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2부 : 유리구두 =========================
김 팀장은 지금 자리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었다. 비서실장은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비서진들도 슬쩍 문 쪽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모두 회장실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다.
“아니, 환강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김 팀장의 속 타는 말에 시원하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음이 잘 되어있어 소리를 질러도 쥐새끼 소리 하나 새어나가지 않는 회장실에 귀를 대고 있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다. 김 팀장은 환강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우리나라에 지민혁의 심기를 거스르고서 뒷배 없이 무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환강아, 너 또 일 친 거냐...”
아이고, 나도 모른다. 두 손을 들어 얼굴에 푹 박고 마른세수를 하던 김 팀장은 끝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평소에는 그런 김 팀장의 행동을 지적할 비서실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속이 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거니와, 혹시나 자신이 실수했나 싶은 것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름 세 글자 중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는 환강은 자신을 10분째 가만히 뜯어보는 지민혁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다. 김 팀장이 자기 조카 인턴 일로 같이 인사를 하러 가자는데 몇 번이나 주의하라고 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름대로 잘 주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높으신 분은 무슨 심사가 뒤틀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참지 못하는 병에 걸린 환강은 저도 모르게 먼저 말을 툭 내뱉고야 말았다.
“왜 부르셨어요?”
“...?”
“부르신 데 이유가 있을 거 같아서요.”
아주 조금 세게 나간 처음과 달랐다. 두 번째 물음은 자본주의의 권력 아래 굴복한 공손한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지민혁의 저 사나운 흑표범같은 눈동자를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공손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큰 덩치도 그렇고. 맹수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민혁이 입을 열자 저절로 긴장감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성이 뭐지?”
“성이요?”
“그래. 성.”
“남성입니다.”
“...성씨말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칠원 제씨입니다.”
“그럼 제환강인가, 이름이?”
“저도 제 이름 세 글자 중에 얌전한 글자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창시절, 유치원 때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말을 떠올리며 환강은 선수를 쳤다. 사실 환강은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외모부터가 색소가 부족한 느낌으로 화려하게 태어난 것도 그러하지만, 이름도 제환강이라 정말 튀었다. 자신의 존재감이 결국 그룹 대표의 심기를 거슬릴 정도로 사고를 쳤나 싶어 한숨을 쉬던 환강은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
“혹시, 자네는...”
“예.”
“전생 같은 거 기억하나?”
“예?”
잠시 후, 환강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비서진과 비서실장, 그리고 김 팀장의 시선을 모두 한눈에 받아야 했다. 비서실장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고, 김 팀장은 환강의 양 팔을 잡고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왜 이러세요?”
“너... 진짜 괜찮은 거냐?”
“아 괜찮죠, 당연히.”
“바른대로 말해봐. 너 사고 쳤지?”
“음...그게요...”
“내가 못산다, 못살아! 제환장!”
부하직원과 조카, 누나. 제 사람은 끔찍하게 아끼는 김 팀장은 속상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환강의 등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짝짝거리며 달라붙는 소리가 찰지게 비서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며 말릴 비서진도 가만히 있었다. 드물게 감정이 역동적으로 변한 대표님의 임팩트란 그렇게 컸다. 아무 말 없이 수용해 주는 비서진의 모습에 김 팀장은 더 속상해졌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환강이 신경질을 내며 김 팀장의 손을 치웠다.
“아, 별일 없어요, 사장님!”
“그게 무슨 소리야! 사고 친 거 아니야?”
“아 무슨 사고에요. 그리고 사장님 조카들.”
“그래, 무슨 일인데.”
“인턴 시켜주겠대요.”
“뭐?”
환강의 말에 비서진도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T그룹의 인턴이라면 앞으로 피 터지는 취직 시장에서 좋은 이력으로 한 줄 남아 줄 것이다. 그만큼 되기 어려운 자리라는 뜻이었다. 환강은 비서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표님이 보고서 결정하시겠다고는 했지만... 뭐 어쨌든 그래요.”
“뭐?”
“고맙단 소리 안 해요?”
“고...고맙다?”
“고맙죠? 밥 사요. 비싼 거로.”
“그,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건 묻지 마요. 암튼 배고파. 빨리 갑시다, 팀장님.”
“어, 그, 그, 고맙다. 어쨌거나.”
김 팀장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찾아온 행운에 의아해했다. 거기에서 오로지 당당하고 제정신으로 있으며, 전혀 궁금할 게 없는 것은 환강 하나뿐이었다. 김 팀장은 그저 나머지 한 팀원과 함께 환강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인지 파악은 잘되지 않지만, 일단은 나가서 밥이라도 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자식 같은 조카들이 대기업 인턴을 하게 되었으니.
민혁은 조금 전 환강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환강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민혁만이 예전에 교육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환강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조금 안타까웠다. 동지가 될 수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혹시나 민도윤일까 라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정말 손톱만큼도 끌리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꽃병이나 어항을 보는 것 같은 평정심에 빨리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민혁처럼 기억하는 경우가 특별하다는 것.
“도윤이한테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어.”
민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도윤을 잊지 않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저 무언가를 늘 잃어버린 느낌 속에서 결핍된 인간으로 살 수도 있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민혁은 아니었다. 다시 사랑을 통해 살아있다는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일말의 기회라도 도윤이가 주었다는 데 감사하고 있었다.
민혁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도윤이가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곧 도윤이 자신을 진심으로 놓고 싶지 않아 한다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민혁은 작은 것 하나에도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민혁은 환강을 데려온 김 팀장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뿐일까. 환강에게 힘들 때 한 번은 도와줄 것이라고 명함까지 내주었다. 지옥 속에서 살던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든 도움을 주었으니 한 번은 자신도 보답할 셈이었다.
그래, 그런 작은 변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