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2부 : 유리구두 =========================
점심을 먹은 뒤였다. 도현은 임 비서님이 업무상 메신저로 전달해 준 오늘의 스케줄을 살펴보았다. 점심 뒤에는 저녁 약속이 있었다. 점심 뒤에 있는 빈 공백 시간은 아마 회사로 돌아가셔서 업무 처리를 하시겠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하루는 사수님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다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조금은 어색했던 식사가 끝난 후, 도현은 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혁의 눈과 마주쳤다.
“아...”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니요. 식사 끝나면 어디로 모실까요?”
“...테일러샵.”
“테일러샵이요? 기사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면 될까요?”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집으로 사람을 부르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도현과 함께 어딘가를 가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오랜만에 파괴적이지 않은 충동이 드는 것이 신기했다. 늘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파괴하는 충동으로 고통을 다스려온 시간이 3년이었다. 이런 종류의 충동은 생소했다.
그래서 민혁은 설렌다. 도윤을 만났다는 생각에. 민혁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윤을 만났을 때처럼, 도현의 얼굴을 한 손에 쥐고 끌어안아 이마를 맞대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과연 그리운 기분이 들까? 과연 나는 사라진 내 조각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과연 도윤일까?
민혁은 기사에게 말하러 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꽉 쥐었다. 3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민혁에게는 너무나 길었지만, 도윤의 고통에서는 짧은 시간이었다. 3년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민혁은 생각했다. 민혁은 도윤이 얼마나 자비로운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했다. 그러니 참을 수 있다. 모든 기억이 지워진 도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겁을 먹고 처음부터 도망가 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민혁은 도윤을 잡아 가두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민혁도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누가 도윤인지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도윤이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옷을 맞춰주고 싶은 마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에게 잘 어울린다면,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힌 정도운에게도 좋은 것을 골라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민혁은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것 같은 정도운이 좀 더 신경쓰였다. 자꾸 마음이 갔다. 자꾸 그 얼굴을 붉힌 순간이 마음에 남았다.
“대표님, 올라가시죠.”
차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이 헐레벌떡 들어와 민혁의 코트와 머플러를 챙겼다. 민혁은 한참 작은 도현이 자신의 옷을 챙기는 것을 보고 열심히 일하는 작은 동물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비스포크 테일러샵에 도착한 도현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테일러샵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곳이었다. 정장 뿐만 아니라 턱시도 재킷, 드레스 셔츠, 여러 가지 액서세리까지 전시되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도현은 푹신하게 밟히는 카펫의 느낌을 즐기며 민혁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민혁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테일러샵 안으로 들어섰다.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테일러가 민혁에게 인사하며 반겼다.
“반갑습니다, 지 대표님.”
민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몸이 커지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 정장이 필요해서.”
“네. 누구십니까?”
“여기 이 친구.”
멍하게 있는 도현의 등을 민혁이 툭 쳤다. 도현은 가만히 있다가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게 있었지만, 지금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대표님이 자신의 정장을 맞춰 줄 요령으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도현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저, 대표님...”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네? 회사에서 내 주는 건가요?”
민혁은 잠시 고민했다. 회사에서 경비처리를 할 생각은 꿈도 없었다. 앞으로 도윤을 찾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 마음, 돈, 시간... 어느 하나 아까운 것이 없었다.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와중에 경비처리를 하겠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미 반쯤 도윤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민혁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내가 사는 거죠.”
“그럼 이렇게 비싼 걸 어떻게 받아요, 대표님...”
“그럼 그 옷을 계속 입고 다닐 건가?”
민혁의 말은 몸에도 맞지 않는 옷을 불편하게 입고 다닐거냐 정도였으나, 그 말은 도현에게는 상당히 다르게 들렸다. T그룹의 수행비서씩이나 되어서 회장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 도현은 갑자기 풀이 죽었다. 그러고 보니 빌 게이츠의 휴가라는 인터넷 게시글이 생각났다. 1주일 동안 51억짜리 휴가를 다녀왔는데, 10억의 자산가가 7만 3천원 짜리 휴가를 다녀온 것과 다름없다는 글. 아마 민혁에게도 그런 개념이겠지 싶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새 옷을 사겠습니다.”
“여기서 해결하도록 하죠. 그게 더 편하니까요.”
단호한 민혁의 말에 도현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테일러는 두 사람 간의 대화가 끝나자 줄자를 들고 도현의 치수를 재려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
“네, 대표님.”
“내가 잴 수 있나?”
“대표님께서 말이십니까?”
폭탄 같은 발언에 평정심을 유지하던 테일러의 얼굴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민혁은 앞으로 도윤이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몸을 누군가가 구석구석 만지는 것이 싫었다. 내일이면 도운도 이 테일러샵에 데리고 올 것이다. 어쩌면 집에서 사람을 부르게 되는 수도 있겠지. 어찌 되는 간에 도운의 몸에도 이 테일러가 손을 댈 것이다. 민혁은 그런 것이 싫었다. 그럴 바에는 도현으로 예행연습이나 해 보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황하는 테일러에게 손을 내민 것은 민혁이었다. 주저하는 테일러에게 한 번 더 민혁이 쳐다보자,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테일러는 정신을 차리고 줄자를 넘겨주었다. 테일러는 치수를 재야 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민혁은 줄자를 들었다. 도현은 줄자를 든 그 모습조차 잘 생겨 보여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분명 직업이 테일러가 아닌데도, 몸에 딱 맞는 양복을 입고서 줄자를 든 모습이 마치 테일러를 주제로 찍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그 줄자를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대는 순간, 도현은 자신의 온 몸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에 도망치고 싶었다.
도현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왜 회장님이 직접 나 같은 사람의 치수를 재는 걸까. 회장님의 손이 어깨와 팔, 그리고 허리와 다리를 지나가는 동안 도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깨의 치수를 잴 때는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았고, 팔을 잴 때는 팔이 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허리를 잡기 위해 손을 허리에 둘렀을 때는 안기는 것 같았고, 다리를 따라 손을 뻗을 때는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술을 마셔도, 더위를 타도 쉽게 붉어지지 않는 얼굴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귀 끝만 찬 바람을 맞은 것처럼 불타고 있었다.
“잘 재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민혁은 치수를 재고 나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의 얼굴은 붉어지지 않았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어떻게든 엮일 때 얼굴이 붉어졌다. 술을 굳이 마시지 않아도, 여자가 아니더라도. 하지만 이 비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더 새하얘지고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민혁은 조금은 낙심했다.
도현이 표정이 굳어 치수를 재기 위해 올라간 단상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민혁이 다정하게 물었다. 도현의 얼굴 앞에서 민혁은 다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윤과 똑같았으니까. 도윤이가 도현이가 아니더라도, 그것 하나만으로 민혁은 도현에게 충분히 다정해 질 수 있었다. 그것은 도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만약 도운이 지금 느낌처럼 계속 가다가 도윤임이 확실해진다면 민혁은 모든 것을 집중할 생각이었다.
민혁은 도현의 얼굴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도윤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도윤이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든 버릇이었다. 도윤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이 곳 저 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구경해도 좋습니다.”
“네? 네...”
도현은 민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방금 전 치수 측정의 여파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민망한 기분에 대표님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아마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을 보고 대표님이 자신이 궁금한 게 있는지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출근한 지 첫날, 저 궁금한 거 없는데요 라는 답변으로 자신의 상사를 무안하게 만들 수야 없었다. 도현은 이리저기 구경하는 척이라도 하려다 넥타이핀과 커프스단추가 가득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영롱한 빛깔로 빛나는 보석 때문일까, 대충 구경하려던 도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꽃혔다. 붉은 색과 노란색으로 빛나는 커프스 단추는 웬지 대표님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저, 정도윤씨?”
“저 말씀인가요?”
“네.”
“전 정도현인데요.”
“아, 여기 이렇게 적혀 있어서...”
아, 아마 실수하셨나 봐요, 도현은 소곤거리며 말했고 눈치 빠른 테일러는 주문서를 수정했다. 대기업 오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경우는 피하고 싶은 것은 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현은 테일러가 완성되는 대로 댁으로 보내겠다는 말에 주소를 꼭꼭 눌러 썼다. 알아보기 쉬운 정갈한 글씨체가 주문서 위에 쓰여진다. 그것도 모르고 그 모습을 민혁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환생하고 나서, 정말 무언가를 제대로 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