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2부 : 유리구두 =========================
도운이 골라준 옷을 입고 출근한 뒤, 도운은 회장실 안에 들어간 민혁을 보고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푹 쉬는 도운의 등을 두드려 자리로 끌고 간 것은 임 비서였다.
“힘들지?”
“네.”
“넌 형하고는 좀 다르구나.”
“얼굴만 같을 뿐입니다.”
도운이 헤죽 웃었다. 임 비서는 처음에 수행비서가 둘이나 들어온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고, 한 명도 아닌 두 명이 하나의 일을 나눠 맡는다는 생각에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업무의 흐름이 끊기지 않기 위해서 수행비서는 이렇게 일을 나누어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대표님의 지시사항이기도 하고, 귀여운 후배가 둘이나 늘어났으니 좋은 것이 좋은 법이라지, 하면서 인수인계나 잘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임 비서는 어제 묵묵하고 빠르게 일을 배워나간 도현을 떠올리며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현이는 좀 말없이 빨리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편이었다면, 도운이는 좀 투덜대면서 할 건 다 하는 스타일 같았다. 어쨌거나 둘 다 외모는 멀끔하고 단정하게 생겼으니 그것 때문인가, 밉지가 않았다.
“알겠어. 가르쳐 줄 테니까, 오전 회의 중에는 비서실장님이랑 박 비서만 들어갈 거야.”
“그럼 선배님이랑 저는 안 들어가는 건가요?”
“당분간은 그렇지.”
“그럼 나중에는 들어가요?”
“응. 당연히 들어가야지. 너도 알아야 하니까.”
“으으...”
“반대로 생각해. 너 가르치는 게 이렇게 힘이 들어서 내가 회의를 빠지네.”
도운은 놀리듯 말하는 지희를 보고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형이 어젯밤에 챙겨주었으니 분명 어디 있을 터였다. 손에 걸리는 것을 잡고 들어내자 작은 초콜릿이 담긴 봉지가 나왔다. 도운이 봉지를 뜯어 한 움큼을 집은 뒤 임 비서에게 건넸다.
“뇌물이에요. 잘 봐주세요.”
“아니 이러면 내가 또 마음이 여려서 어쩔 수 없지.”
임 비서는 고개를 저으며 도운의 뇌물을 받아갔다. 첫 출근부터 형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는다. 옷 고르는 것도 그렇고 사수님께 잘 보이는 것도 그렇고. 도운이 마음속으로 형에게 감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인수인계의 시작이었다.
“너는 걸어다니는 대표님의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해.”
“대표님의 스마트폰이요?”
“그래. 자비스나 빅스비나 시리같은 거.”
“하루의 일정은 내가 관리하고 있어. 그리고 이 일정을 폰에 업로드 할 텐데 대표님이 조정을 원하실 때가 있을 거야. 취소하라던가, 그때 시간 되냐고 묻던가.”
“그러면 제가 이걸 여기에 올리고 보고하라는 거죠?”
“응, 이건 중요도인데, 이것 박비서님이 잘 아시거든. 이걸 보고 취소할 때 말씀은 드리고..”
임 비서님은 정말 좋은 사수였다. 일정관리, 전화응대, 커뮤니케이션, 회의, 출장. 모든 것들을 다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한 대기업 그룹의 비서진이라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도운이야 운이 좋아 단박에 하늘에서 떨어지듯 이 자리에 앉았지만, 한 사람을 완벽하게 서포트하고 연출하는 데 쉴 새 없이, 빈틈없게 합을 맞추어 움직인다는 것은 무언가 달랐다.
“행사할 때 의전이랑 드레스코드는 여기 이 파일에 있어. 도현이한테도 말했지만 도운이 너도 읽어와야 해.”
아무리 좋은 사수가 인수인계해 준다고 해도,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머리에 쑤셔 넣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임 비서는 지끈거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잠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제까지나 회의를 빼 줄 수 있을지 모르니 쌍둥이들을 짬이 날 때 최대한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영특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잘 배우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속으로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좀 쉬었다 하자.”
“네, 사수님.”
힘든 기색을 보이며 쉬었다 하자는 사수의 말에 도운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도운은 냉수를 떠 와 한 잔은 사수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사수님.”
“응, 왜?”
“저랑 형 구분하기 힘들죠?”
“그렇긴 한데, 난 못 구분할 수준은 아니야.”
“우와. 우리 부모님도 가끔 헷갈리는데.”
도운이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 지희를 쳐다보았다. 비서진 중에서도 눈썰미가 좋아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몽땅 외우는 데에는 비서실장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 임지희였다. 덕분에 민혁의 해외 출장이 있을 때나 파티가 있으면 동석해 이 사람이 누군지, 이 사람은 어떤 이슈를 가졌는지 옆에서 일러주는 역할을 줄곧 맡아왔다. 가장 어렵다는 G그룹의 쌍둥이 구분도 지희는 쉽게 해내었다. 임 비서는 도운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희 형제를 구분하냐면 말야...”
“나도 알려주면 재미있겠습니다.”
“대표님!”
임 비서가 자세를 서둘러 고쳐 앉았다. 도운도 자세를 바로 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회의가 끝나고 이사와 팀장들이 안에서 정리하고 있는 동안 대표님이 먼저 나온 모양이었다. 임 비서는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떻게 저희가 한창 인수인계할 때는 안 오시다가 잠깐 쉴 때 보세요.”
“촉이 좋아서 그렇다고 해 둡시다.”
비서실장은 뒤에서 지희를 보고 웃고 있었다. 지희의 입술이 비틀린다. 심사가 뒤틀릴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런 지희를 보며 민혁이 계속 말했다.
“어떻게 구분하는지 궁금한데, 계속하세요.”
“진심이세요?”
민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임 비서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아직까지는 그냥 분위기에요.”
“분위기?”
“좀 더 이쪽이 동생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시시해진 임 비서의 대답에 분위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쌍둥이를 구별하는 팁은 민혁도 진심으로 궁금했던 터라 기대했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지희의 대답에 어쩐지 맥이 빠졌다. 하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임 비서와 도운을 떼어놓는 데는 성공한 것 같으니, 만족스러웠다.
궁금했다. 도운이 무엇을 하는지. 회의를 마치자마자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고 나온 광경은 편하게 앉아있는 임지희와 그런 지희 쪽으로 몸을 기울여 집중해서 무언가를 듣는 도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괜히 민혁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도윤일지도 모르는 도운이, 그리고 지금은 붉어진 얼굴로 민혁의 첫인상에 남은 도운이 지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위험한 것 같았다. 슬쩍 대화를 들어보니, 마침 자신도 관심이 가는 주제라 끼어들기에는 쉬웠지만. 민혁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끊고서 도운을 빼내 갔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 도운씨도 따라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여기인가. 도운은 테일러샵 앞에 서서 생각했다. 여기인 것 같다고. 도현이 말했던 그 정장 맞추는 곳이 여기라는 것은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알 수 있었다. 쇼윈도에 청록색, 와인색, 그리고 검정색 세 벌의 정장이 보였다. 목 없는 마네킹에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입혀져 있는 정장을 보고 보통 테일러샵은 아님을 짐작했지만, 들어가서 그 생각은 더욱 확신을 가진다.
“우와....”
저절로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도운은 이런 곳이 처음이었으니까. 민혁은 그런 도운이 귀여워 보였다. 도현과는 달리 도운은 감정의 표현이 풍부한 편인 것 같았다. 여기에 와서도 회사에서 경비처리를 하게 되는지 물었던 도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저 대표님... 사실 형에게 이미 듣긴 했는데요.”
솔직한 도운의 말에 민혁이 살짝 풀이 죽었다. 생각해보니 형제끼리 말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것이다. 도현에게 정장을 맞춰주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도운도 정장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었겠지. 나름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하고 있었던 민혁으로는 맥 빠지는 일이지만. 하지만 도운은 민혁이 맥이 빠지는 것을 모른 채로 신나할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앞으로 회사 생활 잘 하라고 주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는 웃음에 민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크게 웃거나 활짝 웃는 것은 무리였지만. 오랜만에 자신이 조금은 사람다운 웃음을 짓는다는 것을 자각한 민혁은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동시에 도운이 신기하다. 정말 도윤은 도운이가 아닐까? 민혁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커프스와 넥타이핀에, 처음 만남에 얼굴이 붉어진 것에. 지금은 자신의 웃음을 약간은 돌려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럼 한 번 골라보세요.”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해맑은 도운이네요.
오늘도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