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2부 : 유리구두 =========================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다 되었다. 오늘은 D호텔에서 대표님과 대표님의 동생인 지한율이 밥을 먹는 날이었다. 도현은 자신이 J그룹에 가족 사항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대표님과 지한율이 그렇게 이상적인 형제 관계는 아닌 것 같다고 짐작했었다.
일전에 김 팀장을 시켜 지한율에 대해서 알아놓은 자료를 핸드폰으로 보며 생각에 잠긴다. 연예인 지한율은 배우다. 웹드라마로 소소하게 인기를 끌다 드라마의 조연 하나로 떴는데, 지민혁이 보기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조금은 들어간 것 같았다. 집안에 얼굴 하나 비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다 자기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사진을 보아하니 지한율이 이한율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이한율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은 화려한 백금발의 머리였다. 사람을 때로는 인상에 강하게 남은 부분만을 가지고 기억하는데, 이한율이 그런 경우였다. 사진 속의 지한율은 검은색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겨 차분한 인상을 주었다. 그 때문에 민혁은 직접 만나봐야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호텔의 식당까지 오자 민혁은 ’도운‘을 일단 지한율로부터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지한율이 그저 평범한 지한율이라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한율이 실은 그 관리자 이한율이라면, 도윤일지도 모르는 두 형제를 그와 가까이 두기는 싫었다. 또 무슨 바람을 넣을지, 또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도운씨."
"네, 대표님."
"오늘은 가족 간의 대화라 도운씨가 잠깐 자리를 피해줬으면 해요."
"네, 알겠습니다."
"여기 D호텔의 2층에서 적당히 점심 먹으면서 대기하세요."
"네, 대표님."
"내가 올라오라는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식당 안에서 대기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과 이야기를 하려는 데 자리를 피해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부탁이었기에 도현은 이상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것도 J그룹의 차남과 삼남의 만남이다. 그룹의 후계자로는 이미 민혁이 낙점된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룹의 상속인들이 자리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돌 수 있다. 아마 그런 변수를 최대한 배제하시려는 거겠지. 도현은 민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에 식당을 빠져나갔다.
"어?"
식당을 나가 2층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경호원에 둘러싸인 사람이 나왔다. 살짝 몸을 틀어 비켜주려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손을 잡아 온다. 놀란 도현은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한율....?"
"어, 내 이름 아네요."
지한율이었다. 라이징 스타. 최근에 무서운 속도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연예인. J그룹의 삼남인 것까지 알려져서 그런지, 조연에 꽂혀 얼굴 팔리는 속도도 빨랐다. 이미 원작이 있는 웹드라마에 출연하다가, 이제는 대형 기획 드라마의 조연으로 발탁되어 연기활동을 하고 있었다. 도현도 어머니가 가끔 보시는 드라마에서 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잡은 것도 아니고, 배우 쪽에서 자신을 알아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현은 당황해 손목을 잡힌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요."
"아, 죄송하지만, 저희가 본 적이 있나요?"
"있죠, 그럼."
한율이 웃으며 말했지만, 도현은 난감해졌다. 기억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저런 배우를 봤으면 잊어먹으려야 잊을 수 없을 텐데. 정말 만난 기억이 없었다. 당황한 도현의 얼굴에 한율은 웃으며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기억 안 나시나 보네요."
"네... 죄송합니다."
"그럼 기억나면 연락 주세요."
"네?"
"기억나면 연락 달라고요. 여기 제 번호요."
모를 말만 하는 지한율이었다. 저돌적이지만 맥락 없는 그 모습에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직속 상사이자 연예인, 그것도 J그룹의 삼남에게 함부로 거절하기도 참 어려웠다. 도현은 한껏 위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번호를 내민 휴대폰에 찍었다. 번호를 받고 통화 버튼까지 누르고 나서야 지한율은 도현의 팔을 놓아주며 명함까지 건네주었다.
"뭐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요."
"제가 누군 줄 알고요."
"잘 알죠. 그거 두 장이거든요."
"네?"
"동생 하나 있죠? 동생한테도 주라는 뜻이에요. 동생한테도 똑같이 전해줘요. 힘든 일 있으면 그 명함으로 연락 달라고."
도현은 그것이 도운을 보고 하는 말인 줄 알고 잔뜩 날이 섰다. 혹시나 도운이에게 해꼬지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한율의 말은 신들린 무당이거나 사람 써서 뒤를 캐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도현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위축되면서도 경계하는 도현의 태도에, 한율은 자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냥, 형이 수행비서를 뒀다기에 조금 관심이 갔던 거예요. 미안해요."
"놀랐습니다."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튼 내가 한 말 명심해요!"
지한율은 상큼하게 말하고 그 자리를 떴다. 도현은 지한율이 폭풍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면서 혼이 빠진 것 같은 느낌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예의가 있다가도 없을, 알쏭달쏭한 사람이었다. 도현은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걸 버릴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마침 텔레비전 모니터에서 나오는 한율의 광고에, 연예인 명함을 언제 받아보겠냐면서 주머니에 슥 넣었다.
"경호원 물려."
"알겠어요, 형."
지한율은 198cm의 민혁을 쳐다보면서 기가 살짝 눌렸다.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니라 어디에서 작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지민혁은 궤가 달랐다. 지민혁은 몸도 좋고 키도 커서 ’거대하다‘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렸다.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자신의 둘째 형님 앞에서 지한율은 싱글벙글 웃으려 노력했다.
"그나저나 형, 오랜만이네요."
"거기 앉아."
"막 화도 나 보이시고."
"사람 살살 긁는 건 여전하군."
"에이, 말씀을 뭐 그렇게 하세요."
D호텔의 스튜디오에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서버가 음식을 내려놓았다. 지민혁은 우아하게 한 입씩 떠먹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지한율의 페이스에 밀릴 생각은 없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지한율이 이한율일 거라는 의심이 확증이 되어 가기만 할 뿐이다.
"요즘 일은 잘 되고 있니?"
"저요? 아 뭐."
"그래."
"CF 좀 들어왔던데, 아마 아버지 덕일 것 같네요. 제가 잘난 탓이라 하기엔 좀 양심에 찔려서요."
"잘 알고 있구나."
"그리고 드라마 조연 역할 맡은 것도요. 이호진 작가님 드라마 들어가기 어렵기로 유명한데, 제가 단박에 조연 자리 꿰찬 거 보니 누군가가 힘써 주셨겠죠. 형님이신가요?"
"내가 아무리 내 동생이 예쁘다고 해도 그런 일은 안 한단다."
"역시, 아버지셨네요."
"집안 만찬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자식에게 신경 써 주시는 건 아버지나 마음 약한 어머니밖에 없겠지."
"우리 친어머니 아니신데 그렇게 신경 쓰시겠어요?"
"말조심하렴. 그래도 우리에게 잘 보이시려고 애쓰시는 분이시니."
겉보기에 상당히 식사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절제하듯 말하며 비꼬는 민혁과, 유들유들하게 굴며 모든 날 선 말을 너스레로 받아내는 한율의 조합은 기괴하게도 어울려 보였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체할 것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도현도 경호원도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후식으로 커피와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민혁은 숟가락을 멈추었다. 광공으로 태어난 이후 후식으로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가 나오면, 민혁은 커피만을 마시곤 했다. 도윤이가 내린 저주이자 흔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혁은 도윤이를 생각하면서 차를 마시고는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래서, 동생아. 너는 기억하고 있니?"
"뭘요?"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재수 없게 빙빙 돌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렴."
"..."
"이미 다 들통났으니까. 요 3년간 움직임을 보니 정말 열심히 누군가를 찾은 흔적이 나오더구나. 자기를 알리려고 악쓴 것도 그렇고. 얼굴이라도 까야 찾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알았나?"
"모를 수가 없지. 연예인으로 다시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구나."
"...잘 아네."
"잘 알지 그럼. 죽여버리고 싶은 놈인데."
"그래서, 흠씬 두들겨 패 죽여버기 전이라 오늘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였나?"
"생각보다 인정이 빠르네."
재미없게. 이한율이 왜 이렇게 약해졌지? 그렇게 말하며 지민혁은 지한율을 바라보았다. 예전 관리자 시절부터 늘 여유만만한 표정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이럴 때는 결정타를 날리면 크리티컬 판정이 난다. 아주 시원하게.
"그러고 보니, 아직 못 찾았어?"
"왜?"
"난 찾았는데. 도윤이 말야."
"바보같이 내가 아무나 내 수행비서로 둔 것 같나?"
"그렇긴 하겠지. 축하해."
"글쎄. 네 수도 찾았다고 하면 어쩔래?"
그 말에 지한율이 벌떡 일어난다. 억울함과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민혁은 일그러진 한율의 미소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지한율 널 만나게 해 달라고 하더군."
"제발 만나게 해 주면 안 될까?."
"싫어. 내가 왜?"
"하."
"내가 당분간 데리고 있으려고."
"이렇게 나오시겠다?"
"먼저 뒤통수 때린 게 나란 소리처럼 들리는데."
기억해. 먼저 도윤이를 이 세계로 환생시키고 걸레짝처럼 집어던진건 너야. 민혁이 그렇게 지적하자 지한율은 하, 하고 입술을 뜯듯이 깨물었다. 초조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표정이 그려진다. 민혁은 잊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다. 도윤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이한율의 그 모습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민혁은 상황을 이렇게 더럽게 꼬아 놓은 것도 지한율의 장난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한율이 순순히 자신의 사랑을 찾아 행복하게 지내는 꼴 따위, 관심 없지만 보고 싶지도 않았다. 민혁 또한 상황을 비틀기로 마음먹었다.
"네 수는 내가 곱게 싸서 외국으로 보내줄게."
"내가 당신 말 믿을 것 같아?"
"너도 알잖아. 내가 거짓말 하는지 안 하는지."
"씨발!"
지한율은 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보이다 결국 의자를 발로 차고 나가버렸다. 그 모습에 민혁은 가슴 끝까지 뚫리는 쾌감을 느꼈다. 민혁은 지한율이 실컷 난동을 부리고 나간 식당에서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에서 오랜만에 맛이란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