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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4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24/82)

00024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나는 내 주위로 수없이 펼쳐진 관계도를 보고 있었다. 도윤씨가 손을 들고 휘젓자 나를 중심으로 수많은 실선이 생겨났다. 마치 별과도 같은 모습에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재계에서 한 가닥 한다는 나의 가족들이 세운 기업과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도윤씨는 그 중 몇 명을 끌어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추격 영역 시험 기억나요, 민혁씨?”

“기억나죠.”

3교시 실기까지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도윤씨가 나에게 가장 공들여 가르친 부분이라 유독 잘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도윤씨는 너무 꼭꼭 숨어서 공조차 찾을 수 없었던 도망수였으니까. 아마 자기 같은 사람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 싶었다.

“추격하려면, 광공은 인맥이 좋아야 하거든요.”

“좋을 수밖에 없겠죠?”

“물론 사업적으로는 당신에게 굽히고 들어오는 사람이 많을 거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에요. 제가 말하는 쪽은 좀 더 은밀한 쪽이에요.”

“은밀한 쪽이요?”

“민혁씨가 도망가는 수를 잡거나, 수를 가둬둘 때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는거죠?”

“감금영역과 추격영역에서 배운 것들을 떠올려보세요. 수를 감금해 놓기 위해서는 일단 뭐가 필요하죠?”

“감금할 공간이요. 공간이 필요하고, 수를 충성스럽게 지켜볼 감시자, 그리고 수를 잘 돌볼 고용인. 일단 그 정도가 생각이 드네요.”

“좋아요. 거기에 덧붙이자면 의사도 하나 있으면 좋겠죠.”

“의사는 집안에서 붙여준 의사가 있겠죠. 적당히 잘 말을 들을.”

“재벌가에 주치의 하나 따로 고용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죠. 병원을 직접 설립하는 경우도 있고요.”

“오. 그건 생각 못했어요. 병원은 1인실도 있으니 거기에서 감금도 가능할테고.”

도윤씨는 알겠다면서 차트를 들었다. 가면 갈수록 나는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의 재벌 패밀리가 되어가고 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이게 다 도윤씨 덕분이지만. 여튼 의사와 병실의 수배는 이 정도로 해 두는 게 충분해 보였다. 믿을 만한 의사가 없으면 병원을 지으면 된다. 이 얼마나 자본이 넘치는 생각인지.

“경호 쪽은 인맥이 있는 게 좋겠네요.”

“왜 경호 쪽만 인맥으로 해결하려고 하죠? 오히려 그 쪽이 더 돈으로 해결하기 쉬울 것 같은데요.”

도윤씨가 시험하듯 말했다. 예전이었다면 그렇냐면서 수긍했겠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달랐다. 나는 도윤씨의 추격영역과 감금영역 모의고사와 시뮬레이션을 통과했단 말이다. 거기에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밥 챙겨주는 고용인과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은 특유의 순진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가 너무 착한 일반 사람처럼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광공이 수를 감금하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수가 학대받는다고 생각한 경호원이 경찰에 고용주를 신고할 수는 없고, 차선책으로 간접적으로 탈출에 조력하는 경우가 있었다.

밥을 챙겨주시는 고용인 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국의 정, 그 근원은 밥심에 있었다. 도윤씨가 감금영역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진짜 엄청나게 주의를 준 것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수를 굶기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첫 시뮬레이션 때 귓등으로도 안 듣고 밥을 안 먹겠다는 수를 그래 너 먹지마라 굶겨보았다. 결론은 밥을 챙겨주는 한국의 정이 충만한 고용인의 분노로 되돌아왔다. 이 가녀리고 비쩍마른 청년을 어떻게 챙겨주지 않냐며 탈출엔딩이 난 것이다. 물론 잘 먹여도 탈출시켜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경호원, 밥 주는 고용인은 나와 돈 이상으로 얽혀있으면 좋아요. 정 뭣하면 내가 그분들의 자녀들 학자금이라도 대 주고 있어야 해요.”

“그건 좋은 선택이네요. 역시 민혁씨가 시뮬레이션을 열심히 돌린 성과가 있어요.”

“그럼 민혁씨, CCTV설치나 도청기 뭐 이런건요?”

“지금 말한건 돈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럼 설치했다고 쳐요. 내내 보거나 듣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비서에게 시키면 될 거에요.”

“비서가 신고하면?”

“이런 말이 있어요, 도윤씨.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해결할 만큼 돈이 많지 않은 거라고요.”

아 좀 멋있었다.

“그거 아리아나 그란데 아닌가요? 왜 무슨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취소한다.

“아 어쨌든 사실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결론은?”

“연봉 올려달란 말인데요.”

“그 연봉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200억이 뉘 집 개목걸이 가격도 아니고. 집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빌딩도 몇 채씩 가지고 있을 거면서 엄살은.”

“여튼 그럼 수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있는거죠?”

“경호원 중에 몇 명은 있겠죠. 혹은 비서나. 혹은 집사나.”

“그럼 어쨌건 괜찮아요.”

“괜찮다구요? 충분한 게 아니라? 수가 도망갈 수도 있는데?”

“요는 수가 도망치는 걸 막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다시 잡아오는 거지.”

나는 숨을 멈추었다. 도윤씨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사람들은 수를 잡아오라고 했을 때 똑똑한 내 지시를 잘 따라줄 정도의 지능만 있으면 됩니다. 너무 멍청해서 지시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에요.”

도윤씨의 목에다 시선을 덕지덕지 덧칠했으며,

“그리고 내가 몸을 일으켜 움직일 때, 적당히 동정심이 있어서 수를 해치지 않으면서 잠시 잡아줄 정도의 시간만 벌면 되고,”

그 시선을 끌어 도윤씨의 팔목을 훑어 내려가,

“내가 적당히 잡을 수 있게 무대만 만들어준다면.”

도윤씨 얼굴 앞에서 박수를 딱, 소리 나게 쳤다.

“마지막 걸음은 내가 걸어요. 직접 잡을 거란 뜻이에요. 다른 놈 손에 안 맡기고.”

도윤씨는 내 호흡을 따라오다 긴장했는지 내 말이 끝나자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도윤씨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광공이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윤씨가 미처 말해주지는 않은, 이 존재는 수에 대한 감각 하나만은 동물에 가깝게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위 말하는 ‘감이 좋다’라는 표현이라고 할까.

수가 도망친다. 그렇다면 집 앞에서 적어도 이유 모를 위화감을 느껴야 한다. 수의 자동차와 공이 탄 자동차가 우연이라도 엇갈린다고 하면 고개쯤은 돌아봐 주어야 한다. 수가 공을 피해 책상 밑에 숨었다면 책상을 두드리는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한 번은 놓칠지라도. 그 사람을 향해 온 사랑과 다정함이 쏠려 있다면 그것은 기본 소양이었다.

그리고 나의 광공적 세계는 한 사람을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였음을.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사람이 변하기 힘들다고. 그렇다면 한 사람 덕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변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이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나는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도윤씨는 도망수답게 자꾸 도망치고 있다. 도망은 그저 물리적인 거리만이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내가 도윤씨에게 한 걸음 다가갈 때, 도윤씨는 한 걸음만 물러선다. 온 팔을 휘젓고 크게 소리를 쳐가며 물러나는 통에 다 티가 나는 게 귀여웠지만 괘씸했다. 지금까지는 딱 한 걸음, 그 차이를 두고 적당히 도망갔으니, 한 번에 뛰어 그 간격을 좁힐 때였다. 나는 도윤씨의 팔을 낚아채고 도윤씨를 팔 안에 힘껏 안아 가두고는 말했다.

“듣고 있어요, 도윤씨? 내가 직접 잡을 거라고요. 지금처럼.”

“...민혁씨?”

“언제까지 말 빙빙 돌리면서 도망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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