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2부 : 유리구두 =========================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문이 닫히고, 도현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 넓은 공간에 이제 민혁만이 홀로 남았다. 이 넓은 공간에 홀로 남게 되면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고용인이 깨끗하게 치워서 그런걸까, 아니면 자신이 살아서 그런 걸까. 이 공간은 생활감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이래서야 그 때 도윤과 함께 했던 그 아무것도 없던 흰 공간이 차라리 인간미가 넘쳐보였다.
쌍둥이를 수행비서로 들인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3년 전 그날 이후, 민혁은 귀찮아도 수행비서를 들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며 광공이 되는 법을 가르쳐 준 도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차트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도윤이어야 했다. 민혁은 3년 전 그날, 비서진을 모두 소집한 날 수행비서를 두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그 자리는 도윤을 찾으면 꼭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핑계라도 있어야 도윤이 나타났을 때 당장 앉혀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둘이라니...그치, 도윤아? 끝까지 잘 숨네.”
나무는 숲속에 숨었을 때 가장 찾기 어렵다. 나무가 도시의 빌딩 사이에 숨어봤자 숨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저와 똑같은 나무들 사이에 숨으면 곧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도망수라더니, 시작부터 도망을 치고 앉았다. 민혁은 그것이 유쾌한지 슬픈지, 혹은 화가 나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절망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타났을 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민혁이 쌍둥이가 나타났을 때 자신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후회할 만한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하다못해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오라고만 했어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만남으로 인한 충격은 그 뒤로는 찾아오지 않았다. 최초의 시그널을 잘 잡았어야 했는데, 자신이 느슨해진 탓이었다.
민혁은 냉장고를 열었다. 크리스털 잔에 얼음을 넣었다. 그리고는 양주를 따랐다. 두어 번 크리스털 잔을 돌리자 양주가 금세 차가워진다. 양주가 목구멍을 태우는 듯한 감각을 주며 내려갔다. 양주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용인이 반짝거리게 닦아놓은 크리스털 잔과 양주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너는 누굴까, 너는 누굴까....”
민혁이 양주잔을 들고 전면 유리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자 커튼이 올라가고 도시의 불빛이 자신의 발아래 놓인다. 도현과 도운을 만나기 전에는, 그 깜빡거리는 불빛을 보면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이 수많은 불빛 속에서 어떻게 도윤이를 찾을까 싶어서. 그래도 지금은 희망이 어느 순간보다 확실하다. 끊임없는 자책이 뒤따르지만, 그래도 어쨌건 눈 앞에 존재하고 살아 숨쉬는 형태로 있었다.
민혁이 가장 무서워 한 것은 같은 시대와 장소를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만약에 도윤이 너무 어리다면? 도윤이 너무 나이가 들었다면? 혹은 도윤이 외국에서 태어났다면? 도윤이 이미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었다면? 도윤이 혹시나 다른 사람과... 그런 걱정들이 쌓이고 쌓여 이미 불안 속에 살고 있었다. 편안한 밤이 없었으니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매일 밤, 자신을 데려다 주며 도윤의 목소리로 편안한 밤 되세요, 그렇게 말을 남기고 간 도현의 목소리가 민혁에게 특별한 까닭이었다. 도윤이 그러라고 허락하는 것 같은 그 말에, 얼마 전부터 조금씩 잠을 잘 자고 있었다. 민혁은 양주를 내려놓고 옷을 벗은 뒤 검은 가운을 입었다. 잠들 시간이었다. 잠이 들고 일어나면, 도운이 있을 것이다. 마치 도윤처럼.
…
“오늘은 보고자가 바뀌었군.”
“제가 가겠다고 했거든요.”
“김 팀장이 불안해하지 않던가?”“그러긴 하셨는데, 제가 예전에 좀 잘해서 마음 놓으신 것 같습니다.”
김 팀장 대신 들어온 환강에게 민혁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제환강은 민혁이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환강의 이름을 제가 지어준 것이다. 민혁도 모르는 사이에. 민혁은 도운을 아쉬운 마음으로 내보냈다. 도운이 인사를 하며 문을 닫자마자 환강이 명함을 내밀었다.
“보고가 먼저 아닌가?”
“약속 지키셔야죠.”
당돌한 환강의 말에 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민혁은 환강에게 너그러워진다. 굳이 말한다면 일단 같은 훈련소 출신이다. 그리고 이름도 제가 지은 것이 틀림없었다. 도윤이 말대로 이런 환장할 센스는 자신 빼고는 더 없을 것이니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때 지은 이름이 이 ‘수’의 이름이 된 건 확실했다. 처음에 만날 때 그랬었나. 이름 세 글자 중에 한 글자도 평범한 것이 없다고. 그 말에서 여러 번 이름 때문에 곤란함을 겪어 본 적이 있다는 티가 풀풀 나, 민혁은 어쩐지 환강에게 약간의 부채감마저 들었다.
“말해 보게.”
“회장님 동생, 만나게 해 주세요.”
“동생?”
이 세계에 환생하고 나서 동생은 신경 쓴 적도 없다.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고. 그저 3년 전 눈을 뜬 순간부터 지민혁의 목표는 민도윤 하나에 꽂혀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자기에게 형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동생이라니. 아버지조차도 형 이야기는 혀를 차며 꺼내도, 동생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철저하게 집안에서 버림받은 자식일 것이다. 실제로 1년에 한두 번 있는 가족 식사에 동생은 참여하지 않았다. 형은 잔뜩 날선 얼굴로 처를 데려와 사납게 앉아있기라도 했지, 동생은 마치 죽은 사람 같았으니까.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지난 3년간 연락한 적 없는데.”
“그래도요. 그렇게 치면 전 평생 연락한 적이 없어서.”
“뭐, 약속했으니 들어줄 수는 있어.”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찾으려는 거지?”
그러자 환강이 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지한율 모르세요? 동생이잖아요.”
“지한율?”
익숙한 이름이다. 한율. 지민혁은 입술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차갑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지막 순간이 떠오른다. 넋을 놓고 울고 있던 도윤이를 채간 것도 이한율. 그리고 도윤이를 내동댕이쳤던 것도 이한율이다. 이딴 식으로 거지같이 꼬여 만나게 해 놨다 이거지. 그런 주제에 자기 주위에 있었단 건가. 이딴 식으로 꼬아 놓고 어떻게 될까 궁금은 한지 꼴에 납작 엎드리고 동향을 봤을 거란 생각에 불쾌감이 하늘같이 치솟았다. 하지만 혹시나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니 민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환강씨에게 내가 미안한 마음이지만, 난 내 동생하고 안 친해.”
“그러겠죠. 하지만 그 자리에서 만나게 해 줄 수는 있잖아요.”
“왜 만나고 싶은데?”
“팬이라서요.”
“팬...”
그 순간, 눈치 빠르고 똑똑한 지민혁이 기막힌 촉으로 감을 잡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부서에서 맡긴 ‘수’라고 했었다. 그리고 팬이란 뜻은 지한율이 어떤 동경의 대상이라는 거겠지. 예를 들면 그래, 이한율이 자기 입으로 말했던 ‘연예인’이라던가. 지민혁은 이한율의 수가 제환강일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잘하면 이건, 좋은 카드로 쓸 수 있다.
“그래,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보지.”
“진짜요?”
“다른 연예인도 불러줄 수 있어.”
“괜찮아요. 지한율 하나면 충분해요.”
“언제부터 팬이었는데?”
“데뷔 때부터요.”
하지만 동생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었던 지민혁으로서는 언제 지한율이 데뷔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럴 때 쓰라고 묵혀둔 패가 하나 있지. 지민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김팀장이 보고 오라고 해.”
“저는 그럼 어떻게 알아요?”
“명함보고 연락해.”
민혁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환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손으로 명함을 잡았다. 명함을 잡아당겼는데, 명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혁이 손으로 강하게 쥐고 있는 탓이었다. 뭔가 싶어서 민혁을 보자, 민혁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김 팀장 아래서 무슨 일을 하지?”
“컴퓨터로 사람 캐는 일 하죠.”
“그럼 내 일도 하나 개인적으로 해 줄 수 있나.”
“뭔데요.”
“김 팀장이 알아선 안 돼.”
“팀장님 배신하는 일은 전 안 해요.”
그분께서 저 주워다 먹여 살려주셨거든요. 평생 재수 없게 살 수는 없어서. 그렇게 말하고 환강이 민혁의 눈빛을 받아쳤다. 민혁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사람은 억지로 이기려 들면 괜히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이런 사람은 바람을 불어 코트를 벗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쬐어 코트를 벗게 해야 하는 법이다.
“내가 쌍둥이가 마음에 들어서 오래 쓰려고 해.”
“아.”
“그런데 다른 회사 스파이인지만 알아봐 줘.”
“제가 감추면요?”
“말해줄 거라고 믿어.”
“왜요.”
“요는 회사에 해가 될 만한 게 있냐를 알아내라는 거지, 쌍둥이가 얼마나 한심한지 알아오라는 게 아니잖아?”
“...”“덧붙여 성실하게 살아왔으면 그런 좋은 점을 어필해줘도 되고.”
목적은 사실 그런 걸 알아내는 게 아니니까 말야. 지민혁은 뒷말을 삼켰다. 그저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왔나를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다른 회사의 스파이더라도 온 몸으로 안고 갈 것이다. 스파이면 더 좋을 수도 있겠지. 손아귀 안에 온전하게 들어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더 늘어날 테니까.
“알겠어요.”
환강의 말에, 민혁이 웃었다. 그럼 아우님을 만나러 가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