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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4 2부 : 유리구두 (44/82)

00044 2부 : 유리구두 =========================

도현은 호텔 화장실에서 도운의 명찰을 떼고 옷을 벗은 뒤 준비해 두었던 자신의 옷을 입었다. 다시 돌아온 제 이름에 남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도운씨라고 부를 때마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할 때도 있어서, 들키면 어떻게 할까, 라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자기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으니 안심이다.

도현은 호텔 2층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리다 도운인 척 호출을 받고 올라갔다. 올라왔을 때 스튜디오는 접시가 엎어져 있고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져 있었다. 한바탕 난장판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한 도현은 저도 모르게 대표님의 안위를 걱정했다.

“괜찮으세요, 대표님?”

“흔한 집안싸움이지. 신경 쓰지 말아요.”

엉망진창이 된 스튜디오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진 민혁은 팁까지 테이블 위에 두고 일어섰다. 난장판이 된 스튜디오 안에서 혼자 고고하게 일어서는 민혁은 이질적일 만큼 침착해 보였다. 유일하게 이 공간에서 어울리지 않는 절제와 단정함이 엿보였다. 침착한 민혁의 태도에 도현도 따라 침착해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은 호사가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단단히 단속시켜야 할 것이다. 도현은 자신이 서둘러 몇 가지 크게 어질러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도운씨.”

“아, 지금은 정도현입니다.”

“그렇군요.”

기분 탓일까? 도현은 민혁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모를 섭섭함이 조금 들었다. 그런 섭섭함은 좀 더 민혁을 잘 보좌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힘이 되고픈 법이다. 도현은 민혁에게 오후 스케줄을 브리핑했다. 3시에 있을 협력업체와의 약속과 5시에 찾아올 J그룹 이사와의 약속 때문에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대표님,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가족과의 식사는 언제나 즐겁죠. 도현씨도 그렇지 않나요?”

도현은 도운과 투닥거리며 노는 것을 떠올리며 수긍했다. 민혁과는 다른 스케일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즐거우니까.

“그렇죠.”

“대표님, 5시에 약속된 J그룹 이근욱 이사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요.”

도현은 3시에 K 협력업체와의 미팅을 끝내고 바로 J그룹의 이사를 만나는 일정을 강행하는 민혁을 보며 대단한 체력과 집중력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계속 몇 시간이고 상담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흐트러지면 안 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그룹의 오너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싶다. 비서를 제외하고 만나겠다는 대표님의 요청에 도현이 동석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온다. 자리에 앉자 지희가 소곤거리며 말한다.

“도현아.”

“네?”

“어휴 이번에는 맞네.”

“저 원래 도현이 맞았어요!”

“아니, 집에 안 가고 싶어?”

8시간 근무하다가 갑자기 16시간 근무하면 진짜 힘들 텐데.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도현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으나 진짜 힘든 것은 맞았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갑자기 2배로 늘어난 근무량에 도현은 피곤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하지만 끙끙거리며 앓는 동생을 직장으로 내몰기보다는 내 몸 불편한 것이 더 마음이 놓였다. 도현은 지희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넌 너무 착해.”

“동생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변명하니까 더 착해 보인다.”

“그런가요?”

“너 진짜 피곤해 보여.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

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타 먹건만, 이렇게 아픈 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는 도현을 보아하니 측은지심이 가득 해져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희가 커피머신 앞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들려고 할 때였다. 사무실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가장 막내인 도현이 일어나 내방객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누구십니까?”

선약이 되지 않은 내방객도 정중하게 모시라고 했었지. 도현은 지희가 알려준 매뉴얼을 떠올리며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남자는 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서는 회장실 문을 향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날 모르나?”

“죄송합니다. 존함을 알려주시고 용건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말이야, 하.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해야 하고.”

“죄송합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려야겠네. 지금 안에 계시지?”

“지금은 선약이 있어 손님을 맞고 계십니다.”

“그래서 뭐. 나도 급한 손님이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약이 없으면 상사를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답답하네. 급한 일이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선약이 이미 있으셔서...”

“처음 보는 얼굴인 거 같은데, 어디 날 모르고!”

심상치 않은 진상의 기운에 커피를 내리던 지희와 비서실장이 일어나 응대하려는 순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도현이 허리를 굽혔다. 도현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부러진 것이 아닐까 드는 아픔과 함께 도현이 윽 하고 작은 신음을 냈다. 그 순간 경호원이 달려들어 남자를 떼어놓았다. 비서실장이 도현을 감싸 안으며 지희에게 넘기고는 도현 앞에 섰다. 눈썰미 좋은 지희가 그 사람을 보더니 어떤 사람인지 간신히 기억해냈다. 재빨리 비서실장의 귀에 속삭여주었다.

“골프 약속 작년에 한 번 같이 한 Y업체 이사에요.”

“아니 난 또 엄청 친한 사람인 줄... 그런 사람이 여기 왜 와?”

“저쪽 지금 주식 증여문제로 싸우고 있거든요. 우리 쪽에서 가진 주식을 팔아줘야 저 사람이 대표이사가 될 수 있어요.”

지희는 그렇게 말하고 정강이를 부여잡은 도현을 데리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도현이 계속 소란이 난 곳을 바라보자 지희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못 보게 했다.

“이런 건 비서실장님이 처리할 건이야.”

“그래도 제가 혹시 접대를 잘못해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도현아. 저 사람이 이상한 거야.”

“그래도요. 죄송합니다.”

“너 그 정도 착하면 병이다.”

지희가 일침을 놓았다. 그 말에 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다리를 걷어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뼈는 부러지거나 금 가지 않은 것 같은데, 하고 지희가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탕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대표님?”

민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민혁은 오늘 하루가 순조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운이 도윤인 것 같은 증거도 볼 수 있었고, 한율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J그룹에서 온 이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밖에서 들린 소란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저 자그마한 소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소란이 지속되자 민혁은 잠시 이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에 나가보았다. 성가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이 나오자마자 비서실은 조용해졌다. Y업체 이사라는 사람은 밖에서 들리던 큰 소리와는 달리 조용히 있었다. 민혁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나름 부드럽게 대했다. J그룹의 이사와는 꽤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고, 오늘은 기분도 좋았으며, 뒤쪽 일정도 바쁜 것은 없었으니 이 사람의 작은 절박함을 짬을 내어 들어 줄 계획이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다 민혁은 자리에 지희와 도현이 없는 것을 알아챘다. 민혁은 비서실장에게 눈짓했다. 비서실장이 다가왔다. 민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현씨는 어디갔지?”

“도현씨가 좀 다쳐서, 그게. 잠시 상처를 보러 갔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왜였을까. 온몸에 피가 터지며 뒤로 넘어가던 도윤이가 생각난 것은. 새하얀 도윤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피에 절은 손으로 심장을 계속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하던 자신이 생각난다. 민혁은 온몸이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허공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손끝부터 거세게 올라왔다.

“정도현 어딨어.”

“지금요? 탕비실에 임지희 비서와 함께...”

민혁은 성큼성큼 걸어가 탕비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작게 몸을 웅크리고 시퍼런 멍이 든 정강이를 보여주는 도현과 구급함을 뒤지는 임지희가 있었다. 민혁은 온전하고 편안하게 있지 못하는 도현의 모습을 보았다.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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