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나는 느리게 입술을 문지르고, 도윤씨는 침묵을 지켰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같은 고요함이 우리 둘 사이에 있었다. 나는 늘 하던 버릇대로 도윤씨의 표정을 살폈다. 도윤씨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약간 찡그린 듯 하면서도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입술을 약간 벌어져 있었다. 심각한 듯 보였지만 어딘가 풀린 듯한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간단할 거면서..."
"뭐가 간단해요?"
"입맞춤이요."
도윤씨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윤씨의 시선을 받은 나는 잠시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도윤씨는 나에게로 똑바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직진으로 날아오는 야구공 같은 눈빛은 마치 원망하는 것 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도윤씨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도윤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윤씨는 하, 하고 짧게 웃더니 잠시 마른세수를 하고서는 나를 바라보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읽어보세요."
나는 찬찬히 종이를 읽어내려갔다. 거기에는 열 가지 정도의 규칙이 쓰여져 있었다. 아직 내가 배우지 않은 광공의 모습들인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열네가지의 규칙을 읽으며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이 어느새 백 가지 즈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읽고 난 뒤에 도윤씨에게 그것을 돌려주었다.
"갑자기 이건 왜 읽으라고 한 거에요?"
"그것까지 배우면 이제 당신은 끝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죠?"
"제가 가르칠 만큼 가르쳤다는 뜻이에요."
"아직 배울 게 더 남은 것 같은데요."
"민혁씨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도윤씨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인가요?"
"그건 왜 묻죠?"
"도윤씨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매달려봐야죠."
"빨리 끝내달라고요?"
"아닌 거 알잖아요."
나는 천천히 걸어가 도윤씨의 뺨을 쓸어올리듯 잡았다.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도윤씨가 내 키를 정해준 적이 있었다. 그 때 198센티미터로 급격하게 커지는 바람에 시야가 달라졌었다. 커진 키로 도윤씨의 동그랗고 조그만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그게 그만 생각보다 너무 작고 예뻐서 감싸듯 잡은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조금만 힘을 주면 으스러질것 같은 꽃장식 같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도윤씨는 연약해보였다.
연약한 것을 쥐기 위해서는 힘을 무작정 빼는 것이 아니다. 힘을 빼기만 하면 연약한 것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듯 빠져버린다. 그렇다고 힘을 손가락 끝에만 주어 잡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볼썽사납게 찢어지듯 부서져버리는 것이다. 손바닥과 다섯 손가락 마디마디에 모두 힘을 적절히 주어 긴장한 상태여야 한다. 따뜻한 손으로 살얼음을 들어올리듯 굴어야 하는 법이다. 지금 도윤씨의 뺨을 잡은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도윤씨는 내 손에 적절하게 편하게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요."
"제가 여기 있도록 도윤씨가 마음을 바꾸게 될 거라면?"
"그럴 일은 없어요."
"왜요?"
"당신의 사랑을 외로이 혼자 두게 하지 못해요, 전."
"내 사랑을요?"
"전 그럴 사람이 못 돼요."
도윤씨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한율이 말해준 것을 토대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마 도윤씨는 공에게서 도망가 혼자인 그 시간동안 너무나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씨는 언젠가 공이 자신을 찾아줄 거라는 희망도 놓치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거겠지. 나는 그렇게 도윤씨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며 일단은 도윤씨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나는 도윤씨가 내밀었던 리스트의 첫 번째 목차를 떠올렸다.
"광공은 취하지 않는다, 였죠?"
"제대로 읽어봤네요."
"그럼 술을 먹어보죠."
손 안에 들어온 도윤씨가 얼굴을 작게 끄덕였다. 나는 손 안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을 느끼며 손을 내려놓았다. 도윤씨는 내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각종 술이 놓인 긴 테이블과 둥근 얼음이 든 아이스버킷이 나타났다. 나는 술을 둘러보았다.
"소주는 없나요?"
"광공은 소주랑 맥주 금지라고 했잖아요. 39번째."
"아, 기억나요. 레스토랑에서였던가?"
"잘 기억하네요."
나는 온더락으로 발렌타인 40년산을 크리스털잔에 따랐다. 술을 한 모금 들이키자 좋은 향과 함께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 들어온다. 나는 술을 흔들어 향을 느끼며 마셨다. 도윤씨는 오렌지빛이 나는 음료를 들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도윤씨 손에 든 그건 뭐에요? 칵테일?"
"오렌지주스요."
"나는 술마시는데 옆에서 주스요?"
"당신만 취하라는 이야기죠."
"억울하네요."
"원래 수 출신들은 술에 강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공은요?"
"공은 말술이죠. 광공이면 더더욱 그렇고요."
도윤씨는 손가락을 빙빙 돌려 양주 두세병을 내 앞에 놓았다.
"민혁씨는 이거 다 마셔도 아마 취하지도 않을거에요."
"이걸요?"
"괜히 제가 말술이라고 한 게 아니에요. 정말 취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취하지 않아요."
나는 도윤씨가 내게 알려준 규칙을 떠올렸다. 이름도 멋있어야 하고, 정장을 입어야 하고, 냉장고에 냉동식품도 없고 물 뿐이고, 야식도 못먹는데 저탄수 무지방의 지옥의 식단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손끝 하나까지 허투루 못 쓰는데 핸드폰게임은 커녕 컴퓨터 기본 게임인 프리셀도 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욕도 못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지키면서 술도 취할 수 없는 삶을 살다니.
"광공은 그런 삶을 살면서 취하지도 못한다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그러합니다."
"제 삶은 황야에 떨어진 수행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군요."
"미치기 좋은 환경이죠."
"광공의 광은 미칠 광이었나요?"
"이제 알았어요?"
도윤씨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계속 술을 권했다. 엄청난 말술이라 술이 취하지 않는다는 말에 궁금해져서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먹었는데도 취기가 미미하게 느껴졌다. 엄청난 속성이었다. 무협으로 따지자면 만독불침이라고 해야할까, 술을 패션으로 먹을 수 있을 법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술을 들이키며 도윤씨가 건네준 리스트를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도윤씨, 광공은 잠도 적게 자요?"
"그런 편이죠."
"근면해야 한다는 게 그 뜻이었나..."
"누가 그래요?"
"이한율이요."
"아, 한율이가요?"
"네. 그런데 그 뒤에 설명을 안 해줘서요."
"근면해야 한다는 건 그런 뜻은 아닐거에요."
"그럼 잠을 적게 자는 건 무슨 뜻인가요?"
"광공은 인간의 3대 욕구도 좀 절제되어 있다고 해야하나... 억눌린 삶을 살죠."
"그럼 광공은 배 안고파요? 꼬르륵 소리도 안나요?"
"배고프다고 밥을 허겁지겁 먹는 일도 없죠."
"광공이 배고픔을 못 느끼나요?"
"네."
"그럼 광공이 아사하지 않나요?"
"걱정 마세요. 비서나 고용인들이 빠짐없이 챙겨줄 거니까요."
"그럼 수면욕은요?"
"잠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기야 하겠지만 어디 가서 꼴사납게 머리를 흔들며 꾸벅꾸벅 졸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 정도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혹시 모를까, 불면증이라도 있을 수 있죠."
"광공은 병 없다면서요?"
"불면증은 광공 바이 광공이에요. 걸릴 수도 있어요."
"좋아요. 그럼 수면욕이랑 식욕은 그렇다 치고, 배설욕은요?"
그 말에 도윤씨는 다시 침묵했다. 방금 전 키스 직후의 침묵과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언가 성질이 다른 침묵이었다. 도윤씨는 흡사 무언가를 깊이 애도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급똥이나 오줌보 터지는 해프닝이 없는 삶이라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건 좋은거잖아요. 그런 의미로 배설욕이 절제되어 있나요?"
"그렇다기 보다는... 아무튼 화장실 갈 때 휴지가 혹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잘 챙겨가세요."
"그...그게 무슨 말이죠?"
"민혁씨가 그.... 이제부터... 볼일을 보실 때 이제 사방 100미터 내로는 사람따위는 얼씬도 하지 않을거에요."
"그게 가능해요?"
"가능해요. 마치 온 세계가 힘을 모아 당신의 화장실 상황을 외면하는 것 같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화장실에 청결 외의 목적으로 들어간 광공은 아무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란 뜻이에요."
도윤씨는 굉장히 정중하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어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아마 겪어보면 무슨 일인지 알거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의 허리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나는 도윤씨의 미묘한 제스쳐에 들고 있던 술을 한잔을 몽땅 입에 털어넣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