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도윤씨, 제가 광공이 고도로 발달한 수행자란 말을 하긴 했지만요."
"말이 씨앗이 되었네요."
"그렇다고 통각이 부족하단 말을 들은 적은 없었는데요."
나는 도윤씨의 리스트를 한 손에 들고서는 앞을 바라보았다. 대리석 바닥에 크리스털 잔과 와인잔이 깨져 유리조각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고, 유리조각 건너편에 도윤씨가 있었다. 도윤씨는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이리 오라고 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도윤씨에게 걸어갔다. 맨발에 유리가 밟히는 느낌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도윤씨가 걸어준 보호막 덕분에 도윤씨 말대로 발에 유리가 사정없이 난도질당하지는 않았지만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인도의 고행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광공은 화가 나면 여기 위도 막 걸어온다니까요."
도윤씨는 광공이 수에게 직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 위를 거침없이 걸어오는지에 대해 말했다. 나의 선배 되시는 분께서는 엄청난 완력으로 얼음 조각상을 박살낸 적이 있는데, 산산조각이 난 얼음밭을 밟고 수를 잡는 연출도 해 보였단다. 그리고 어떤 분께서는 작살낸 방 안에서 수와 밤새 뒹굴었다는 분도 계시고. 안전이라고는 보장받지 못하는 연봉 100억의 사나이는 저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었다.
"혹시 불 위를 걸었던 분도 계시나요?"
"자기가 불 태운 집에서 수를 꺼내오려고 등짝에 화상까지 입은 분도 계시죠."
"그럼 애초부터 불을 왜 질러요?"
"수가 도망갈거라고 생각해서요."
나는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 가여워했을텐데. 하지만 그들이 미치는 논리를 이제 슬슬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규칙을 언급할때 늘 도윤씨는 한 마디를 덧붙이곤 했으니까. 수랑 같이하면 또 모를까요. 수랑 하면 괜찮아요. 수는 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들의 세상이 다채로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 도윤씨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뭔가 민혁씨도 조금 광공 새싹같아졌네요."
"이왕이면 나무로 해 주시죠."
"아직은 모자라요."
그렇게 말하며 도윤씨가 준 리스트에서 한 가지를 지웠다. 광공은 통각이 부족하단 이야기를 이제는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쭉 살펴보다 또 하나를 소리내어 읽었다.
"광공은 담배를 피우려거든 가급적 시가나 연초만을 허용합니다. 이건 뭔가요?"
"그건 민혁씨가 재벌이라서 그런 것도 있어요."
"아니 그냥 담배 피우면 어디 덧나요?"
"피울 수는 있는데, 시가라는 좋은 아이템이 있잖아요."
"전 시가 한번도 안 피워봤어요."
"기다려봐요. 차트로 손 봐줄게요."
도윤씨는 차트를 꺼내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아마 이제 나는 시가도 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겠지. 도윤씨의 차트는 여전히 먹칠을 해 놓은듯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도윤씨가 그 조그만 고개를 쳐박고 열심히 쓰는 모습을 감상했다. 도윤씨의 부드러운 잔머리가 목에서 살랑거렸다. 그 목덜미에 이를 박아넣듯이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 도윤씨가 때마침 타이밍 좋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살짝 입술에 힘을 주었다가 뺐다. 아쉬웠다.
"생각해 봐요, 민혁씨. 전자담배 피우는 공을."
"그게 뭐 어때서요."
"일단 액상을 붓는거에요. 그러다가 흘리죠."
"고용인이 해 줄거라면서요."
"그러긴 하겠지만...그리고 전자담배 액상이 자몽향이나 메론향이 나면 어떡해요."
"누구씨...이렇게 부르는데 저한테서 과일바구니 향이 나겠네요."
"그럼 수가 그러겠죠. 민혁씨 전담하고 왔어요? 이러면서."
"생각해보니 전자담배로 뭔가 피우면 시가 태우는 모습보다 멋있지는 않겠네요."
"시가보다 옹졸한 맛이 있죠."
"한 번 피워보죠."
도윤씨는 먼저 담뱃갑을 내게 던졌다.
"아참, 그리고 광공은 담배쩐내 안나요."
"그게 가능해요?"
"원래 끊었지만 수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때나 필 거니까요."
"제 수 되실 분은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요."
"광공이랑 어울리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요?"
나는 피식 웃었다.
"어디 도망이라도 가던가요?"
그러고는 도윤씨와 눈을 부러 맞추었다. 언젠가는 이 관리자 자리에서 끌어내서 나와 같은 세계에 환생하게 끌어 내려 버릴 거란 속셈을 가득 담아서. 일전에 도윤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 저 차트에 관리자가 위험하다는 말을 썼더니 이한율이 나타났던 적이 있었다. 잘만하면 저 차트는 다른 관리자 뿐만 아니라 도윤씨나 이한율 보다 더 높은 관리자도 부를 수 있는 창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도망을 잘 치는 도윤씨는 이런 내 생각을 전혀 모르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잘 치겠죠. 보통은. 그래서 감금영역에 추격영역까지 가르친 거구요."
"그렇군요."
나는 담뱃갑을 열었다. 그리고는 도윤씨가 키스 후 나에게 갑자기 사라지던 때를 떠올렸다. 미간이 좀 더 진하게 찌푸려졌다. 담뱃갑을 뜯어 연초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마시자, 엄청난 기침과 함께 쿨럭거렸다. 도윤씨는 당황한 듯 차트를 바라보다가 손을 휘저어 내 손에 끼워진 담배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
"쿨럭...아니 왜 이래요? 차트에 썼다면서요!"
"제가 생각했어야 했는데...아무래도 생각해보니 전생에 담배를 안 피웠을 것도 같네요. 생각해 보니. 미안해요."
도윤씨는 서둘러 차트에 무언가를 더 써내려갔다. 곧 몸이 괜찮아지고 도윤씨가 내게 다시 한 번 담배를 권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담배 한 대를 빼 담배에 불을 당겼다. 희뿌연 연기가 무대효과처럼 내 얼굴 사이로 피어올랐다. 도윤씨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광공들 잘 생긴건 알고 있지만, 진짜 담배피는 모습까지 감탄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래요? 정작 전 담배는 취향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데."
나는 담배연기를 살짝 들이쉬며 깊게 내뱉는다. 흰 연기 사이로 도윤씨가 살짝 가려졌다. 마치 몇 초 짜리 안개에 가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이라도 가려지는 도윤씨의 모습이 예뻤다.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담배를 비벼 끌 곳이라곤 바닥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꿇어앉아야 했다. 그 모습을 도윤씨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광공 같지 않을 테니까. 나는 왼손을 들어 손 중앙에 담배를 짧게 비벼 끄고는 꽁초를 휙 던지고 도윤씨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했어요?"
"담배 껐어요."
"미쳤어요?"
도윤씨는 놀란 듯 내 왼손을 잡아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올라 화상을 입은 손에 도윤씨가 슬쩍 문지르자 상처가 사라졌다. 도윤씨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아니 광공이 문신을 할 수도 있고 상처도 있을 수 있긴 한데..."
"화났어요?"
"설정값도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담배를 비벼꺼서 흉터를 만들어 놓으면..."
"없어졌잖아요."
"환생하고서도 그럴 것 같아요?"
"환생해서 안 그러면 되죠."
나는 씩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도윤씨의 양손을 낚아챘다. 내 손이 커서 그런가, 손을 조금 크게 벌리니 도윤씨의 양손을 동시에 잡을 수는 있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
"시가도 피운다면서요."
"아, 알겠어요."
도윤씨는 그렇게 말하고 팔을 휘둘러 검은 소파 두 개를 만들어 냈다. 거기에 앉아 있자 도윤씨가 만들어 낸 인상이 흐릿한 고용인들이 와서 내게 시가와 길로틴 커팅기를 가져다 주었다. 최고급 쿠바산 시가였다. 도윤씨가 해 놓은 차트 작업 덕에 나는 능숙하게 시가를 커팅했다. 그리고는 긴 성냥을 들어 시가에 불을 붙였다. 불을 느릿하게 시가에 옮겨 붙었고 나는 흔들리는 불꽃에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많이 놀랐어요?"
"조금요...?"
"기쁘네요."
"네?"
"유리조각을 밟았던 그 사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였어요."
도윤씨는 잠시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나는 습관적으로 도윤씨의 얼굴을 또 바라보았다. 도윤씨가 볼 안쪽에서 입술을 살짝 무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잘못된 모양이지.
이한율은 자신은 마음 약한 사람이 아니라서 얼굴을 흐리는 것 따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날 사랑할 리도 없다고 했고. 관리자가 먼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얼굴을 흐릴 필요도 없다고 했다. 시가에 천천히 붙는 불이 잠시 나에게 그 말에 대해서 더 생각할 시간을 준다. 도윤씨는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건 내게 첫눈에 반해서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두려웠던 걸까? 무슨 마음이었길래 그렇게 처음부터 꼭꼭 숨겨와야 했을까. 도윤씨는 왜 '많이 해 봤다던, 고작 키스 한 번'에 그렇게 자리에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달아나야 했을까.
"이제 시가를 입에 물어 피워 봐요."
"네, 도윤씨."
나는 천천히 시가의 연기를 빨아들였다. 독특한 향이 코와 입 안에 맴돌았다. 나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히고 다리 한쪽을 꼬았다. 그리고는 차트를 살펴보는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아마 도윤씨는 내게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걸 모를 수는 없다. 도망수 출신 답게 도윤씨는 도망은 잘 치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에는 약해 보였다. 감정을 숨기는 것도, 거기에 대처하는 법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도 손 사이로 줄줄새어나오는 감정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시가를 태우는 동안 도윤씨가 내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곱씹어 음미했다.
시가가 삼분의 일 쯤 남았을 때 나는 그것을 재떨이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도윤씨의 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도윤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도윤씨를 잡아 이끌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남은 시가가 타는 향기가 났다. 도윤씨의 입 속에서도 내가 피운 시가의 향이 배였다. 나는 입술을 떼고 도윤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가가 맛있어서, 도윤씨는 어때요?"
"향이 좋네요."
도윤씨는 턱을 약간 들며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 보이는 걸. 조금 더 세게 다문 입술과, 떨리는 눈꼬리와, 달라진 동공의 크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