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내가, 도윤씨, 내가 설마 당신을 예전에 잃어버린 적이 있었나요?”
“우리 정말 오래 서로 찾았잖아요....”
“오래요?”
“아니야, 정말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만. 나만 기다렸잖아요.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어요. 당신 앞에서 괜찮은 척 하기 너무 어려워요.”
도윤씨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초조해졌다.
“민혁씨는 기억 못하겠죠? 당연히?”
“나, 난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럴 거예요. 내가 지웠으니까요.”
“기억나게 해 줘요.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도윤씨는 펑펑 울고 있었다. 도윤씨는 넋이 나간 것처럼 울고 있었다. 눌러 둔 것을 모조리 터트리듯, 둑이 터지게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억이 나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도윤씨는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도윤씨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렇게 서럽게 울면서 토해낼 기억이란 흉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어떻게 당신이 뭘 할 수 있어요?”
“찾으러 갈게요. 내가, 내가 잃어버렸다면서요.”
“몇 번이나 잃어버린 줄은 알아요?”
“네?”
“다시 몇 번이나 잃어버려지는 슬픔은 알아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가 도망을 못 가서 그런 줄 알았어요, 민혁씨...”
“....”
“그런데 당신이 포기한 거였어요.”
“난, 난 정말 기억이 안 나요. 미안해요.”
도윤씨는 더 눈물을 흘렸다. 천장을 보며 헐떡이며 울었다. 그 숨넘어가는 소리가 위태롭게 들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렇지만 도윤씨가 손을 휘저었다. 나와 도윤씨 사이에 투명한 유리벽같은 것이 생겼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벽을 마구 때렸다. 아무리 세게 쳐도 벽은 깨어지지 않았다.
“도윤씨.”
“...”
“도윤씨, 나 정말 미안한데...”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까맣게 지워져 버린 기억이 원망스러울 만큼 답답했다. 서럽게 울고 있는 도윤씨를 안고라도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했어요.”
간신히 울음이 잦아든 도윤씨가 헐떡이며 말했다.
“난 당신을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다들 당신이 날 찾을 거라고 했어요.”
“이젠 할 수 있어요. 당신이 가르쳐줬잖아요.”
“그런데 당신, 날 사랑하면서도 당신 감정에 취했잖아.‘사랑을 잃어버린 나’에 취해서.”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도윤씨의 이어진 이야기는 참담한 상처 그 자체였다.
“내가 도망갔을 때, 당신이 너무 슬퍼하면서 찾기를 그만뒀다고 들었어요.”
“내가 그만뒀어요?”
“정확히는 민혁씨가 ‘사랑을 잃어버린 가여운 나’라는 자기 연민에 빠진 거죠.”
“아니에요, 난 그럴 리가...”
“당신 그래서 슬픔에 잔뜩 빠진 채 포기하고 프랑스로 갔잖아.”
“내가, 내가요?”
“정말 사랑한다면 그렇게 빨리 포기하지 않았어. 당신 정말 너무 빨리 포기했어요.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나는 불어를 읽을 수 있었던 나를 기억했다. 도윤씨가 완벽하게 내 기억을 뿌리까지 지우지 못했다는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불어가 기억난다거나, 과거 친구들의 이름이 조금 기억이 난다거나. 하지만 이게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날 놓치지 않을 거예요.”
“도윤씨. 잘 들어봐요. 그 조각들을 돌려준다고 해서 나쁜 일이 일어날 건 없어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민혁씨.”
도윤씨가 흐흐, 거리며 웃었다. 눈물과 함께 눈 밑이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입술이 사정없이 뜯겨져 나가는 도윤씨는 처연을 넘어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윤씨는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힘없이 기대앉았다. 도윤씨가 걸쳐 입은 내 셔츠 한 장이 유리벽에 눌려 구겨졌다. 나 또한 유리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윤씨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다.
“다시 말할게요. 난 여섯 번을 회귀했고, 당신은 매번 같은 곳에서 날 버렸어요.”
“여섯, 번, 이요...?”
“당신, 나는 매번 억지로 헤어졌었고, 당신은 날 찾지 못했죠. 아니, 찾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세 번은 당신 가족들에게 죽었고, 두 번은 외로움에 미쳐야 했어요. 자살도 했었죠.”
나는 도윤씨의 외로움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단 것을 깨달았다. 손을 뻗어 떠올린 도윤씨의 외로움은 맑은 물보다는 시커멓게 피처럼 떨어지는 진흙과도 같았다. 도윤씨는 이제 나를 바라보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기회가 왔어요. 관리자라는 기회가.”
도윤씨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저 작은 머릿속은 이미 불행으로 사고가 정지해버릴 정도로 녹아내렸던 적이 있었다.
“도윤씨...”
“왜요.”
“이런 질문하고 싶지는 않지만... 혹시 회귀하면...”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여섯 번의 삶 모두.”
하, 짧은 비웃음과 함께 도윤씨가 뒤돌아보았다. 새빨갛게 힘이 선 눈의 핏줄이 보였다. 또렷한 눈이 이제는 무섭도록 선명해 보였다. 도윤씨의 원망이 어린 눈빛에 나는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도윤씨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제야 숨이 트였다.
“내가 관리직을 잘 수행하면, 그들은 나에게 당신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들이요?”
“만나봤잖아요.”
“누구요.”
피식하고 바람빠지듯 웃는 소리가 났다.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건 똑같다니까. 도윤씨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잠시 흔들었다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얼굴을 흐리게 한 건 감정을 무디게 하는 일종의 마법이에요. 그걸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어요.”
“...”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번째 당신을 만났을 때 또 첫눈에 반했다는 게 정말 싫었어요. 그거 알아요? 내가 정말 모든 순간, 당신을 사랑했다는 거. 증오하기 시작하던 그 순간조차.”
도윤씨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뒤돌아 앉았다. 도윤씨는 방금과는 달리 조금 진정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도윤씨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이 번진 자국 따라 붉어진 살결과, 상기된 뺨. 이로 짓씹어 방금 터진 입술. 그리고 환하게 웃는 표정이 있었다. 나는 그 표정에 한 줌의 무거움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도윤씨를 중심으로 일그러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이제 우리는 여덟 번째 만나요, 민혁씨.”
“저와 함께 환생하는 겁니까?”
“맞아요.”
“이젠, 이젠 안 그럴게요.”
“안 믿어요.”
“도윤씨, 당신이 변화시켜줬으니까 할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을...!”
“여덟 번째의 나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릴 거에요. 어쩌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죠.”
“네?”
“당신은 지금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나를 찾아야 할 거에요.”
“어떻게요?”
“내가 가르쳐줬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알려줘요. 내가 당신을 다시 봤을 때 알 수 있어요?”
도윤씨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조각들은 내가 가지고 있을 거니까요. 운명적으로 끌릴 거에요.”
“그 때 처럼요?”
“날 찾지 못한 채 평생 무언가가 결핍된 인간으로 살 건지...”
“....”
“아니면 날 찾아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지는, 알아봐야죠.”
“다 끝났어? 도윤아?”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앉아 있어 보지 못했지만 도윤이 쪽 유리벽에는 이한율이 서 있었다. 이한율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도윤이를 팔로 안아 공주님을 안아 들 듯 들었다. 이한율도 공인지라, 도윤이는 쉽게 안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 유리벽을 미친 듯이 쳤다.
“어이구 무서워라. 그거 그래 봤자 안 깨져.”
이한율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도윤씨의 귀에 대고 무언인가를 속삭였다. 이윽고 도윤씨가 축 늘어졌다. 도윤씨의 사지에 힘이 빠지자 이한율은 도윤씨를 걸레짝처럼 던져버렸다. 힘없이 도윤씨가 기괴하게 떨어졌다. 나는 미친 듯이 유리벽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죽여버릴 거야, 이한율!”
“못 죽여. 이제부터 넌 환생해야지. 도윤이 잡으러 안가?”
도윤이란 말에, 내가 멈칫했다. 그 순간이였다. 눈 앞이 하얗게 튄 것은.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