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2부 : 유리구두 =========================
이탈리아의 아리스톤 원단을 선택한 도현과는 달리, 도운은 영국의 홀랜드 쉐리의 원단을 선택해 옷을 만들게 되었다. 도운은 형의 조언을 생각했다. 형 말대로 똑같은 짙은 네이비색의 정장을 선택하게 된다면 아마 자기가 서두르다 형의 옷을 입고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한 회색 계열의 정장을 선택할까, 검은색 정장을 선택할까 망설이던 도운은 무난하게 검은색을 선택했다.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자꾸 망설이네요.”
“아 그게요. 진회색이랑 검은색 사이에서 좀 고민이 되네요.”
“둘 다 하세요.”
도운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민혁을 바라보았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민혁이 도운에게 사 주려는 것은 비스포크 정장이었다. 모든 것을 맞춰 손바느질로 마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운의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것을 알아버렸다. 한 벌에 몇백의 양복인데 이걸 왜 일한 지 하루도 되지 않는 도운에게 사 주는 건지, 도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면, 민혁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도운을 바라본다. 고작 몇백만 원 하는 것 가지고 이렇게 도윤이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고민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이거 이렇게 비싼데요?”
“이게요?”
그제야 도운은 자신이 지금 J그룹의 차남이자 T그룹의 오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백만 원 쯤은 이 사람에게는 그저 점심 한 끼에 들일 수 있는 돈인 것이다.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 준다는 데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민혁의 뜻을 알고 도운은 차라리 감사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감사합니다.”
“잘 입고 다녀요.”
이윽고 치수를 재기 위해 재단사가 다가왔다. 재단사는 도운의 얼굴을 보았다. 재단사 역시 도운과 도현의 얼굴이 구별되지 않는지, 잠시 멈칫하다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이 손을 내밀자 재단사는 들고 있던 줄자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넘겨주었다. 도운은 일련의 상황을 보다 형이 말해준 것이 생각났다. 직접 회장이 치수를 재 준다고. 도운은 찌르면 피도 안 나올 것 같은 상사가 자신의 치수를 직접 잰다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기! 대표님!”
“왜 그러시죠?”
“제발 치수는 저분께서 재어 주실 수 없을까요!”
“내가 재어도 괜찮습니다.”“아니! 그것이! 괜히 힘쓸 필요도 없으시고!”
“별로 힘들지 않은데요.”
“제가! 그 너무 부담스러워서!”
“아.”
민혁의 표정이 달라졌다.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민도윤 후보의 몸에 닿는 것이 싫지만, 그게 너무 부담스럽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너무나도 아쉽지만, 처음부터 거리를 심하게 좁혀 부담스럽게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다가 둘 중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그래. 민혁의 마음은 아주 섬세하게 갈라질 것이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줄자를 넘겨주었다. 도운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한편, 그룹 오너나 되어서 이런 걸 왜 재고 싶어하는 걸까 궁금해하던 도운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룹 사장님들은 이해할 수 없는 취미가 있곤 한다던데, 아마 그런 종류가 아닌 건가 하고. 누구는 돌을 모은다고 하고, 누구는 지폐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리기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자기가 먹을 고기를 직접 도축하는 취미가 있다고 하던데. 아마 대표님께서는 측정이 취미이신가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세 벌의 옷을 준비하겠다는 테일러의 말과 감사 인사를 뒤로하고, 도운과 민혁은 다음 일정으로 향했다. 도운은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일정 체크를 하나씩 해 나갔다. 삼촌과의 브리핑, 아침 회의, 그리고 잠시 짬을 내어 들른 테일러샵. 그리고 그 다음에는...
“K호텔에서 잠시 커피 약속이 있습니다.”
이어서 도운은 민혁에게 약속을 한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었다. 사수님이 보내신 메신저를 확인하니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손님이었다. 소속과 용건 간단히 요약해 민혁에게 보고하고 난 뒤, 고개를 들자 민혁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
“한 번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도운은 의아했지만 제가 무언가 발음을 잘못했거나 웅얼거리면서 말했나 싶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했다. 인적사항과 특징을 말하고 사진까지 보여드리고 다시 민혁을 쳐다보니 민혁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있었다.
“네. 이상입니다.”
“잘 했어요.”
그 말에 도운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한편, 민혁은 핸드폰을 들고 말하는 도운을 보며 옛 추억에 빠져 있었다. 도윤의 얼굴, 도윤의 목소리로 이런 보고를 듣는 것은 늘 민혁을 설레게 하였다. 차트를 들고 자신에게 하나하나 짚어주던 목소리. 지금 도운의 목소리보다 다정했고 조금은 더 엄격했던 그때를. 추억에 빠져 도운이 보고하는 것을 한 번 놓쳐야 했지만, 다시 들으면 그만이다.
도운이 보고하는 동안 차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K호텔에 도착했다. 도운이 앞좌석에서 먼저 내려 뒷좌석에 앉은 민혁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민혁은 내리며 도운과 도현의 목소리를 다음번에는 좀 더 가까이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도운씨와 도현씨는 앞좌석에 앉지 말고 내 옆에 타서 보고하도록 하세요.”
“하지만 상석이...”
“의전은 나도 압니다. 내가 편한 대로 하겠어요.”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형에게도 알려줘야지. 도운이 기사와 몇 마디를 더 나누는 동안 민혁은 도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넋을 놓고 도현과 도운을 쳐다보는 순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고작 하루인데. 자신의 삶에는 큰 벼락과 풍파가 밀려온 것처럼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도운은 기사와 말을 나눈 뒤, 비서실 단체 메신저방에서 알려준 대로 민혁을 꼭대기 층에 위치한 라운지로 안내했다. 문을 열어 먼저 민혁을 들어가게 하려던 찰나였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민혁이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어버렸다. 도운은 당황해 그대로 멈추었다. 민혁은 문을 잡은 뒤 도운에게 고갯짓을 했다. 도운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버렸다. 문을 잡아주는 도어맨도 당황스러운지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도운은 들어가자마자 민혁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니 대표님, 저를 왜?”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 좀 오늘 왜 이러세요? 아니 늘 본 건 아니지만...”
“제 생활에 잘 맞춰서 적응하는 것이 수행비서의 덕목 아닌가요?”
민혁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어 도운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도운이 너무 당황한 통에 루프탑 라운지는 오히려 도운이 에스코트를 받는 것처럼 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도운은 이 황당한 상황에 그저 굳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띵동, 하고 온 메시지가 겨우 도운을 정신차리게 했다.
- 나 도현이야.
- ㅇㅇ 형 나 지금 K호텔.
- 그쪽 갔구나. 커피 약속은 길어질 것 같아?
- 난 잘 모르겠어. 근데 형.
- 응 왜.
- 아니, 아니야. 나중에 말할게.
- 그럼 내가 좀 일찍 그쪽으로 갈게. 거기서 교대하자.
- 형 어제 잠도 많이 못 잤는데 괜찮아?
- 난 상관없어. 그럼 차려입고 그쪽으로 갈게.
- ㅇㅇ 형. 그럼 여기 제일 꼭대기층 라운지에서 기다릴게. 오면 톡 줘.
도운은 도현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폰을 집어넣었다. 기다리는 시간도 길고, 중간에 타고 내리는 사람이 많아 자주 서게 되어 엘리베이터는 아직 최상층에 도착하기 조금 직전이었다.
“누구랑 문자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요?”
“네? 형, 형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형이 올 시간이네요.”
민혁은 도운을 보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커프스 단추를 고를 때 너무 심장에 콱 박힌 듯한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도운이 가끔 도윤이가 생각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민혁은 과연 저 사람이 도윤이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증거들이 민혁을 흔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단추 하나 가지고 확신을 하기에는 도현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지만, 도현도 어느 정도 느낌이란 것이 있었으니까.
민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도운은 조금은 민혁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니 정도현은 미쳤나 이걸 아무렇지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하기도 했다니 신기하기도 했다. 라운지에 도착하자 이미 먼저 와 있던 손님이 손을 들고 일어난다. 민혁이 다가가면서 도운은 살짝 뒤로 빠져 나갔다. 도현이 오면 이 속모를 상사를 빨리 맡기고 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