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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0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20/82)

00020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내 말 속에 잔잔한 가시를 가득 담아 도윤씨를 바라보며 잘 쉬고 왔냐고 말했다. 도윤씨가 가시가 들어있는지 모르고 내 말들을 자꾸만 삼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삼키고 삼키다보면 작은 가시들이 도윤씨 마음과 영혼에 가득 박혀 모든 순간마다 내 생각만 날 수 있으면 보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윤씨는 날 좋아하지 않는 척 하면서 무엇을 가르쳐 줄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윤씨."

"아, 민혁씨."

"오늘은 뭘 가르쳐 줄 거에요?"

일부러 키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자꾸 무슨 의미인지 도윤씨가 곱씹어보고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계속 머릿속에서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다 보면, 더 자세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법이였다. 예를 들자면 내가 한 손에 움켜잡은 도윤씨의 작고 동그란 뒤통수, 맥박소리를 따라 올라가던 나의 입술, 그러다 내려앉아 파고들었던 입술에서 느껴지던 여린 온기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도윤씨는 머리가 복잡해지겠지. 그런 꼬여버린 머릿속은 툭 건드리다 보면 너무 엉키다 못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오는 법이었다.

"아. 별건 아니고요. 눈을 좀 희번득하게 떠야 하는데요."

"눈을요?"

"네. 광공이 충격을 받을 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에요."

"그런 것 까지 매뉴얼이 있다는 게 놀랍네요."

"그래도 이건 좀 느슨한 규칙이라서요. 뭐뭐만 하지 마라 이 수준이라..."

"뭘 하지 말아야 하는데요."

"일단 한 번 볼게요."

"뭘 본다는 거죠?"

"...."

"도윤씨?"

"음, 민혁씨.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요."

도윤씨는 그렇게 말하고 난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도윤씨는 난처한 웃음을 지을 때 왼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버릇이 있다. 그런 도윤씨의 얼굴을 뜯어보며 도윤씨의 입술에 집중했다. 내가 찢어버릴 것 처럼 연약했던 입술을. 지금 말하고 있는 입술을.

"들었어요?"

"예?"

"또 안들었죠."

"죄송합니다."

"그럼 그냥 해 보죠. 뭐. 음."

"뭐가요?"

"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도윤씨는 손가락을 퉁겼다. 그 말과 동시에 도윤씨의 몸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도윤씨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핏줄기에 내 몸에 대각선상으로 크게 붉은 선이 그어질 정도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우뚝 멈춰섰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지독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이 공간이 기형적으로 좁아지고 길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눈의 초첨이 쉴 새 없이 흔들리면서도 도윤씨의 얼굴에 붙어있는 것 처럼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눈동자에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 앉았다. 숨막힐듯한 질식감이 내 목 끝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식은땀이 쫙 흘렀다. 나는 저린 발 끝으로 도윤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도윤씨의 얼굴을 톡 하고 쳤다. 도윤씨의 입술은 창백하고 핏기가 없어보였다.

"도윤씨?"

대답이 없었다.

"도윤씨, 지금 뭐 어떻게 된 거에요?"

나는 서둘러 도윤씨가 쓰던 차트를 찾았다. 나는 도윤씨가 차트에 무엇인가 쓰기만 하면 그게 나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내가 써도 이 공간이나 나나 변화할 것이다. 나는 차트에 관리자 비상상황이라고 급하게 도윤씨의 펜을 빼앗아 적어넣었다. 차트는 나에게는 보이지 않아서 마치 새카만 종이에 검은 펜으로 글자를 쓰는 느낌이었다. 쓰는 동안 미친듯이 손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차트에 그렇게 쓴 뒤 도윤씨에게 가까이 가 보았다. 도윤씨의 벌어진 상처를 손으로 애써 막아보려 했지만 계속 울컥거리며 피가 터져나왔다. 미쳐버린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왜 불렀...?"

"이한율!"

피를 뒤집어쓴 내가 이한율의 이름을 크게 부르자 이한율의 시선이 피를 뒤집어 쓴 도윤씨와 그 상처를 덜덜 떨며 막는 나에게 고정되었다. 이한율이 굳은 표정으로 도윤씨에게 급히 다가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장 뭐라도 해 봐!"

"야, 지금 이렇게 된 지 몇 분이냐?"

"뭐라고? 미쳤어?"

"아니 몇 분 째냐고."

"한 5분쯤?"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깨달았다. 이 정도의 출혈이 5분이면 사람은 죽는다. 도윤씨가 나에게 알려준 지식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내가 망연자실하게 피투성이가 된 손을 덜덜 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투성이가 된 손자국이 내 얼굴에 흉이 지듯 흔적을 남겼다.

"죽은거야?"

"도윤이가?"

"아니지?"

"응, 아닌데."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 나는 이한율이 날 달래려고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도윤씨의 몸에서 터져나와 나에게까지 뒤덮힌 피가 모두 증발되듯 사라졌다. 그리고 누워있던 도윤씨가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정신을 놓기 직전처럼 멍하게 서 있었다. 도윤씨는 태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다 한율씨를 보고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인사까지 했다. 나는 환장할 것 같았다.

"어, 한율아."

"민도윤. 너 이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었잖아."

"광공은 필요해."

"지나치다."

이한율은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민도윤을 보았다. 하지만 도윤씨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이한율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일어났다. 이한율은 그런 도윤씨를 보다가 먼 데로 시선을 돌렸다.

"너, 조심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한율아."

"난 간다."

그렇게 말하고 이한율은 손가락을 퉁겨 사라졌다. 아직도 놀랐던 것의 여파로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며 도윤씨가 다정하게 다가왔다. 어느새 내 옷은 편하고 큰 스웨터와 검은색 바지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도윤씨는 크고 검은 담요를 가져와 내 몸에 둘러주었다.

"광공이 극단적인 상황이나..."

"도윤씨."

"광공이 엄청나게 놀랄 때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는데요..."

"도윤씨!"

"왜요."

"방금 그거 뭐예요. 왜 갑자기 쓰러졌어요."

나는 화가 났다. 그 와중에서도 도윤씨가 가르쳐 준 것처럼 차갑게 타오르는 불처럼 화를 내는 내 자신이 우스웠다. 낮은 목소리로 긁듯이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꾹꾹 눌러 담는 것 처럼 말하되 무시하지 못할 아우라를 풍기면서. 광공에 대한 도윤씨의 가르침이 뼛속까지 깊게 배인 탓인 것 같았다. 도윤씨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건조한 시선을 주었다.

"놀랄때 어떻게 반응하려고 하는지 본 거예요."

"...왜 그렇게까지 해요?"

"콧물빼고 뒹굴고 발 휘젓지 않으면 된 거죠. 수고했어요."

"도윤씨.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요."

나는 도윤씨의 두 팔을 잡았다. 힘을 주어 잡은 탓에 도윤씨의 부드러운 살들이 밀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멍이 들 정도로 꽉 붙잡고 이상하게 굴어대는 이유를 물어볼 참이었다. 차트에 한 마디 쓰기만 하면 될 일을 가지고 지금 온 몸에서 피를 뿜어대면서 쓰러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래요, 도윤씨. 이렇게까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돼요."

"...알았어요. 내가 미안해요."

도윤씨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윤씨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사과를 끝으로 앙다문 도윤씨의 입을 보며 결국 나는 내가 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키스 때문에 그래요?"

"키스요?"

"네. 제가 키스한 거 때문에 화가 났어요?"

도윤씨는 표정을 풀었다. 그 표정은 화가 났다는 단순한 표현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슬픈 듯 하면서도 살짝은 화가 난 모양으로, 어딘가 어그러진 것 같은 표정에 나는 당황해 손을 놓았다. 도윤씨는 내가 놓았던 부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고작 그런 걸로 화가 나지는 않아요."

"고작이요?"

"제가 얼마나 많이 가르쳤는데. 키스 한 두 번 해봤을 것 같아요?"

도윤씨는 차분히 말했다. 그 점이 내 복장을 더 뒤집어 놓았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걸 도윤씨 입으로 듣는 것은 또 다른 감정이었다. 확인사살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나는 도윤씨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에는 주저함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나는 도윤씨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도윤씨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앙다문 도윤씨의 치아를 벌리고 강제적으로 키스한 직후 나는 도윤씨의 반항에 튿어진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한 사람하고 두 번 한 적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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