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2부 : 유리구두 =========================
도현과 지희는 당황하고 있었다. 민혁이 다정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민혁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너무나 강렬하고 복합적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정도였다. 도현에 대한 걱정, 그리고 Y업체의 이사에 대한 분노 두 가지가 강하게 피어올랐다. 민혁은 Y업체의 이사에 대한 처분을 미루기로 했다. 온몸의 말초 신경까지 타오르는 듯한 분노는 나중에도 풀 수 있지만, 도현을 데리고 병원에 갈 기회는 지금뿐이니까.
“괜찮습니까.”
“대표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멍이 이렇게 시퍼렇게 들었는데요.”
민혁은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해주었다. 도현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J그룹의 이사와 Y그룹의 이사 모두를 팽개치고 자신을 먼저 걱정해주는 민혁 덕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자꾸 오해할 정도로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면, 자신은 설레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정강이의 아픔 따위 아주 가벼운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민혁은 시퍼렇게 변해가는 정강이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멍으로 끝나지 않고 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민혁은 도현을 공주님 안 듯 들었다. 도현은 너무 놀라 새햐얗게 얼굴이 질렸다. 지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 대표님.”
“네, 도현씨.”
“저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제가 혼자서 다녀올게요.”
“이렇게 다리가 아파서야 다녀올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럼 저랑 임 비서님이랑 다녀오겠습니다.”
“임 비서는 당신을 들 수 없는데요.”
“아니, 지금 회의 중이셨잖아요.”
도현이 놀라 토끼눈을 한 주제에 큰 소리로 반문했다. 대답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는데 합 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다음에 또 하면 됩니다.”
“아니에요, 대표님. 제발 내려 주세요. 저 부끄러워서 얼굴 못 들고 다녀요.”
탕비실에 나가기 한 걸음 전이었다. 자신의 팔을 꼭 잡고 도윤이의 얼굴로 애원하는 도현이의 눈빛에, 그만 민혁은 자기 뜻을 꺾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현을 내려놓았다. 지희가 옆에서 재빨리 도현을 부축했다. 도현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민혁의 옷깃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빨리 병원에 가 볼까요.”
“네?”
“내 차를 타고 병원에 가죠.”
“대표님, 그냥 저희는 신경을 끄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이제 민혁의 머릿속에는 J그룹의 이권을 다투기 위해 은밀한 만남을 청한 J그룹의 이사도, 그리고 도현의 정강이를 차 시퍼렇게 물들게 한 Y업체의 이사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도현의 아픔에만 몰두하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도현은 입을 막았다. 조금 이상했지만,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좋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지금 자기를 데리고 가면 그 뒷감당은? 민혁과 비서진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민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현의 상기된 뺨을 지나 또렷한 눈과 민혁의 눈이 마주쳤다. 도현이 결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표님, 지민혁 대표님.”“도현씨.”
“제가 정말 괜찮아지려면, 저기 상황부터 해결해주시겠어요?”
“상황이요?”
지금 민혁에게 긴급 상황이라곤 도현 하나였다. 아마도 왜 그런 판단이 서지 못할 만큼 본능적인 것이기에, 민혁은 도현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니까, 밖에 기다리고 있는 두 이사님이요.”
“그 사람들은 왜 문제가...”
“제가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요.”
“...그렇습니까?”
“제 잘못 같아서요.”
그 말에 한참을 도현을 쳐다보던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잔뜩 구부리고 도현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고 상황을 수습하러 가는 민혁의 모습에 도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그것을 지켜보는 지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대표님의 외모에 참으로 죄송한 말이지마는, 마치 인간에게 반한 괴수 영화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인의 말에 모든 것을 따르는 거대한 괴수를 본 것 같은 느낌에 지희는 자신이 본 것을 잠시 의심했다.
“사수님.”
“으, 으응?”
“병원 가요. 우리는.”
“그래.”
지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신입을 데리고 가야 할 것은 J그룹의 대형 병원이라는 것을. 아마 거기에서 엑스레이는 물론이고 MRI까지 찍어보아야 할 것 같은 강한 세상의 부르심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지희의 감은 아주 좋았다.
비서실에서 이미 전화가 갔는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수많은 대기 인파를 뚫고 도현의 검사는 최우선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형외과부터 그 과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교수님들이 나와 직접 진료하는 모습에 도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J그룹의 이름을 달고 J서울병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서부터 이미 민혁의 입김이 많이 닿는 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느끼게 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사수님, 원래 이렇게 비서실 복리후생이 좋나요?”
도현의 아련한 물음에 지희 역시 아련하게 고개를 돌렸다. 과연 자신이 다쳐도 이런 복리후생을 누릴 수 있을까? 지희는 여운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유는 모르겠다만 여기 너 꽂아준 분 있지?”
“네, 저희 삼촌이요.”
“감사해라. 그분이 대표님이랑 매우 친한가 보네.”
설마 대표의 전생까지 짐작하지 못했던 지희는 꽤 합리적인 추론을 했다. 매우 합리적이라 도현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것으로.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는 아주 빠르고 쾌적하게 받을 수 있었다. 외부의 충격이나 구타나 넘어짐 같은 둔탁한 힘 등에 의해 연부 조직과 근육 등에 손상을 입어 피부에 출혈과 부종이 보이는 경우.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단순 타박상이었다. CT에 MRI까지 찍었으나 결론은 ‘냉찜질하시고 멍 빼는 연고 꾸준히 바르시되 아프면 진통제를 드세요’였다.
이 야단법석을 부려놓고 고작 타박상이라니. 차라리 뼈라도 부러졌으면 덜 아팠겠다 싶어 도현은 머리를 짚었다. 게다가 민혁이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대기하라는 소리에 병원에서 따로 마련해 준 특별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호화로운 대접에 도현은 정말 어쩔 줄은 몰랐다. 오히려 이런 처치가 필요한 건 지금 집에서 열에 시달리고 있을 동생일텐데. 도현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끝만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시간이 지나자 민혁이 도착했다. 도현은 서둘러 자신의 이름이 적힌 손목 밴드를 반사적으로 가렸다. 민혁은 뛰어 왔는지 숨이 고르지 않아보였고, 다행히 손목 밴드에 신경쓸 여유는 없어보였다. 도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가 뭐라고 대표님이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지. 하지만 도현은 도운으로 아침에 일할 때도 대표님이 참 다정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도현은 자책했다. 이렇게 대표님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자신은 이것을 특별한 대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도운이나 도현이나, 비서실 식구들에게나,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인 것일 뿐이다. 도현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을 차갑게 눌렀다.
“괜찮습니다. 단순 타박상이라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민혁의 얼굴이 안도감에 펴졌다. 여기 오기 위해 J그룹의 이사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회의를 했는지 모르겠다. 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바깥의 상황이 걱정된다고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다 팽개치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서 실수하면 나중에 도현은 괴로워하겠지. 도윤의 얼굴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것은 민혁에게 심각한 고통이고, 죄책감이었다. 민혁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J그룹의 이사와의 면담을 아주 효율적으로 끝냈다. 도현의 정강이를 찬 이사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 따위는 없었으니까.
“오늘은 이쯤 하고 집으로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도현은 퇴근을 위해 택시를 불러야 하나 싶었다. 택시 정도야 오늘 회사 비용처리를 해 줄 것 같았다. 어플을 켜고 택시를 부르려는데 민혁이 제지했다. 도현이 물음표를 얼굴에 잔뜩 띄우고 민혁을 보자 민혁이 당연하다는 듯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제 차 타고 가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