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34 2부 : 유리구두 (34/82)

00034 2부 : 유리구두 =========================

도운을 삼촌과 함께 보낸 뒤 도현은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있었다. 조금 전 쓴 계약서는 생각보다 충격이었다. 대기업 인턴 월급이라 해 봤자 월 130 안팎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인턴이 아닌 수행비서로 받는 월급은 생각보다 높았다. 아니, 애초부터 연봉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 생소하고 예상 못 할 일이었으니까.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마치지 않고 온 것이 걱정되고 후회될 정도였다. 계속 수행비서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금액이었다.

임 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금액이 맞냐고 묻는 두 형제가 귀여웠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비밀 유지 수당도 있고, 품위유지비 같은 수당이 지급되느라 높아 보이는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형제의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아직 대학을 졸업도 하지 않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운이 좋은 액수였으니까.

멍하게 앉아있는 도현을 정신이 번쩍 들게 한 것은 사수였다. 도현은 사수님을 바라보았다. 임 비서는 첫인상은 차가워 보였지만 도현은 금세 따뜻함을 느꼈다. 조금 전 계약서를 보고 놀라는 두 형제에게 설명해 주는 것도, 꼼꼼하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도 좋은 사수라는 뜻이었다. 단지 피곤에 너무나도 쩔어 있을 뿐. 지금도 사수님은 도현을 찔러 말을 걸었다.

“8시부터 보통 김 팀장님이 4~50분 정도 보고하세요.”

“네.”

“뭐해요, 서둘러 적어야죠.”

“아, 네, 네.”

도현은 서둘러 핸드폰을 켰다. 이런 것만 보아도 임 사수님은 굉장히 잘 챙겨주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9시부터 보통 아침 회의가 있어요.”

“9시부터요?”

“네, 오늘은 저와 도현씨는 안 들어갔지만. 내일부터는 같이 들어가게 될 거에요. 아니, 도운씨가 들어가려나. 수행비서는 거기에서 나온 말들을 모두 기억해 놨다가 대표님께서 물어보시면 대답해 드려야 해요.”

“그걸 다 기억할 수 있나요?”

“업무용 메신저에 보통 비서 중 한 사람이 요약해서 회의록을 올리죠. 그럼 비서들이 숙지해 놓았다가 대표님이 여쭈어보시면 대답해 드려야 해요. 아마 이제 수행비서가 그 일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막내이기도 하고, 가장 잘 숙지해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점심시간인데요. 수행비서면 보통 같이 가서 점심을 들기도 해요.”

“와, 진짜요?”

“지민혁 대표님, 엄청 우아하게 드세요.”

“완벽하시네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임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늘 도현씨 교육한다고 저기 회의실에 안 들어가는 건 좀 좋네요. 그리고는 임 비서는 계속 도현에게 자신이 기억나는 것을 알려주었다. 도현은 그것을 핸드폰에 꼼꼼히 적어 머릿속에 기억했다. 도운에게 오늘 가면 알려줘야 했으니까.

민혁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몰랐다.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만났다. 가슴이 너무 뛰었고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어둠과 고통의 연속이던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빛과 안락함을 만난 기분은 지민혁을 뒤흔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언제나 침착해야 한다던 도윤이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민혁은 진즉에 오늘 회의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민혁은 회의 시간을 겨우 넘겼다. 사실 회의고 뭐고, 오늘은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다. 만약 쌍둥이가 아니었더라면 한눈에 도윤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스케줄은 모두 취소해 버리고 당장 두 손으로 고이 모시는 것이 옳았다. 도윤이에게 여섯 번의 회귀라는 빚을 졌으니, 그 빚을 갚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았다. 하루라도 빨리 도윤이가 누구인지 알아내서, 모든 것을 바쳐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민혁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회의를 마친 뒤 지금은 11시였다. 2시간뿐이지만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던 동생인 도운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다. 민혁이 서둘러 회장실 문 바깥으로 나가려 하자 비서실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점심을 좀 빨리 먹죠.”

“늘 가시던 한정식집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좋아요.”

민혁은 나와서 도운을 찾았다. 도운은 임 비서에게 인수인계 받는 듯 휴대폰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특해 민혁은 도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도운은 온 몸을 기울여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꼭 도윤이처럼. 하지만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민혁이 헛기침을 하자 비서실장이 도현씨, 라고 불렀다. 민혁은 그제야 그가 정도운이 아니라 정도현인 것을 알았다. 민혁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자 조금 실망했다.

“오늘은 시간이 애매해서 형인 도현씨가 9시까지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명찰 패용은 내일부터 하고자 합니다.”

“알겠어. 최대한 빨리했으면 좋겠습니다. 헷갈리더군요.”

“네, 알겠습니다.”

임 비서는 도현을 데리고 옷장 앞에 섰다. 옷장을 열자 민혁의 코트가 걸려있었다. 임 비서가 눈짓하자 도현은 코트를 들고 엉거주춤 민혁의 뒤에 섰다. 178센티미터가 작은 키도 아닌데, 민혁이 워낙 엄청난 키였다. 도현은 민혁의 뒤에 서자 완전히 가려져 보였다. 그 모습에 임 비서는 귀엽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이번에 들어온 신규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민혁은 도현의 도움을 받아 쉽게 코트를 입고 도현에게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갑시다.”

도현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실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수행비서가 안내하고 대표님은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하는데. 하지만 거기다 대고 가르치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런 비서실장에게 임 비서가 살짝 소곤거리며 말했다.

“아 좀 냅둬요. 첫날인데 빡빡하긴.”

“임비서 이러기야?”

“맛은 있습니까?”

“네? 네.”

민혁은 한정식집에 들어와 가장 좋은 코스를 주문했다. 도현은 수행비서란 원래 이렇게 대단한 그룹 회장과도 독대를 하는구나 싶었다. 새삼스럽게 삼촌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바였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민혁의 얼굴이었다. 저 잘생긴 얼굴은 같은 남자라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며 잘생긴 얼굴에 감탄하던 도현에게 민혁이 갑자기 말을 거자, 도현은 지레 놀랐다.

“좋은 한정식집입니다.”

“자주 드시나 봅니다.”

“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점심은 여기서 먹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현은 밥을 먹다 말고 핸드폰을 꺼내 들어올 때 보았던 한정식집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나가는 길에 명함이라도 하나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전해주면 동생이 힘들지 않겠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빨리 휴대폰을 넣었다. 휴대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들자 민혁이 빤히 도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메모를 하려다 그만...”

“도현씨는 원래 그렇게 글씨를 씁니까?”

“네?”

“쓸 때 그렇게 온몸을 기울여서 쓰시네요.”

“아... 어릴 적부터 습관이 들어서요.”

“습관...”

“네. 글자 하나하나 눌러쓰려는 버릇이 들다 보니까요. 지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보기 싫으시면 바로잡겠습니다.”

“아니. 그대로 있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제 말은... 굳이 습관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민혁은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차트에 무언가를 쓸 때 도윤도 저렇게 온몸을 기울여가면서 꼭꼭 눌러쓰곤 했다. 그런 버릇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막상 진짜 민도윤 후보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고나니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민혁은 자신이 말한 것 때문에 도현이 혹시나 버릇을 고치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고치지 말아 주십시오.”

“네?”

“굳이 그러실 필요...아니, 그냥 말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도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삼촌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치밀하고, 완벽한 분이라고.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도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독특한 취향을 가지신 분 같았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저, 대표님.”

“네.”

“처음 봤을 때, 전 사실 외모가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름도 멋있으시더라고요. 뭔가 세련되게요.”

“네.”

“네...”

그리고 또 찾아온 침묵. 도현은 괜히 말했다 싶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렇게 애꿎은 밥알만 밥그릇 사이에서 으개고 있을 때였다.

“고맙습니다.”

“아...네.”

민혁이 살짝 웃음을 지으며 도현에게 말하고는 다시 차려진 반찬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민혁의 웃음에 놀랐다. 기사에서 본 얼굴을 늘 찌푸리거나 표정이 없었는데,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런 민혁의 얼굴을 본 도현의 귀끝이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