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도윤씨와 키스 연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는 이미 놓쳤다고 알고 있었다. 도윤씨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입가에 맴도는 도윤씨의 향을 좇았다. 시가는 피운 뒤에도 남아있는 향과 맛으로 즐기는 것이라 하지만, 방금 전 키스할 때 느꼈던 도윤씨의 살내음보다 더 강력하지는 않았다.
나는 일어나 도윤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전과는 달리, 한치의 틈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돈된 에스코트였다. 도윤씨는 내 손을 불안하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올려놓았다. 내 손끝에 도윤씨의 손목이 닿았다. 부드러운 피부 사이로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도윤씨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도윤씨는 내가 도윤씨의 맥박을 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피부 밑에서 뛰고 있는 작게 꿈틀거리는 감각에 내 심장도 조금 더 뛰기 시작했다. 나는 모른 척하며 도윤씨가 주었던 리스트 중 하나를 떠올렸다. 이대로 손을 잡고 말을 계속 하고 싶었다.
“근데 도윤씨.”
“네.”
“광공은 군대를 다녀왔음. 이거 뭔가요.”
“수랑 맺어지려고 하는데 입대 때문에 끝나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아니 그럴 수도 있죠.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 줄 수도 있는 기회....”
“그렇지만 18개월 동안 고작 몇 번 면회하고 함께 붙어 있을 시간이 적잖아요.”
“그런가요...?”
“아니 수와 공이 떨어져 있고 싶으면 차라리 해외를 가야죠. 출장이나 파견이나.”
“......”
“공 머리 입대하려고 빡빡 미는 것도, 아니 밀어도 엄청 멋있긴 하겠지만요, 그거 알아요? 머리가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건 학계의 정설이에요.”
“할리우드 배우 중에 머리 없는 사람들 있어요. 멋있는데. 아니 그전에 무슨 학계입니까?”
“관리자 간에도 포럼을 개최해 나름대로 좋은 공과 수를 배출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성실하시군요.”
이대로 간다면 도윤씨는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도윤씨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자 나는 손을 놓았다. 손을 놓자마자 도윤씨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미필자? 미필이면 신경 쓰이잖아요. 미필이면 그냥 신경이 쓰이게 된다구요. 왜 미필이지? 이러면서.”
“박사학위 따느라 미필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대답을 하는 상황 자체가 싫은 거예요!”
“그냥 깔끔하게 다녀왔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저는 연예인만 군대가 큰 걸림돌인 줄 알았는데...”
“공과 수가 맺어질 때 보통 군대에 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어요.”
“그렇군요.”
“전 군필로 보통 깔끔하게 해결합니다.”
“아닌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군요.”
“관리자에 따라서 방금 했던 민혁씨 말 대로 그들이 넘어야 할 큰 과제로 남겨놓아 더욱더 사랑을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다른 요소로 사용하시는 분들도 많구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요.”
“하지만 전! 그 시간에 둘이 좀 더 붙어 있어서 지지고 볶고 뮤직비디오를 찍었으면 좋겠어요. 군대 갈 시간에 둘이 한 번이라도 침대에서 뒹굴어라! 차라리 싸워라. 이런 것이 좀 더...”
도윤씨는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알겠어요, 도윤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씨는 진심이었고 나는 도윤씨의 의견에 재빨리 찬성, 아니 복종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꾸었다. 도윤씨의 표정은 예전에 맞춤법으로 수를 작살냈던 광공에 대해 이야기할 때랑 비슷해 보였다.
아마도 무언가가 군대와 관련해 큰일이 있었던 거겠지. 덕분에 학위가 두 개나 되는데 군대까지 다녀온 이 세상에 둘도 없을 사기 캐릭터가 되었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나의 계획에도 좋은 것이, 도윤씨를 어찌저찌해서 나와 함께 환생하는 단계를 밟았는데 입대 영장이 나오면 나야말로 진짜 환장할 노릇이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민혁씨.”
“네?”
도윤씨의 눈이 아직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왜 이런 줄 알아요?”
“광공은 VVIP카드와 현금 소량만을 소지하고 다닌다...이게 어때서요?”
도윤씨는 나에게 로고도 달려 있지 않은 얇은 지갑을 내밀었다. 어떠한 로고도 달리지 않았지만 직감 상 이것이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오더메이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얇은 지갑을 열어보니 거기엔 한국과 해외에서 쓸 수 있는 검은색 카드가 들어있었다. 경제적 능력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급이 되어야 쓸 수 있다는, 소위 말하는 블랙카드였다. 그리고 안쪽을 보니 현금이 조금 들어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현금의 양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왜 현금 소량이 들어있어요?”
“그것도 사연이 많아요.”
“말해줘요.”
“재벌공이었는데 여기서 교육을 받았어요. 물론 환생도 했구요. 당연히 현금을 들고 다녔겠어요? 블랙카드 한 장이면 충분했죠. 그리고 현금이 필요하면 비서에게 달라고 하면 되고요. 여기까지는 대충 알아듣겠죠?”
“네.”
“문제는 비서 없이 수를 쫓아갈 때 발생했어요. 평범한 수가 버스를 탔거든요.”
“그런데요?”
“카드가 교통카드가 아니었어요.”
나는 그 순간 수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 블랙카드에 교통카드 기능을 넣어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을까? 없을 것 같다. 자기 차에 운전기사까지 고용해서 다니는 사람들이 무엇하러 버스와 지하철을 탈 준비를 할까. 나는 버스에서 쫓겨나 창밖으로 비맞은 갈색 푸들처럼 서 있는 광공이 절로 생각났다.
“못탔나요?”
“탔어요. 그게 문제였죠.”
“예?”
“대한민국 경범죄 처벌법 제 3조. 무임승차 및 무전취식. 영업용 차 또는 배 등을 타거나 다른 사람이 파는 음식을 먹고 정당한 이유 없이 제값을 치르지 아니한 사람은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科料)의 형으로 처벌한다.”
“아...”
“사상 최초였죠. 마피아공이라 중형을 산 사람도 있고 살인죄로 중형을 산 광공은 있었어요.”
“예...”
“하지만 저런 경범죄로 신고되서! 경찰에 끌려간 광공이 있었어요!”
“얌전히 끌려가 주던가요?”
“수가 신고했어요.... 수가... 따라오지 말라고... 무임승차로...”
“결말은요?”
“공이 그 버스회사 샀어요. 화나서.”
도윤씨의 표정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공의 멋드러짐이 밑바닥이 없어진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사례를 말해 줄 때마다 도윤씨의 표정도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사례는 나도 조금 가슴이 아팠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갑 속 현금이 소중해보였다. 도윤씨는 웬만하면 나보다 가난하게 환생할 텐데, 이런 상황을 대비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나는 지갑을 소중하게 챙기며 흥얼거렸다.
“지→갑↗을↘ 챙겨야지~”
“아니 민혁씨! 오늘 왜 이래요?”
“예?”
“어디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거 아니에요?”
이상한 생각 하고있는 건 맞지. 도윤씨를 내 세계의 수로 환생시킬 생각. 그 생각만 하면 절로 노래가 나오는데 어쩌겠나.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고 드러내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조금 찔려서 움찔거렸다. 그러자 도윤씨의 매서운 질책이 들려왔다.
“그런 말이 있어요. 젊은이와 아저씨의 구별법이라고.”
“네.”
“같은 일을 해도 아저씨는 노래를 부르면서 한다구요.”
“제가 노래했나요?”
“너무 아니었어요. 아주 아니었어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나는 분명 방금 전 까지는 도윤씨의 입에 시가의 잔향이 섞인 키스를 하면서 입맞춤을 한 것 같은데, 지금은 도윤씨에게 지갑을 챙기면서 아저씨같이 굴었다고 야단맞고 있었다. 이 급격한 분위기의 변화에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도윤씨가 억지로 과장해서 굴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우니까, 쑥스러우니까,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계속 이렇게 화제를 돌리며 겨우겨우 교육을 마무리하고 나를 환생해서 보내버리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모르면 바보 아닌가?
나는 일부러 더 화내고, 일부러 더 흥분하고, 일부러 더 과장해서 말하는 도윤씨의 등을 바라보았다. 한 번, 좋게 말해서 두 번까지는 넘어가 줄 생각이지만 세 번째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도윤씨는 다시 차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작은 머리통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