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2부 : 유리구두 =========================
지민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운동하면 잠시나마 힘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데 지민혁은 그렇지도 않았다. 운동할 때면 도윤이가 더 떠오르곤 했다. 지민혁은 집 안에 위치한 피트니스실의 트레드밀에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펜트하우스에 위치한 지민혁의 집은 한쪽이 전부 통유리라 서울의 환한 야경을 감상하기 좋았다. 아버지께서는 정리하고 평창동이나 성북동에 있는 주택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냐 권유했으나 지민혁이 거절하고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도윤이가 보여 준 집에서 주택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지민혁은 러닝을 하고 내려와 땀을 닦으며 창밖을 보았다. 지민혁의 일상은 모두가 민도윤의 손안에서 짜여진 것이다. 일어날 때 보는 침대부터,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모든 순간이 민도윤이 가르쳐준 것이다. 지민혁은 자신의 집이 생활감이 없는 까닭이 넓어서도 있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는 것을 살면서 깨달았다.
전부 민도윤이었다.
자신의 삶은 광공이란 이름 아래 민도윤이 가르쳐 준 것이 전부였다. 하나하나 민도윤을 생각나게 해서 괴롭지만, 하나하나가 민도윤의 흔적이라 생각하면 어디 내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손을 대기 어려운 것들이 늘어났다. 자신의 집인데도, 자신의 기업인데도, 자신의 차인데도. 온 세계가 민도윤이 남기고 간 흔적뿐이라 점점 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단조로움이 늘어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치 민도윤의 유지를 지키는 것 같으면서도, 고통스러움에 더 무언가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민혁은 냉장고로 걸어가 비서가 채워놓은 물을 마셨다. 무언가를 제대로 먹지 못한지는 오래되었다. 상실의 고통은 식욕까지 건드려대었다. 지민혁은 민도윤이 당부했던 근육을 유지할 정도로만 겨우 먹는 수준이었다. 가정부만 건드리는 냉장고에 식재료가 있었고, 지민혁이 여는 냉장고에는 물병과 간단한 음료수가 전부였다.
지민혁은 물병의 뚜껑을 따다가 또 한 번 멈칫해야 했다. 물을 마시는 순간도 전부 민도윤이었다. 한숨을 짧게 쉬었다.
“이렇게까지 전부일 리가 있었니, 도윤아.”
허공에 대고 들릴 리 없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한 말이 몇 마디일까. 이렇게 작은 것에서 무너지곤 했다. 오히려 민도윤의 후보를 만나서 아닐 때는 견딜 수 있었다. 울음이 나오지도 않았고, 힘들다는 느낌도 이제는 잘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물병 뚜껑 하나, 차를 운전하는 기사, 목 끝까지 올라오며 터지지 않는 욕설, 폐가 터지기 직전까지 달리는 달리기에서 민도윤을 볼 때는 한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민도윤으로부터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민혁은 피식 웃으며 손안에 있는 플라스틱병을 들었다 받았다 했다.
“민도윤을 찾고 있는데.... 이렇게 그림자만 자꾸 보이네.”
그렇지 도윤아? 그리고 대답은 역시 없었다.
아침에 잠에서 깬 지민혁은 잠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수면제의 영향 때문이었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지도 3년째였다. 유리 조각의 바다를 건넜던 그 날부터, 지민혁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뒤척이면 민도윤이 생각났다. 민도윤이 웃는 것도 생각이 나고, 민도윤이 우는 것도 생각이 났다.
또 어느 날은 민도윤을 찾으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다 가슴이 뛰어 잠들 수가 없었다. 상상 속 자신은 어느 날 민도윤을 찾게 된다. 그리고 기뻐한다. 도윤이는 다시 첫눈에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지민혁 역시 그러했다. 도윤이를 데리고 할 첫 번째 데이트는 박물관을 빌리는 것이었다.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의 하룻밤을 통째로 빌리는 것이다. 거대한 흰긴수염고래를 실제 크기로 재현해 놓은 조각상 밑에 침대를 놓는다. 주위는 온통 꽃으로 꾸며놓을 것이다. 그렇게 고래가 떠다니는 방과 꽃밭 위에서 하루를 잠들고 다음 날은 백화점을 빌릴 것이다. 백화점에서 무엇을 고를까 상상을 하다가 결국 민혁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환하게 웃는 도윤이의 모습은 마지막 저 앞에서 울다 만 얼굴로 상상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오늘도...”
민혁은 심란한 얼굴로 버튼을 눌러 암막커튼을 걷었다. 오늘의 꿈에도 도윤이는 나오지 않았다. 민혁은 그것이 도윤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혁은 얼굴을 비비고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나갔다. 민혁은 아침도 한 잔의 블랙커피 외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생각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십시오, 아버지.”
아침에 걸려온 전화는 결혼을 독촉하는 아버지의 전화였다. 3년 전 그 날 이후로, 지민혁을 환생한 이후로 민혁은 약혼을 파기해버렸다. 들어온 선자리도 죄다 엎어버렸다. 재벌가 사이에서는 지민혁이 정부가 생겼다, 동성애자더라 하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길길이 화내며 날뛰었으나 그 이후로 무섭게 성장하는 T그룹을 보며 아버지는 다시 좋은 말로 구슬리기 시작했다. 좋은 약혼자를 알아보겠다, 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사랑해도 좋다, 예전 그 약혼자가 모든 것을 눈감아 준다더라, 이런 식으로. 민혁은 아주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가 왜 그러냐는 말에도 민혁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더러운 채로 김신우 팀장의 아침 보고를 받기 위해 들어간 민혁은 평소보다 늘어난 보고 인원에 의문을 가졌다. 보통 김신우 팀장과 비서실장만 들어와 보고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지민혁이 뭐냐는 듯 김신우를 쳐다보며 앉자, 김신우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평소보다 사람이 많군.”
“내보낼까요?”
“아니 비서님, 그러지 마시고요.”
김신우는 웃으며 말했다. 지민혁은 저 웃음을 안다.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을 때의 웃음이었다. 지민혁은 김신우에게 해 줄 만큼 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한다니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지민혁이 자기 생각을 읽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김신우는 자신의 옆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한다.
“제 팀원들입니다.”
“활동비가 더 필요한가?”
“아니요, 대표님. 너희들은 나가 봐, 이만.”
두 사람이 머리를 숙이며 나간다.
“아니면 그만두겠다는 소린가? 팀원보고 대신하라고?”
“아닙니다. 그저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조아리는 머릿수가 는다고 들어주실 분이 아니십니다.”
비서실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김신우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다. 그렇지만 다시 펴진다. 저 정도인 것을 보니 분명 간절한 부탁일 터였다. 지민혁은 비서실장을 향해 눈짓했다. 민혁의 의중을 읽은 비서실장이 입을 다물고 김신우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김신우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게 조카들이 둘 있는데요... 이번에 T그룹에서 인턴을 뽑는다고 해서...”
“그런 부탁이면 곤란한데요, 김신우씨.”
“아니, 비서실장님. 잠시만요. 제 조카녀석들은 한국대학교 출신입니다.”
“저도 한국대학교를 나와 미국 대학원까지 나왔습니다.”
“아유, 아주 엄청난 학벌이시네요, 비서실장님. 대표님, 저희 조카 둘이 참 좋은 녀석들이고.”
“안 됩니다. 김 팀장님. 보고하세요.”
평소의 민혁이라면 이렇게까지 비서실장이 자르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의 민혁이 심기가 아주 더러웠다는 것이다. 도윤의 그림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다음 날, 결혼을 종용하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는 점이 문제였겠지. 민혁의 사소한 불운은 다른 사람들의 큰 불행이 되는 세상이었다. 김신우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더 이었다.
“아니 그래도 만나라도 보시면 여기가 원하는 인재상에 딱 맞는..”
“시끄럽군.”
민혁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비서실장은 헛기침했고 김신우 팀장의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김신우 팀장은 서둘러 허둥지둥 보고서를 꺼냈다. 지민혁은 김신우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를까, 말까. 하지만 지금까지 뽑아본 보고서를 보았을 때 김신우 팀장은 쓸 만한 인재였다. 한두 번은, 민혁도 혹할 정도의 민도윤 후보를 데리고 왔으니까. 민혁은 표정 없이 김신우 팀장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김신우 팀장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김신우 팀장의 보고로 올라온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것도 민혁의 마음에 썩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선은별이라는 사람이었다. 오늘 밤에 만나러 가 볼 계획이었지만 민혁은 썩 기대되지 않았다. 사진으로 본 선은별은 이름만큼 반짝거리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아니, 도윤만큼 반짝이는 것이 어디 쉽게 찾을 수 있겠느냐마는. 민혁이 썩 탐탁지 않은 눈길로 파일을 덮을 때였다.
“야, 환강아. 가자!”
완전히 닫히기 직전의 문틈에서 난 소리였다. 민혁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한 벌에 몇백만 원이나 한다는 코트가 카펫에 떨어져 형편없이 구겨졌다. 민혁은 그 코트를 밟고서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김신우 팀장.”
“네?”
“환강이 누구지.”
민혁의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골까지 띵하게 울릴 정도로 긴장한 적은 처음이었다. 환강.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처음 이름을 지을 때였다.
- 제, 강, 도, 환, 차, 혁, 태... 뭐 이런 글자들 있잖아요. 광공이 쓸 법한 그런.
- 그럼 제환강은 어떻습니까?
- 그 글자로도 그렇게 환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시네요!
그리고 도윤이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자신이 흔하지 않은 이름을 그 순간에 내뱉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전율과 감사함을 느꼈다. 김신우 팀장은 당황하며 야, 환강아! 라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밝은 갈색에 가까운 반곱슬 머리. 키는 175센티미터쯤이었다. 도윤이만큼 뒤통수가 보이는 사람이었다. 환강이란 사람이 고개를 돌렸을 때 민혁을 탄식을 내뱉는다. 전반적으로 색소가 부족한 인상. 입가에 미소는 있지만, 처음 마주한 인상은 지극히 사무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민혁은 이 사람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도윤씨가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만났던 다른 부서의 '수'였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