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2부 : 유리구두 =========================
도운이를 깨우려고 톡톡 쳤을 때, 도현이는 벌떡 일어났다. 도운이가 어딘가 좀 아픈 구석이 있다는 것은 출근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열나는 거 보라고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는 미열이라 감기약만 먹이고 말았는데, 머리를 짚어보니 열이 꽤 높았다. 아마 새 직장에서 아픈 몸으로 적응하려다 몸살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도운아 괜찮아?”
괜찮냐는 말을 하자마자 정도운은 욱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황급히 옆에 있던 비닐봉지를 찾아 주자 거기에 대고 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도현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형이 너 대신 출근할게.”
“형이?”
열이 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도운이 되묻는다. 도운이 뭐라 하든 말든, 이미 도현은 도운의 검은색 정장을 챙겨 입고 있었다. 자신의 정장도 하나 챙기고. 도운은 형에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입을 여는 순간 또 한 번 토했다. 그 모습을 본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한 3~4일 정도면 너도 낫겠지.”
“형, 진짜 고마워. 내가 나중에...”
“됐어. 넌 그냥 나중에 내가 아플 때 형처럼 해주기나 해.”
“형은 잘 아프지도 않으면서.”
“툴툴대지 말고 거기 약이나 먹어. 토할 때 아까 먹은 약 다 토했겠다.”
“응.”
“그리고 오늘 병원 가고.”
“알겠어.”
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시원하게 토하고 나니 좀 들끓었던 속이 나았는지 도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도현은 도운이 묶어 놓은 봉지를 처리하고 난 뒤 명찰을 확인했다. 정도운. 자신과 비슷한 듯 다른 이름이 붙어있으니 어색하다. 도현은 잠시 명찰을 만지다 제 명찰까지 챙겨 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대표님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도운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자 대표님의 집 안에 보였다.
‘뭐지...’
매번 대표님을 집까지 따라갈 때 집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안에 들어오니 기시감이 들었다. 붕 뜬 느낌이 들어 도현은 잠시 몸을 움츠렸다. 검은색과 회색, 흰색만이 존재하는 무채색의 인테리어. 사람 사는 흔적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도현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어디서...
“도운씨, 왔어요?”
대표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현은 자기만의 상념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도현은 도운씨라는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대표님께서 도운이인 척하는 도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
“그럼 오늘은 한 번 도운씨가 골라볼래요?”
도현은 도운이 대표님의 옷을 고르기 위해 자신에게 급하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를 기억했다. 그래,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지. 자신은 그때 적당히 무난한 옷을 골라드리라고 조언했던 것이 기억났다. 조금 아쉬웠다. 자신이 직접 고른다면 좀 더 멋진 옷을 골라드릴 수 있었겠다 싶어서. 도현은 도운이가 예전에 옷을 골랐다는 것에 유의하며 말을 이었다.
“...또 고르는 겁니까?”
“두 번째니까 이번에는 좀 더 잘 고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힘들었겠다, 도운이. 도현이는 자신이 골라준 옷과 엄마가 사 준 옷만 입었던 도운이를 떠올렸다. 도운이는 옷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다. 있다면 운동화 정도에나 관심이 있었지. 그저 세 줄짜리 트레이닝복을 피부처럼 입고 다니던 도운이가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을까, 불쌍한 마음뿐이었다.
도현은 옷장을 열었다. 수많은 색의 정장이 걸려있었다. 마치 색상환을 보듯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진열되어 있는 정장은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도현은 잠시 고민했다. 대표님은 주로 검은색이나 짙은 남색의 정장을 입고 다니셨다. 하지만 워낙 몸도 좋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으니. 아마 이런 것도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것도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도현이 회색 와이셔츠, 진회색 수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민혁은 자신의 마음이 긴장으로 굳는 것 같았다. 예전에 도윤이가 이런 것도 좋다며 골라 준 옷과 너무나도 비슷해보였다. 아니, 거의 똑같다고 해야 하나. 민혁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코트는 이런 것으로 입고 가시면 분위기 전환이 되지 않을까요.”
큰 체크무늬의 회색 코트까지 꺼내자 민혁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민혁이 뚫어지게 자신이 골라준 옷을 쳐다보자 도현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도운의 명찰을 달고, 무언가가 도운의 점수를 깎을만한 일을 한 건가 싶어서. 그런 불안한 도현과는 달리, 민혁은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각에 잠시 모든 것을 멈추었던 것이었지만. 도현이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아닙니다.”
“아뇨,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다시 고르겠습니다.”
“이것으로 입도록 하겠습니다, 도운씨.”
아주 마음에 들어요. 민혁은 그렇게 대답하고 서둘러 와이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도윤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민혁은 자꾸 벅차기만 했다. 그리고는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혹시나 도윤이 환생하고 난 뒤, 여덟 번째 첫 만남에서는 첫눈에 반하지 않았으면 어쩌지,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서. 자꾸 조바심을 내다가 또 이런 자신의 모습에 부담을 느끼고 겁먹어서 숨어버릴까 다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도운씨. 커프스 단추도 골라 줄래요?”
“네.”
도현은 일전에 붉은색과 노란색의 보석이 박힌 커프스단추를 떠올렸다. 민혁에게 그것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왕 이렇게 회색으로 입혀놓았는데 너무 붉은색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도현은 조금 망설이다 터키석이 박힌 커프스를 골라 내려놓았다.
“저번 것도 좋았는데, 이걸 선택한 이유는 있어요?”
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실크 가운을 벗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눈 앞에 펼쳐진 민혁의 조각 같은 몸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림처럼 잘 짜인 근육과 속옷 너머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물건의 크기에 도현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이리저리 굴렸다. 도현의 귀가 또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한편 민혁은 오늘은 왜 자리를 뜨지 않지? 라며 제자리에 서서 눈만 굴리고 있는 자신의 수행비서를 바라보았다. 저번에는 드레스룸 바깥에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던데 오늘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통로 가까이에 서서 나갈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었다.
‘귀엽다...’
민혁은 자신의 근육을 본 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은 ‘도운’이 귀여웠다. 그런 점이 민혁을 더욱 설레게 만든다. 그럴수록 민혁은 도운씨라고 더욱 다정하게 불렀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끌어들여서 위를 덮쳐 등을 누르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름만 조금 바꾸면 자신에게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냐고. 그래서, 지금 어떻게 행복해지고 싶냐고. 이런 것들을 참느라 도운 앞에서 민혁은 늘 팽팽하게 긴장한 상태였다. 앞에서 다른 의미로 느슨하게 풀어지게 되는 도현과는 달리. 이러한 긴장감이 꼭 자기 자신의 영혼을 두드려 깨우는 것 같은 자극이 되었다. 그 때문에 도운 앞에 서면 민혁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시험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도운씨.”
“네, 대표님.”
“향수도 한 번 골라볼래요?”
“향수요?”
민혁은 저쪽으로 향해 손을 뻗었다. 셔츠를 입고 셔츠 가터를 입을 때 도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통에 그만 놀려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도현 역시 향수를 골라달라는 요청이 조금 숨통을 트이게 하는 지시라고 생각했다. 두꺼운 허벅지에 셔츠 가터를 채울 때 도현은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남자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느껴본 적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 하고 도망치듯 고개를 숙이고 나와 향수 앞에 선 도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향수는 잘 써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도현은 수첩의 이름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은 뒤에, 핸드폰으로 하나하나 향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중얼거리며 향수를 고르기 시작했다.
“가을의 단풍이 생각나는 오렌지 홍차 향기?”
가을의 단풍까지는 좋은데 오렌지 홍차 향기는 뭐야. 도현이 픽 웃으며 향수병을 구석에 가져다 놓았다. 다시 하나를 더 골라 검색하자 소나기가 지나간 정원의 흙냄새라는 평을 받은 향수가 보였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어느새 바지까지 입은 민혁이 도현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왔다. 도현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얼굴 위로 민혁의 턱이 보였다. 민혁의 품 안에 살짝 안긴 것 같은 상황이 되자 도현의 얼굴도 드디어 조금 붉어지기 시작했다.
“대, 대표님?”
“그래서, 골랐습니까?”
어쩐지 목소리가 다정했다. 도현은 들고 있던 향수를 꼼지락거리며 들어보였다.
“이건 소나기가 지나간 정원의 흙냄새래요.”
“어떻습니까, 그건?”
“미묘해요.”
“미묘합니까? 그럼 다른 건요?”
“잠시만요, 잠시만요. 검, 검색해볼게요.”
다른 것을 검색해보자 묵직한 우드 향이라고 검색이 되었다. 도현은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자신의 바로 위에 있는 대표님을 향해 말했다.
“이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향입니까?”
“묵직한 우드 향이래요.”
묵직한 우드 향. 그리고 민혁은 ‘도운’이 아랫입술을 살짝 앙다물고 미소를 짓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펄스 포인트에 향수를 뿌리자 가까이 있던 ‘도운’의 몸에도 향이 밴다.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이 후각적으로 다가오자, 민혁은 그만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