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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7 2부 : 유리구두 (37/82)

00037 2부 : 유리구두 =========================

“도운아, 일어나.”

알람 소리가 거세게 울린다. 같은 방을 쓰는 까닭에 도운의 알람이 도현에게까지 들렸다. 도현이 눈을 감은채로 손을 뻗어 도운을 흔들어 깨웠다. 도운이 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다시 벌떡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도운을 흔들어 깨웠다. 새벽 4시 30분까지 대표님 댁 앞에 정장까지 차려입고 가려면 일찍부터 일어나야 했다.

“도운아, 도운아.”

“아 형...”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10분만이란 소리는 안하고 도운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도운은 그룹 회장이란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미친 스케줄을 늘 단정한 차림으로 소화한다니, 보통 체력도 아니고 보통 정신도 아니다. 강한 몸에 강한 정신이 깃든 아주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운아, 일어나.”

그리고 자신을 깨우는 자신의 형도 강한 몸에 강한 정신을 깃든 사람임이 틀림없다. 어제 12시에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놓고서는, 자지도 않고 자신에게 지켜야 할 사항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도운도 일머리나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라 형의 말을 자세히 귀담아들었으니, 아마 오늘 가면 처음 한 도현보다는 적응이 쉬울 것이다. 그나저나 어제 1시에 잤으면서 3시에 일어나 자신을 깨우는 형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응, 형. 나 일어났어.”

어, 난 다시 잔다. 도현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갈색의 단정한 머리카락이 베개를 구기며 흩어진다. 도운이 씻기 위해 켠 화장실 불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을 눈가까지 끌어올렸다. 아침잠이 많은 도운도 그 장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도운은 서둘러 화장실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형의 새벽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화장실 문을 꼭 닫았다. 첫날이었을 텐데, 형도 피곤했을 테니까.

택시를 타고 도착한 회장님이 산다던 고층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제 급하게 발급받은 T그룹의 임시사원증을 보여주자 보안 검문을 통과해 주차장으로 내려간 도운은 깜짝 놀랐다. 5시에 천천히 내려올 민혁이 4시 25분에 먼저 내려와 있었다. 멀리서 보고 저렇게 큰 키를 가진 사람이라니 혹시 대표님인가 싶어 반신반의하던 도운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며 이목구비가 선명히 보이자 대표님인 것을 알고 뛰기 시작했다. 짧은 거리를 빨리 뛰어 민혁 앞에 도착한 도운은 잔뜩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일찍 나오셨네요.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 신경쓰지 말아요.”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좀 더 일찍 도착하겠습니다.”

앞으로 아침에 늘어지게 자기는 영영 글렀구나 하며 탄식하는 도운과는 달리, 민혁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는 도운을 볼 생각에 전혀 잘 수 없었다. 어제 하루종일 같이 있으며 말이라도 섞어볼 기회가 있던 도현과는 달리, 잠깐 스쳐 지나갔던 도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혁은 더욱 궁금했다. 도운은 어떨지. 결국 도현을 다시 만날 생각에 또 잠을 설쳤다.

민혁은 잠을 자주 설쳤다. 유일하게 고통만이 가득한 이 삶에서 의식을 놓고 잠시나마 평안해질 수 있는 구석이 잠이었다. 그것도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들 수 있는 순간이 많았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에는 일어나서도 한창 기분이 나빴다. 나올 듯 나올 듯 도윤은 꿈에서조차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애태우기만 했다.

그 때문에 민혁은 자주 상상을 했다. 도윤을 찾으면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어떤 방식의 새로운 삶이 펼쳐질지. 얼마나 행복할지. 어제는 처음으로 도윤이라는 존재에 대한 죄책감이 가벼워진 날이었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자 그만큼 들떠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민혁은 참지 못하고 먼저 도운을 맞이하러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저 멀리서 도운이 걸어오자, 민혁은 설레었다. 도운이 인사를 하자 첫날 발그레한 얼굴이 떠올라 다시 한번 더 설레었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대표님.”

“올라가서 같이 먹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먹고 왔습니다.”

“나도 먹었는데, 그거 아쉽네요.”

뭐가 아쉬운 거지. 도운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T그룹의 대표이사를 기사를 통해 접했을 때는 잘생겼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데에는 빼어난 외모 탓도 있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도 한몫했다.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일개 수행비서의 아침을 챙기다니, 도운은 이 사람이 빈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사는 다섯 시에 올 텐데, 집으로 가서 대기합시다.”

“집...네, 알겠습니다.”

재벌인데 아무리 수행비서라지만 집으로 함부로 사람 들여도 되는 건가. 하지만 돈 주는 사람 말을 어길 수는 없지. 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민혁의 뒤를 군말 없이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민혁이 도운을 보며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네.”

“아직 오늘 입을 옷을 고르지 못했네요.”

“네, 대표님.”

“도운씨가 골라보세요.”

“네....”

도운의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전 일정을 관리하는 수행비서는 자기보다 형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침잠도 없었고, 옷을 골라주는 안목도 자기는 영 좋지 않았고, 하루를 시작할 때 브리핑을 하는 것도 형이 더 잘할 것 같았다. 도운은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의 업무용 메신저로 도현에게 SOS를 쳤다.

- 형, 대표님이 옷 골라달래는데 어쩌지? 나 망한 듯.

‘읽으려나? 새벽인데. 망했네.’

도운은 애타는 심정으로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도운은 초조하게 메신저를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불빛이 반짝인다. 확인해보자 도현이었다. 다행히 잠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도운의 메시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역시 형이었다. 아마 자기가 걱정되어서 메신저를 들여다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 가서 사진 찍어보내. 아니면 무난하게 어제처럼 검은색 정장 드려. 넥타이는 좀 무거운 파란색에 조그만 패턴 있는게 누구나 잘 어울리니까 그렇게 하고.

- 아싸 고마워 형

- 무슨 일 있으면 메시지 보내. 20분 지나면 난 잘거임. 졸려.

- ㅇㅇ. 땡큐땡큐.

고속엘리베이터는 펜트하우스까지 빠르게 도착했다. 어지러운 느낌마저 드는 것 같았다. 대표님의 뒤를 따라 들어간 집은 마치 흑백영화의 스틸컷 같았다. 미니멀리즘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의 삭막한 집이었다. 분명 한 사람이 살 텐데 지나치게 넓었고, 한 사람이 살고 있지만 생활감이란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도운은 너무 넓어서 한 번 놀랐고, 너무 깨끗해서 두 번 놀랐으며, 너무 삭막해서 세 번 놀랐다. 평소 같았으면 저절로 턱이 벌어지고 와, 같은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을 텐데. 하지만 도운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간신히 소리가 새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민혁의 뒤를 쭐래쭐래 따라갔다.

도착한 드레스룸은 엄청났다. 옷을 위한 방, 소품을 위한 방이 따로 있었다. 구두가 있는 곳은 현관 쪽에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옷만 있는 방에 도착하자 민혁이 도운에게 눈짓을 했다. 도운은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어떻게 옷을 둘러봤는지도 모르겠다. 도운은 가장 무난한 흰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정장을 빼입었다. 도운이 건네준 옷을 민혁은 받아들고서는 눈짓을 했다. 도운은 멀뚱히 서 있었다.

“옷 갈아입는 것도 볼 겁니까?”

“아, 아닙니다! 나가 있겠습니다!”

도운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얼굴로 드레스룸 바깥으로 나갔다. 나와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불타는 태양 같았다. 형과는 달리 자신은 얼굴이 잘 빨개지는 체질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도운이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좀 식히고 있자 민혁이 나왔다. 민혁은 얼굴과 체격이 받쳐주어서 그런지, 그런 평범한 옷도 마치 북유럽의 모델처럼 소화하고 있었다. 도운은 패션의 시작은 체격이고 완성은 얼굴이 한다는 진리를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거기 넥타이핀과 커프스핀이 있어요.”

“네, 대표님.”

설마 이것도 고르라고 하진 않겠지. 도운은 20분이 훌쩍 지난 시간을 바라보았다. 형은 이미 자고 있을 것이다. 도운은 입술을 깨물고 넥타이와 커프스핀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를 열었다. 총 5단의 진열대 속에서 도운은 고민에 빠졌다. 31가지의 아이스크림 중 5개를 고를 때에도 이렇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는데. 도운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거기서 빨간색이랑 노란색 커프스 핀을 봤는데 대표님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

형이 어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도운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후드 티 색깔을 떠올렸다. 그게, 좀 아주 빨갛지만은 않은 색이었지. 도운은 계속 둘러보다 2층의 서랍을 열었다. 노란색이 들어간 핀은 한 개 뿐이었다. 도운은 노란색과 빨간색의 작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넥타이핀과 커프스핀 세트를 건넸다.

“저, 이게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그것을 건네자 민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도운은 자신이 선택을 잘 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짙은 푸른색 넥타이를 건네자 완벽했다.

“도운씨는 넥타이를 맬 수 있습니까?”

“아... 저...”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못 맵니다. 형이 잘 매죠.”

“배워오세요.”

넥타이를 못 맸다는 이유로 걱정이 가득한 도운과는 달리, 민혁은 오히려 걱정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조금 전 민혁은 도운이 건네준 커프스핀을 보자 마음이 안정을 찾다못해 떨리기까지 하는 것을 느꼈다. 과거 자신이 도윤이 교육했을 적, 자신이 골랐다 옐로우 다이아몬드와 레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제품이라길래 황급히 놓은 것이었다. 아마 도윤일 적 영혼에 새겨진 기억같은 것이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우연일까? 민혁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잔잔히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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