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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2 2부 : 유리구두 (42/82)

00042 2부 : 유리구두 =========================

민혁의 미소를 본 도현이 잠시 멍해졌다.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꼭 민혁은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웃곤 했다. 웃을 수는 있었는데, 묘하게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마는 정도의 웃음. 그런데 처음으로 볼의 근육까지 써 가며 웃는 모습은 낯설었다. 뭔가 도현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귀끝이 또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현은 그제야 알았다. 하늘 같은 대표님에게 저도 모르게 설레임을 느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을 알자마자 마음속 깊이 파묻었다.

‘미쳤나 봐 정도현.’

넘볼 걸 넘봐야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회색 체크 코트까지 넓은 어깨에 걸치고 나오자 도현은 깨달았다. 이런 감정은 헷갈리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깨닫고, 흔들릴 수 없는 확신으로 다가온다. 자신은 대표님에게 반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자신을 뒤흔드는 지진처럼 번지기 전에 꼭 눌러 삼켰다.

‘조심해야겠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표정을 다듬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자각하는 순간 밀물처럼 밀려온다. 대자연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덧없이 사람이 쓸려가듯이, 감정의 파도가 크게 밀려오면 덧없이 쓸려가는 법이다. 도현은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자신을 다잡았으나,

“갈까요, 도현씨?”

이렇게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쉽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도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들뜬 마음에 수행비서의 책무가 무너지면 안 되는 법이었다. 도현은 먼저 문을 열고 나가는 대표님의 뒤를 따랐다. 원래 문은 수행비서가 열어드려야 하는 법이었다. 도현은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약간 빠른 걸음으로 대표님을 앞질러 오늘 일정 보고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한편, 민혁은 방금 전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운이라 부를 것은 도현이라 불렀다. 서둘러 이름을 다시 부르려고 했는데, 도운은 개의치 않고 오늘 일정을 보고했다. 이러니까 비서실에 두 명이나 새로 들어왔는데 불협화음이 나지 않고 잘 스며든다는 거군.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편한 능력이 있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일정은 8시에 보고가 있고, 9시에는 오전 회의가 있습니다. 12시에 지한율씨와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와 5시에 각각 내방객이 찾아옵니다. 3시는 협력업체와의 약속이고 5시는 J그룹 이사와의 약속입니다.”

“저녁에는요?”

“오늘 저녁은 별다른 일정이 없습니다.”

“J그룹 이사를 만나본 뒤에 일정이 생길 수도 있겠는데...”

“그럼 비워 놓을까요?”

“오늘 오후는 약속을 잡지 말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민혁의 말을 비서진 메시지 방에 올린 뒤 공유 스케줄러에 띄워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회의 자료를 펼쳤다. 어제저녁부터 들어온 업무가 있었다. 도현은 서둘러 읽고 요약해 민혁에게 업무 보고를 한 뒤, 기사를 기다렸다.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가 매끄럽게 들어온다. 도현은 먼저 재빨리 다가가 문을 열려고 했다. 워낙 급하게 차가 다가오는 통에 차가 멈추며 조금 부딪힐 뻔했다. 민혁은 깜짝 놀라 ‘도운’을 끌어당겼다. 도현은 민혁에게 안기듯 차를 피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네...”

“문은 안 열어줘도 됩니다. 도운씨가 다치는 걸 난 바라지 않아요.”

“그래도 수행비서가 문을 열어야죠.“

그 말에 민혁이 멈칫했다. 도윤이를 아직 도윤씨로 부르던 날이었다. 도윤이가 자신이랑 놀아주겠다며 얼굴을 제 의지로 가리지 않고 나타난 처음. 그때 도윤이의 얼굴은 기억에서 지워서 잘 나지 않지만, 재벌 3세가 일개 수행비서에게 문까지 열어주냐며 타박하던 것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때 자신은 문 정도는 열어줄 수 있지 않냐면서 어리버리하게 반박했었지. 그때는 그 말을 따를 생각만 했다. 하지만 도윤이가 가르쳐 준 모든 법칙은 수 앞에서는 어그러졌다. 광공이란 것은 수에게 자동차 문은 열어주어도 되는 것이다. 그 어떤 존귀한 신분과 높은 사회적 지위라는 것도 사랑 앞에서는 한낱 땅에 깔린 거적때기나 다름없어지는 법이니까. 민혁은 다정하게 ’도운‘을 한 번 감싸 안았다가 내려놓았다. 이대로 꽉 안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도운‘이가 도망갈 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요.”

“하지만 제가...”

“괜찮아요.”

민혁은 문을 열어 가장 상석에 ’도운‘을 앉혔다. 스스로 상석에서 벗어난 순간, 민혁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찾지 못해 받던 무거운 압박감에서 조금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지우고 있던 것이라, 누구도 치워줄 수 없었다. 오직 온전히 도윤을 사랑하는 자신만이 그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 맛 본 그것은 참으로 달콤했다.

“내가 바랍니다. 거기 계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도현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차 안에 타자 민혁이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걸어온다. 귀는 이미 빨개졌고 볼까지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민혁이 보내주는 자그마한 친절이, 자신에게는 거대한 바람이 되어 자신을 흔들기 시작했다. 도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이미 비서진들은 모두 출근한 상황이었다.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 이미 자신의 상사보다 일찍 출근한 선배와 사수를 보며 도현은 내심 감탄했다. 자신은 반나절만 일하는데도 힘든데, 이들은 온종일 일하고 있었다. 도현은 사장실 문을 열어드렸다. 아마 김 팀장의 보고가 있기 전까지 민혁은 저기에서 어제 두고 퇴근한 업무와 씨름할 터였다. 그렇게 민혁을 보내고 자리에 앉자, 임 비서가 어깨를 툭 쳤다.

“너 도현이지.”

“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난 못 속여. 너 도현이잖아.”

“어떻게 아셨어요?”“

“진짜 도현이야?”“

임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현도 아차 싶었다. 그냥 임 비서님이 분위기를 보고 대충 찔러 본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임 비서는 도현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주위를 재빠르게 훑었다. 목소리가 낮아진다.

“도운이는 왜 안 와?”

“도운이 아파요.”

“많이 아파?”

“토하고 열나고 장난도 아니에요.”

“그럼 그냥 병가 내지.”

“어떻게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병가를 써요.”

임지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신도 신입 시절에 병가는 무슨, 점심시간에 잠시 병원 다녀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안 될 짓 같아서 쩔쩔매곤 했다. 아마 이 후배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현이와 도운이가 명찰이 없으면 구별조차 가지 않을 쌍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네가 도운이 대신 일하겠다고?“”네. 봐 주세요 사수님.”

“아니 내가 봐 주고 말고 간에...”

사실은 기특했다. 도현이가. 분명 쌍둥이면 길어도 몇 분 차이가 나는 정도의 형과 동생 사이일 텐데, 도운이가 형, 형하고 꼬박꼬박 따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 이유를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도현이는 형으로 도운이를 챙기고 있다. 마치 3분이 아닌, 3살 차이 나는 형처럼. 임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임지희는 뭐 이런 것 까지 고개를 숙이냐면서 기특하다고 했을 뿐이지만. 지희가 보기에도 좀 더 철든 쪽은 도현이었다. 지희가 기특해하고 있을 때, 도현은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대표님의 집 안쪽까지 들어가다보니, 어쩔 수 없이 대표님의 생활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사수님.”

“응, 왜.”

“대표님 아침 안 드세요?”

“아, 아직도 블랙 커피 한 잔만 드셔?”

“그럼 그게 아침이었어요?”

“그렇지 뭐. 그러고 보니 넌 아침 먹었니?”

“저야 뭐 적당히 챙겨 먹고 왔죠.”

출근길에 빵 하나를 먹고 왔다. 그 빵 하나를 먹으면서도 속에서는 부실한 식단이라며 투덜대곤 했는데, 대표님은 새벽같이 일어나면서도 블랙커피 한 잔이라니, 부실을 넘어 너무나 가혹한 식단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아침 회의에 보고까지 처리하는지 놀라웠다. 도현은 내일은 자신이 먹는 빵이라도 하나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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