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2부 : 유리구두 =========================
도현은 새벽부터 잠에 빠져 정신이 없는 동생을 깨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무렵 T그룹의 인턴을 하기 위한 일종의 프라이빗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삼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장을 쫙 빼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오라 신신당부를 했다.
“야, 일어나.”
“아... 10분만...”
“야, 삼촌이 어떻게 마련한 자린데! 일어나!”
“야, 나 감기 기운 있어... 열나는 거 같아...”
도현은 벌써 머리를 감고 샤워까지 구석구석 마친 뒤에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도 친구가 빌려준 것이라 어색한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삼촌이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을 밀어 넣느라 얼마나 고생했을 텐데. 전화로는 삼촌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며 큰소리 뻥뻥 쳤지만, 도현은 삼촌이 부탁하느라 잔뜩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도현은 세상 모르게 자는 동생을 보며 다시 한번 신경질이 났다. 도현은 동생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일어나라, 정도운. 죽여버리기 전에.”
아침잠이 많은 도운은 결국 도현의 필살기로 깨어났다. 조용하게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는 도현은 진짜 화를 내곤 했다. 도운은 투덜대며 씻으러 들어갔고, 도현은 그런 도운을 보며 3분 차이로 태어난 동생인데 어떻게 3년 차이가 나는 것 같냐고 생각했다. 도운은 애교도 많았고 투정도 많았다. 그런 동생을 어릴 때부터 싸고돌며 키운 건 도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앉아봐. 머리 빗겨줄게.”
응, 형. 도운이 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목소리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말 열이 나는 건지 도운의 뺨은 살짝 발그레했다. 도현은 다녀오면 도운에게 삼계탕이라도 사서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이기를 집어 머리를 단정하게 말려주었다. 도운은 섬세함이 부족해 늘 뒷머리가 뻗치곤 했다. 다 말린 후에 도현은 단정하게 개어 놓은 양복을 가리켰다. 친구에게 부탁해 도운의 정장까지 다 빌려서 챙겨왔었다.
“이거 입고, 양말은 이거 신어.”
“응, 형.”
이제 좀 정신이 돌아왔는지 시계를 보고 서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10분 정도 지나면 삼촌이 데리러 온다고 했다. 도현은 괜스레 마음이 급해져서 도운을 재촉하며 혹시나 몰라 준비한 자소서와 이력서, 그리고 T그룹의 인턴지원서를 챙겼다. 도운의 것까지 모두 챙긴 도현은 나름대로 좀 깔끔해 보이는 백팩에 넣었다. 친구가 생일선물로 나름 좋은 백팩을 사 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챙기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삼촌이었다.
“야, 정도운. 내려가자! 엄마, 우리 잘 하고 올게요!”
잔소리가 많은 삼촌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이것저것 잔소리를 해 댔다. 대표님은 아주 진중하시다, 쓸데없는 허례허식 안 좋아하신다. 도운은 도로 아침잠에 취했는지 차에서 기대어 자고 있었고, 그 말을 듣는 것은 도현뿐이었지만. 도현은 삼촌이 신난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뒤 아버지 노릇을 해 주기 위해 최대한 힘냈던 외삼촌이었다. 도현은 늘 삼촌을 보면 고마웠고 애틋했다.
T그룹의 사옥에 도착해 도운을 깨우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삼촌이 3년 전부터 T그룹의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표와 독대를 할 정도로의 중요한 일인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을 하는지 삼촌은 보안 계약 때문에 입밖에 흘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도현은 삼촌이 정말 중요한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삼촌은 명함도 T그룹 소속인 것을 숨기기 위해 평범한 것을 쓸 정도였으니까.
“삼촌, 근데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대표를 만나서 면접을 봐요?”
“짜식아, 그러니까 삼촌이 대단하단 거 아니겠냐.”
도운의 물음에 도현은 새삼 삼촌이 엄청난 일을 하고는 있구나 라는 실감이 들었다. 최상층에 도착해 복도를 걸어가자 큰 유리문이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서실이 있었다.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저마다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 분위기에 주눅이 든 도운은 자신의 정장을 보았다. 조금 큰 듯해 보인 그 정장에 도운은 인턴을 하고 난 첫 월급으로 반드시 제 정장 하나를 맞추리라 생각했다.
“이쪽입니다. 동행자분은?”
“대표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비서 중 하나가 일어나 회장실 안에 연결된 마이크로 김 팀장과 조카들의 방문을 알렸다. 도현은 괜히 마이크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나왔다. 들어와요. 그 목소리에 어쩐지 도현은 귀 끝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는 분명 굉장히 낮은데, 어쩐지 속삭이는 것 같은 간질간질함이 있었다.
목소리 생각도 잠시, 비서의 안내에 따라 회장실로 안내받았다. 회장실은 한 층을 거의 다 쓴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넓었다. 회장실의 반은 회색 벽이었고 절반은 통유리에 블라인드가 쳐 있었다. 한쪽에는 흰색 대리석 바닥에 검은색의 큰 책상이 놓여있었다. 한쪽에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검은색과 회색 일색의 인테리어에 어쩐지 위압감마저 느껴져 도현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도운은 신기한지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돌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눈치였다. 삼촌은 소파 상석에 앉아 영자신문을 보고 있는 대표님의 바로 옆에 서서 도현와 도운을 향해 손짓했다. 눈치 빠른 도현이 도운을 데리고 삼촌 옆에 섰다.
“보고 하기 전에,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조카들입니다. 정도현, 정도운입니다.”
“그런가.”
“인사드려, 도현아, 도운아. 지민혁 대표님이시다.”
도현은 단정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민혁의 얼굴이 진짜 언론에서 말한 대로 그렇게 잘 생겼을까 궁금했지만 인사가 먼저였다. 도현이 인사를 마치고 들어 올리는 얼굴에서 민혁과 마주쳤을 때였다.
- 쨍그랑!
유리컵이 회장실 테이블에 있는 테이블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블랙커피가 회장실 테이블에 번지고 민혁의 정장까지 조금 젖었다. 도현은 그것을 보고 들고 있던 백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땀이라도 너무 흘릴까 봐 혹시나 몰라 챙겨온 것이었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도현은 손수건을 꺼내 민혁의 정장을 먼저 닦으려 손을 뻗었다.
“괜찮으세요?”
닦아주려 손을 뻗는 도현의 손목을 민혁이 낚아채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언론에서 말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더 잘생겼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검은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미인인데 선이 굵은 느낌. 턱선도 뚜렷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다른 인종인가 싶을 정도로 입체적인 얼굴이었다. 마치 흑표범이 하나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놀라 커진 동공과 눈이 마주쳤을 때, 도현의 귓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도현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지민혁은 눈을 의심했다.
아니, 자신의 모든 감각을 의심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김 팀장의 조카라고 했다. 신문을 읽느라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런 곳에 낙하산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이력서에 인턴 한 줄이 들어가는 정도의 자비만 줄 셈이었다. 하지만 민혁은 그것이 자신의 크나큰 오만임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두 형제를 보았을 때 지민혁은 강한 충격을 느꼈다. 세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있다면, 그것이 찰칵하고 맞물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충격이 지민혁의 뇌를 뒤흔들었다. 심장에 피가 도는 느낌. 눈에 어렸던 안개가 걷힌 느낌. 세상이란 것들이 다시 새로운 기준에 맞추어 재배열되는 느낌. 자신의 일부와 다시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지민혁은 자신이 그동안 민도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만나며, 혹시나 하고 여겼던 감정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깨달았다.
지민혁이 숨이 잠깐 멈추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이 느슨해지며 쨍그랑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지민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황급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황했다.
쌍둥이였다.
구분도 못 했다. 누가 도현이고 누가 도운이라고 했는지. 마치 거울에 비친 것 같이 키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아 보였다. 지민혁은 자신이 누구에게 그런 느낌을 느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지민혁은 너무 당황해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영혼 조각은 느꼈으나, 그것의 원천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들린다. 예전에 들었던 도윤의 것과 똑같았다. 민혁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태어날 때부터 사막에서 산 고래가 처음 물이란 것을 느껴보는 심정이 이러했을까. 민혁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민혁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손수건을 들고 다가오려는 남자를 잡아챘다. 이 사람이 도윤이건 아니건 간에, 민혁은 심장이 터져버려 죽을 것 같아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닿는 순간 자신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민혁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괜..찮네.”
“아이구, 대표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세요?”
민혁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이크 버튼을 눌러 비서실장에게 지금 상황을 알렸다. 비서실장은 여분의 옷을 준비해오겠노라 말했다. 민혁은 그것까지는 되었다 말하고 어질러진 상을 치우게 시켰다. 비서실장이 테이블을 닦는 동안 방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민혁은 비서실장에게 음료를 사람 수 대로 내오라 일렀다. 비서실장은 변한 분위기를 읽고 주문을 받아 자리를 떴다. 민혁은 김 팀장과 두 조카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김 팀장님.”
“예, 예. 대표님.”
“제가 실수했군요.”
“아닙니다, 사람이 살면서 뭐도 좀 흘리고 살 수도 있지요.”
“제 말은, 훌륭하신 조카님들을 제가 미처 몰라봤다는 겁니다.”
김 팀장이 조카를 아끼는 건 이미 눈치챘다. 조카 중 하나를 탐낸다면 김 팀장은 분명 반대할 사람이었다. 민혁은 사냥을 시작하기 전 풀숲에 몸을 잔뜩 웅크린 것처럼 자신의 속내를 숨겼다. 그리고 사람 좋은 척, 김 팀장을 봐서 또 한 번 은혜를 베푸는 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턴보다 확실한 경력을 쌓아주죠. T그룹 수행비서는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