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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6 2부 : 유리구두 (46/82)

00046 2부 : 유리구두 =========================

집에 도착하자 도현의 기분이 몽롱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민혁이 자신에게 보여준 호의는 꼭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뜬 마음은 집 안으로 들어와 도운의 머리를 짚었을 때 차갑게 내려앉았다.

“도운아.”

“응...형...”

“아직도 많이 아파?”

“몰라. 배가 너무 아파...”

동네 병원에서는 급성 식중독이라고 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 토했다. 내일 출근하기 전에 데리고 병원에라도 입원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이온음료를 가져와 도운의 입에 대어주었더니 꿀꺽꿀꺽 잘 마셨다. 도운은 칭얼대며 도현에게 매달렸다. 도운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문제였다. 도현은 119를 불렀다.

“회사 걱정하지 말고, 내가 대신 출근할 테니까.”

“미안...형.”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빨리 나아.”

응급실에서는 3일 정도 입원을 권유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다리도 다쳤으니 내일 하루 쉬라는 민혁의 말도 있었다. 도운처럼 출근한 척을 하면 중간에 도현으로 출근하기 위한 옷가지도 챙겨갈 필요가 없어 편했다. 도현은 도운을 간호간병 병동에 입원시킨 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번에 들어올 월급으로는 도운의 입원비쯤은 거뜬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삼촌과 대표님께 고마울 따름이었다. 도현은 도운을 입원시키고 돌아오고서야 정강이를 잡았다. 한숨 돌릴 때가 되어서야 시퍼렇게 멍든 다리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걱정하는 대표님의 다정한 눈빛도.

아침이 되었을 때 도현은 도운의 정장을 입고 명찰을 달았다. 오늘은 온종일 도운의 신분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혹시나 몰라 진통제를 먹었다. 멍든 곳이 스치기만 하면 아팠지만, 진통제를 먹고 멍 빼는 연고를 문지르니 훨씬 나았다. 도현은 한 손에 맛있다는 빵집의 크루아상을 들고, 더치커피 병을 챙겼다. 어제 챙겨주신 데에 대한 감사 인사라는 명분에 포장해 챙겨 드릴 아침이었다.

“대표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은 고요했다. 도현은 조심스럽게 침실로 향했다. 침실의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열어보았다. 침실 안은 어두웠다. 도현은 핸드폰 불빛으로 잠시 침실 안을 비춰 보였다. 대표님이 푹 잠들어 있었다. 도운이 말 대로라면 매일 자기가 오면 칼같이 깨어있다고 하셨는데, 잠든 것은 또 처음이었다.

“피곤하셨나.”

도현은 작게 중얼거리고는 침대 옆 바닥에 살짝 앉았다. 침대에 앉으면 침대가 흔들리며 민혁이 깰 것 같아서였다. 도현은 잠시 바닥에 앉아 무방비한 민혁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늘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카락과 다르다. 적당히 흐트러진 머리, 잠을 자느라 순하게 감겨 있는 눈, 그리고 잘 뻗은 콧대가 보였다.

민혁을 손가락 끝으로 어느 한구석을 살짝 찔러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도현은 간신히 그 충동을 꾹 눌러 참고는 눈으로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민혁은 언제나 사냥할 준비가 되어있는 흑표범같은 구석이 있었다. 검고, 빈틈없고, 세련되고, 철저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민혁은 흰 이불보 위에 잔뜩 흐트러진 채 잠들어 있었다. 도현은 잠시 고개를 기울여 민혁과 같은 각도로 얼굴을 틀었다. 그 순간, 민혁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헉.”

너무 놀라 도현은 숨을 멈췄다.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떴더니 도윤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민혁은 잠시 자신이 아직도 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민혁을 일어나면서 손을 꼬집었다. 아픈 것을 보니 현실이었다. 민혁은 놀란 얼굴로 도운을 보았다.

“왜 여기 있습니까?”

“아직 안 일어나셔서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깨워야 할 사람을 깨우지 않고 변태처럼 얼굴을 훑어보았으니 할 말이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도현이었다.

“아침 안 드셨죠? 챙기겠습니다.”

“좋습니다.”

민혁은 황급히 자리를 뜨는 자신의 수행비서를 보다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이 세계에 환생한 이후, 처음으로 늦잠이란 것을 잔 것을. 아무리 정신이 피곤해 푹 자고 싶어도 불면증에 시달려 잘 수가 없었다. 도윤의 생각을 하면 민혁은 눈을 감아도 의식을 꺼트릴 수가 없었다. 계속 가슴이 두근대며 도윤을 찾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달랐다. 쌍둥이를 수행비서로 들이면서 점점 자신은 안정되고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은 다시 한번 ‘도운’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도운이가 도윤이가 아닐까?

한편, 도현은 한참을 헤매다 부엌을 찾았다. 이놈의 집은 엄청나게 커서 부엌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손을 씻은 뒤 흰 접시에 크루아상을 올리고 전자레인지에 따끈하게 데웠다. 고소한 빵 냄새가 집안에 퍼졌다. 머그컵을 찾아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물과 더치커피를 붓자 그럴싸한 아침 식사가 완성되었다.

“도운씨, 뭐 합니까?”

“아침에 커피 하나만 드신다길래요. 그럼 속 버릴 것 같아서요.”

도현은 민혁에게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자른 크루아상과 커피를 내밀었다. 민혁은 도운이 간단하게 차린 아침 식사를 보자 도윤이 생각났지만. 저탄수화물 무지방의 규칙을 어길 수가 없는 자신이 알기에 아마도 식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환생하고 난 뒤에 아침에 고용인이 차린 아침을 들다가 죄다 토한 적이 있었다. 도무지 목 뒤로 넘어가지도 않았고, 먹을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민혁은 블랙커피 한 잔만 들었다.

“이것만 가볍게 들겠...”

민혁은 말을 멈추었다. 처음으로. 아침에 블랙커피 외의 음식이 ‘독’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먹어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욕이란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민혁은 반신반의하면서 크루아상 한 조각을 입에 들어 넣었다. 버터와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부드러운 맛이 민혁의 입속에 고소하게 퍼졌다. 민혁은 ‘도운’을 쳐다보았다. ‘도운’은 말을 멈추다 말고, 빵을 한 입 먹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민혁은 강한 확신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도운이 자신의 ‘수’가 아닐까에 대해서.

민혁은 크루아상을 먹으며 ‘도운’에게 질문을 고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빵과 커피를 마시는 도현은 초조할 따름이었다. 맛있다, 맛없다 한마디 말도 없이 준비한 아침만 먹어대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도현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혁이 말을 걸었다.

“저기, 맛은 좀 어떠신지...”

“하나만 물어볼게요, 도운씨.”

동시에 말하자 더 어색해졌다. 민혁이 크루아상을 삼키며 먼저 말하라는 식으로 손을 휘젓자 도현이 다시 손을 저으며 먼저 말씀하시라고 신호를 보낸다. 다시 한번 민혁이 먼저 손을 젓자 그제야 도현이 어색해하며 말을 이었다.

“저, 맛은 좀 괜찮은가요?”

“아주 맛있네요.”

“다행이네요.”

“괜찮다면... 앞으로도 종종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도현은 속으로 도운의 일거리 하나를 늘렸다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앞으로 자신이 크루아상을 사서 도운의 가방 속에 넣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힘들면 오전 근무와 오후 근무를 바꾸어 달라고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이 도운이 다 나으면 변명할 말을 찾고 있을 때, 민혁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가 질문해도 될까요?”

“네? 네.”

“좀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네, 말씀하세요.”

“도운씨는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데이트 같은 것이 있습니까?”

“어... 데이트요?”

도현은 조금 전까지 짝사랑하던 사람의 부탁을 받고 조금은 기뻐했었다. 곧이어 들려온 질문이 그런 기쁨을 폭삭 주저앉힐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아마도 자신의 애인에게 할 이벤트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도현은 이런 멋진 남자에게, 그것도 같은 남자라는 성별로, 애인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짝사랑했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없는데...”“그렇습니까.”

“제가 좀 검색해보고 알려드릴까요?”

“검색하지 말고요.”

“검색하지 말고요?”

“독창적으로. 도운씨가 혼자 생각해 주세요.”

아니 뭐 이렇게 어려운 일을 시켜. 이벤트는 혼자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도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불평했다. 조금 전 1초 만에 실연당한 것도 서러운데 짝사랑하는 상대의 데이트 코스까지 짜 주게 생겼다니 억울할 노릇이었다. 더 억울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어디 털어놓을 데도 없었다는 것이지만. 도현은 겉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오후까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부탁해요.”

“돈은 상관있나요?”

“얼마가 드는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와, 얼마가 들든 상관없대. 재벌의 패기는 역시 다르구나. 도현은 그저 지민혁의 상대를 부러워할 뿐이었다. 반면 민혁은 도운의 대답이 궁금해질 뿐이었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조마조마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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