죽을 것 같아.”

“응, 좀 괜찮지긴 했어?”

“그래도 오후부터는 죽 먹을 수 있다던데.”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문자 남겨.”

“심심할 때 남겨도 돼?”

“그럼.”

근무시간이 길어 면회시간에 맞춰 가지도 못하는 도현이었다. 어머니가 들락날락하면서 간간이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점잖은 척 괜찮다, 필요한 거 없다,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하는 도운도, 형 앞에서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아마 온전히 기댈 구석을 찾는 거겠지. 쌍둥이로 몇 분 차이 안 나게 태어났는데도 도현이가 형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짧은 통화를 끝냈는데 환강씨가 들어왔다. 도현은 얼른 일어났다.

“환강씨, 오셨어요.”

“네. 도현씨도 안녕.”

삼촌 대신 보고할 사람이 환강씨로 바뀌었다고 했다. 삼촌은 이제 대표님 앞에 가서 쩔쩔맬 필요도 없이 편하게 아침잠이나 더 잔다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도현이 가장 잘 알았다. 아마 환강씨가 제대로 보고했나, 대표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는 않았다 하는 잔걱정에 오히려 안절부절 못할 사람이다. 정작 그 속을 태우는 환강은 태평하고 느긋한 모습이지만.

“잠시만요. 대표님꼐서 기다리고 계세요. 여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네.”

도현은 잠시 문을 열고 들어가 깊게 생각에 빠진 민혁에게 말을 걸었다.

“대표님. 8시 약속된 제환강씨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세요.”

“네, 알겠습니다.”

도현은 그렇게 말한 뒤 환강을 안으로 들게 했다. 커피를 두 잔 내려 들여놓은 뒤, 보고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문을 닫았다. 도운이 대타로 뛰는 하루의 시작이다. 어서 생각할수록 신경질 나는 민혁의 독창적인 데이트 이벤트나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죽 잘 써서 남 주네, 도현은 그렇게 투덜대며 자리에 앉았다.

한편, 민혁은 아침부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윤은 찾은 것 같았다. 확인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겠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행복하게 해 줄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다만 무언가 알지 못하는 위기감이 계속 자신의 본능을 두드리고 있었다. 무언가 살짝 어긋났다는 생각. 현관문을 닫고 나올 때, 뭔가 잊은 것이 없나 하고 불편해하는 감각. 여행이 끝난 뒤, 숙소 문을 닫고 나오며 드는 불안감.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며 말실수를 하지 않았나 곱씹어보는 감각이 계속 들었다. 민혁은 그런 상념 속에 잠겨 있다가, 환강의 방문을 알리는 소리로 깨어나게 되었다.

“저 왔어요. 김 팀장님 보고서입니다.”

“거기 놓아둬.”

“오늘은 브리핑 안 받으신다고 하던데요.”

“김 팀장이 전달은 잘 했군.”

“그럼 절 부르신 이유는 있겠죠.”

“먼저 내 동생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어.”

“그거 좋네요.”

환강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민혁은 투명할 정도로 순진한 환강의 마음이 보였다. 아마 팬이라는 입장에서 그저 좋은 것뿐이겠지. 하지만 저 마음을 맞이하는 순간 한율은 속절없이 자신처럼 세상이 제대로 맞물리는 느낌에 무너질 터였다. 그 순간, 민혁은 환강과 한율을 찢어놓을 계획이었다. 마치 자신과 도윤을 가르던 유리벽처럼. 그리고 그 유리벽 너머에서 자신 대신 도윤을 안았던 한율처럼.

“대신 조건이 있어.”

“어려운 건가요. 맨입으로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어렵진 않아. 한율이를 만나고 난 뒤에 바로 사장실로 와 줘.”

“어렵진 않네요. 알겠습니다.”

“해외로 전달해야 할 서류가 있어. 중요하지.”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제게 시키시죠?”

“김 팀장은 사람 찾느라 바쁘고, 너는 내게 빚진 게 있지.”

“그럼 해외 출장 마치고 난 뒤에 지한율 한 번 더 만나게 해 줘요.”

“성공적으로 해낸다면야.”

“잘 해야겠네요.”

“믿고 보내는 거니, 힘내줬으면 좋겠어.”

“네, 알겠어요.”

“그리고 누구에게도, 김 팀장이나 한율이에게도 이 서류 전달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줬으면 좋겠네.”

“그렇게 비밀이라면 지한율 한 번 만나는 대가로 치러야 할 게 너무 큰데요. 위험하지는 않습니까?”

“위험하지는 않아. 하지만 원한다면 경호원 붙여줄 테고, 돌아오면 넉넉히 사례하지.”

“위험한 것 같은데요.”

“아니. 사실 전혀 위험하지는 않아. 다만 내가 알리고 싶지 않은 거지.”

환강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그저 조금 중요한 일 정도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비밀리에 진행하는 거대한 일이라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재계를 이루는 큰 축인 민혁이 비밀에 부치고 싶어하는 일인데, 그것이 과연 위험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연예인 하나 만나는 것 치고는 아주 큰 짐을 떠받든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기회에 민혁에게 줄을 댈 수만 있다면 그리 나쁜 장사도 아니었다. 환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는 고민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해 볼게요.”

“고맙네.”

“대신 빚으로도 달아둘게요.”

“원한다면.”

환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민혁은 환강이 준 서류를 그제야 찬찬히 읽어보았다. 아침 회의 전까지 남은 시간이 있으니 김 팀장의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볼 참이었다. 지한율. 자신의 동생으로 다시 나타난 이한율에 대해서.

민혁은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비서진의 요약 보고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서를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한율은 3년 전부터 갑자기 경영이고 뭐고 다 버리고 뛰쳐나가서 연예인을 한다고 선언한 것을 보니 아마 비슷한 시기에 자신과 함께 환생한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J그룹의 승계 순위에서도 밀리고, 아버지의 노여움도 샀다. 그렇지만 사랑받는 막내였던 모양이다. 어르신의 큰 노여움도 잠시, 은근슬쩍 연예계에서 뒤를 봐주는 턱에 지한율은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민혁은 도윤에게만 오로지 신경이 꽂혀 자신들의 형제는 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욕심 많고 무능한 큰 형이야 J그룹의 승계권에서 자신에게 확실하게 밀린 것을 알지만, 그저 결혼해 자식을 두고 있다는 것을 무기로 어떻게든 아버지 발치에 붙어 열심히 아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1년에 한두 번 있는 가족 식사에서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비추지 않는 셋째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아마 짐작건대 지한율이 의도적으로 피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제환강도, 지한율도. 둘은 동시에 딱 적당한 때에 나타나 주었으니까.

“도운씨.”

“네.”

“술 좀 합니까?”

“네?”

퇴근하는 차 안, 자신의 옆에서 다음 날 스케줄 체크에 여념이 없는 ‘도운’을 바라보았다. 실상은 도운을 가장한 도현이지만, 민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곧 있으면 짓눌러버릴 한율이라는 사냥감에 신경이 쏠린 탓도 있을 것이다.

“저는 술은 그렇게 세지 않습니다.”

“저희 집에 도착하면 술 한 잔 하고 가죠.”

“네?”

“괜찮습니다. 혼자 자려니 적적해서.”

도운이 도윤인 것에 대한 확신이 점점 강하게 들고 있었다. 커프스 핀, 회색 정장, 먹을 수 있었던 아침 크루아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 삭막한 삶에 가득 숨을 불어넣어 줄 구석이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던 무언가를 찾으며 느낀 해갈에 민혁은 점점 절실히 매달리고 있었다.

“그럼 가볍게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무겁게 많이 마시고 가도 됩니다.”

“그건 실례인걸요.”

“게스트룸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현은 지금까지 재벌이란 사람들을 많이 보아오지는 않았지만, 민혁이 개중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성격일 거라고 확신했다. 보통 돈이 많은 사람은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상당한 우월감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민혁은 비서진들에게도 존중의 의미로 존댓말을 썼고, 자신에게도 굉장히 너그럽게 대해 주었다.

“네, 그럼 일단 가서 한 잔 하시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아마 비서실장도, 지희 선배도 이런 권유를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으로 짐작했다. 보통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사람이 있었다. 민혁이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지만. 도현은 이 다정함에 속아 자신이 풀어지면 안 된다고 늘 경계했다. 하지만,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다. 다정함에 또 속아 넘어가고 자책은 그 뒤에 따라온다. 도현은 나중에 자신이 또 마음을 다잡게 될 것을 깨닫고도 민혁의 술 한잔 하겠냐는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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