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8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실 안이었다. 회색의 커튼에 가려진 통유리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이불을 치우자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은 내가 통유리에 비춰 보였다. 그제야 나는 도윤씨가 생각났다.
도윤씨. 이한율이 도윤씨를 들어 올려 안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우느라 진이 빠질 정도로 지쳐있던 도윤씨는 맥없이 안겼다. 그리고 이한율이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그 말이 끝나자 도윤씨는 맥없이 사지를 늘어뜨렸다. 조금의 긴장을 가지고 그 안에 안겨 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난 일어나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도윤씨에게 손을 댄 이한율도, 그리고 무엇인가 도윤씨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순간도. 모두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배배 꼬인 불같은 분노가 뱃속부터 일어났다. 나는 옆에 있던 무드등을 쥐어 던졌다.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며 검은색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깨졌다.
“도윤씨.”
부르면 나와야 했다. 나는 차트를 들고 있던 도윤씨가 이 소리를 듣고 내 옆에 나타나기를 원했다. 당황한 목소리로, 나보고 괜찮냐고 물어봐야 했다. 짙은 갈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나를 담았던 그 맑고 깨끗한 눈. 내가 입술로 경애를 표할 때마다 붉게 물들던 흰 피부. 내게 다정하게 말하던 그 목소리. 눈물이 맺혀 방울지던 속눈썹. 쉽게 물들던 붉은 뺨. 수많은 단상이 내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느 하나도 나의 눈앞에 살아 숨쉬어 나타나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도윤씨를 불렀다.
“도윤씨!”
크게 소리 질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들어오라 했고 문이 열렸다. 나는 희망에 차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서둘러 달려온 듯한 사람은 도윤씨가 아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윤씨가 만든 허상은 인상이 흐려야 했다. 이목구비란 것이 제대로 존재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야 하는데, 저 존재는 아니었다. 훨씬 더 살아있었다.
“멈춰.”
그러자 그 사람이 멈추었다. 검은색의 단정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려다 말고 멈추고는 다시 정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 사람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어느 느낌도 들지 않았다. 허상이 아니라 사람 같은데, 근원적으로 끌리는 것이 없었다. 도윤씨일 수 없었다.
절망감이 나를 때렸다. 도윤씨 앞에서 나는 계속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절벽에서 떨어진 직후이려나. 나의 모든 것 하나하나에 실을 걸어 블랙홀로 던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누군가가 강제로 뜯어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뜯어낸 내 영혼이 타오르며 분노에 불이 붙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도윤씨, 도윤씨.... 이한율, 이 망할...”
나머지 하나의 무드등이 박살을 내며 깨졌다. 고용인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장식품을 향해 걸어가 바닥에 던져 박살을 냈다. 크리스털로 만든 장식품이 산산조각이 나며 튀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도윤씨의 눈물이 생각이 났다. 욕을 하고 싶었는데, 쌍욕이 목구멍에서 먹힌 듯 나오지 않았다. 욕을 할 수가 없자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한참을 던져 박살을 내다 정신이 돌아왔다. 깨어진 수많은 파편이 내 주위에 널려있었다. 개중에 몇 개는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나는 내 발밑을 보았다. 피가 나고 있었다. 도윤씨의 말이 생각났다.
- 광공은 화가 나면 여기 위도 막 걸어온다니까요.
맞는 말이야, 도윤씨. 나는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 나왔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세포 끝까지 타오르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분노는 강력했다. 나는 피가 나는 발을 보고 그제야 내가 환생한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한율은 나더러 말했다. 자기를 못 죽인다고. 이제부터 난 환생할 거라고. 도윤이 잡으러 안 가? 라고.
그 말인즉슨 도윤씨도 나와 함께 여기 이 어딘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마지막 순간은 너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정신이 없고 충격을 받았지만 기억할 것이 많았다. 도윤씨는 내 조각을 가져갔다. 내 영혼의 조각들을. 그때에는 돌려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없어진 것이 차라리 나았다. 나에게서 떨어진 것들은 나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하겠지. 도윤씨는 아마 내가 그것 때문에 운명적으로 끌릴 거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윤씨는 여섯 번을 회귀했다. 회귀하는 내내 나와 엮었고 사랑을 한 것 같았다. 사랑은 모두 실패했고, 도윤씨는 상처를 깊게 받았다. 도윤씨가 받은 상처는 도윤씨의 무너진 모습에서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가슴이 빠듯하게 죄여왔다.
빠듯하게 죄여오는 가슴으로 생각해 내야 했다. 도윤씨는 내가 자기연민에 빠져 프랑스로 갔다고 했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난 기억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헤어졌다고도 했었다. 세 번을 내 가족들에게 죽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가족이 억지로 헤어지게 만든 모양인 것 같았다. 두 번은 외로움에 미쳤다고 했었지. 나는 지금 나의 처지가 도윤씨의 그 외로움 어디 한 구석과 닿아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도윤씨에게 닿았다고 자신한 순간에, 내가 도윤씨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내가 실수했었다. 내가 도윤씨에 대해서 얄팍하게 아는 것 가지고 도윤씨와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뿌리 깊은 죄책감이 내 뇌를 뒤흔들어 놓았다. 발끝에서 타고 올라오는 짙은 패배감이 나를 건드렸다. 부재로 인한 불안이 조금씩 차오른다. 천천히 깊은 물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엉망이 된 방을 가로질러 건너갔다. 고용인이 발을 다쳤다며 의사를 부르라 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지금 가장 내가 먼저 할 일.
“사람을 하나 찾아야 해. 그게 먼저야.”
“예?”
“비서진들 1시간 내로 소집해.”
“...알겠습니다. 의사도 같이 부르겠습니다.”
“좋아.”
고용인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도윤씨의 말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일곱 번째 나를 만났을 때 다시 또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던 그 말을. 모든 순간 나를 사랑했다는 그 애증이 섞인 말이 지금 나의 하나뿐인 숨통이었다. 어쩌면 다시 나를 보았을 때 나를 사랑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도윤씨, 아니....도윤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잘 있니. 울지는 않니.
다 잊어버리고 웃고 있기만 해도 좋겠다.
내가 이번엔 놓치지 않을게.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