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2부 : 유리구두 =========================
오늘은 임 비서님의 말에 따르면 한가한 날이었다지만, 도현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짬을 내어 테일러샵에 들릴 정도의 일정, 딱 그뿐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1시간이 지나자 스마트폰의 불빛이 미친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임 비서님이 보고할 내용을 요약해 알려주면 도현은 그것을 순서대로 대표님께 알려드렸다. 민혁은 도현이 보고한 내용에 대해 지시하였고, 도현은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다시 임 비서에게 넘겨야 했다.
도현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지시사항과 보고사항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업무가 바쁜 상사를 둔 죄였다. 민혁의 기업이 점점 커져가는 길목에 있는 상황도 한몫할 것이다. 도현은 지속적인 보고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명료하게 지시사항을 내리는 민혁을 보고 감탄했다. 임 비서님이 말한 대로 그는 똑똑해서 좋은 상사였다.
민혁은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도현의 보고를 받았다. 보고의 내용과는 별개로, 민혁은 도현과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즐거웠다. 도윤의 목소리와 도윤의 얼굴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민혁이 환생한 이후로 느끼는 첫 즐거움이자 안정감이었다. 민혁은 그런 즐거움과 안정감에 너무 취하지 않도록 자신을 단단히 잘 붙들어 매야 했다. 민혁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과는 별개로 차분한 목소리로 도현에게 말을 건넸다.
“저녁은 따로 먹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민혁은 약속되어 있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추어섰다. 순간, 환생한 뒤에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남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물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밥은...어떻게 할 겁니까?”
“아, 저는 밖에 나가서 적당히 먹고 오겠습니다.”
“밖에 나가서요?”
“네. 빨리 먹고 들어올 테니 걱정마세요.”
“도현씨.”
민혁은 도현이 자리를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민혁은 도현이 민혁이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민혁은 조금 뒤에 있을 약속이 기업 기밀 사항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민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당연히 저와 함께 들어가는 겁니다. 수행 비서잖아요.”
“아... 네, 죄송합니다.”
“거기에서 도현씨가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도현은 자기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하며 민혁의 뒤를 따랐다. 자신이 굶는 한이 있어도 상사를 잘 모셔야 하는 것은 수행비서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혹시나 이번 실수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까, 제가 많이 실수했나 걱정하는 도현과 달리, 민혁은 도현이 옆에 붙어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어 조금 들뜨기나 했지만.
저녁 약속 장소로 정해진 C호텔의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에 도착했다. 약속 상대와 명쾌하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본 도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외국인이었다. 도현은 이윽고 방금 전 민혁이 말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통역이었던 걸까 하는 심각한 고민이 들었다. 물론 각종 영어공인시험의 점수는 취직을 위해 높게 따 놓았다지만, 사업을 하기 위한 유창한 외국어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유창한 영어가 들렸다. 외국에 나가보지 않은 도현의 귀에도 완벽한 영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릭 존스 씨.」
「저도 반갑습니다, 지민혁 씨.」
사업적인 관계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에릭 존스와 지민혁은 친한 듯 인사를 하는 모습에 도현은 의문이 들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영어를 통해 도현은 그들이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현은 자신이 한국대학교에서 같은 과에서도 친한 사람이 그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새삼스럽게 민혁의 넓은 친분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유창한 영어에 도현은 속으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형? 영어도 잘 한다고?”
“어, 진짜 사기캐야 완전.”
“얼마나 잘해?”
“원어민이야 원어민.”
“하긴 거기서 대학 나왔다매.”
“그럼 다 그렇게 되나?”
“몰라, 나 친구 중에 어학연수 다녀온 애 있거든?”
“근데?”
“걔는 완전 못 하던데.”
도현은 12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업무보조까지 하다 집에 들어오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 있었다. 도현은 집에 도착해 도운을 깨웠다. 쿨쿨 잘 자는 동생을 깨우려니 미안했지만, 임 비서님이 알려주신 것을 조금이라도 듣고 가야 일을 잘 할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사수가 잘 챙겨주어도 형인 자신이 챙겨주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도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 정장 맞췄어.”
“회사에서 그런 것도 해줘? T그룹이라서 그런가?”
“응. 우리 정장은 좀 구린가 봐. 대표님이 맞춰주신대.”
“복지 좋다. 형, 나도 내일 맞춰주실까?”
“그럴 것 같더라. 치수도 직접 재어 주시더라고.”
“어...그건 좀 싫은데.”
“그래?”
“부담스러워. 이상하기도 하고.”
도운이 얼굴을 찌푸리자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도운의 반응이 오히려 일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도현은 말을 애써 돌렸다.
“뭐, 우리가 별수 있냐. 까라면 까야지.”
“그건 그래, 형. 무슨 색으로 맞췄어?”
“아 나는 짙은 남색.”
대표님이 골라준 색이었다. 도현은 그날 처음으로 이탈리아 원단을 보았다. 쌍자음과 울림소리가 많이 들어가는 원단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고르기에 너무 막막해서 적당히 테일러가 추천해주는 것으로 고르려고 했다. 하지만 대표님이 앞서서 가장 나중에 보여준 원단을 가리키며 이것으로 해 달란 말에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났다. 대표님은 예상 외로 자기 같은 수행비서의 옷 하나하나까지 원래 챙겼나 싶었다. 도현은 그것이 뭇내 신기했다. 재벌들이 보통 고용인들을 신경쓰나 싶어서.
“형이랑 똑같은 색 하고 싶은데. 아니 다른 색을 해야 하나? 서로 바꿔입게.”
“그거 못 바꿔 입겠던데. 정장에 자수로 이름 새겨준대.”
“비싼 데라서 그런가 또 별 걸 다하네. 그치, 형.”
“나도 정도운이랑 색 바꿔 입고 싶긴 했지. 두 벌 생긴 느낌 나게.”
“맞아. 나는 무슨 색이 어울릴까?”
도운의 물음에 도현이 잠시동안 생각에 빠졌다. 자신과 똑같은 색이면 입고 나갈 때 헷갈릴 위험도 있으니, 도운이 말처럼 바꿔 입지는 못해도 다른 색을 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너는 진회색으로 맞추면 어때?”
“진회색? 너무 은갈치아니야?”
“아니 그런 색 말고. 저기 저런 색. 여기 이거 후드티같은 색 있잖아.”
“내 생각보다 진하네. 형 말대로 이색으로 맞추면 괜찮겠다.”
“아 그리고 거기 진짜 좋은 덴가 봐. 넥타이핀이랑 서류가방 이런 것도 팔더라.”
“진짜? 그런 것도 사줘?”
“아니, 사 주지는 않지. 그것까지 바라기에는 좀 양심 없지 않냐.”
“그건 그렇다. 하긴 그렇게 좋은 데면 비쌀 텐데.”
“많이 비싸겠지? 물어봐야 하나.”
“물어 보지마, 형. 나 괜히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모를래.”
질겁하며 아예 고개를 돌리는 도운의 모습에 도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질색할 때 도운이는 더 귀여웠다. 도현은 도운이가 말은 저렇게 해도 계속 부담스러워하며 신경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도현은 아예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래. 거기서 빨간색이랑 노란색 커프스 핀을 봤는데 대표님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
“어떻게 생겼는데?”
“빨간색은 저기 너 입는 바람막이에 달린 로고 저 색깔인데 좀 큰 알이고...”
“알? 보석이야?”
“보석 아닌 거 같던데. 큐빅같았어. 너무 반짝거리더라.”
“다이아 아니야?”
“에이, 그럼 그런 걸 막 그렇게 전시해 놓을까?”
“지민혁이잖아. 그럼 보여줄 수도 있지.”
“그런가? 모르겠다.”
“그리고 또 무슨 일 있었는데?”
“아 참, 한정식집은 여기야. 여기 잘 가신댔어. 별일 없으면 여기로 예약해야 한대.”
“오 이건 꼭 알아놔야 안 잘리겠네.”
“벌써 잘릴 생각하는 거냐 정도운?”
“아니거든.”
도현이 도운을 툭 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형제가 서로를 향해 투닥질을 하기 시작했다. 업무 메뉴얼을 알려 주기 위해서 시작했던 대화는 어느새 서로에 대한 충분한 비난과 야유로 가득 찬 대화의 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