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무슨 생각하길래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냐?"
"별 거 아니야. 생각 좀 하느라."
나는 도윤씨가 마음에 들었다. 사랑? 그런건 아닌 것 같은데 관심이 갔다. 관리자가 사랑에 빠지면 관리 대상이 그 감정에 호응한다는 이한율의 설명따위 내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 감정이 가짜냐, 진짜냐 따질 이유는 없다. 내가 이렇게 민도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현재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럼 내가 계속 민도윤과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관심이 있는데 손에서 벗어나는 건 싫었다. 나는 이한율을 쳐다보았다. 물어볼 게 많았다. 이한율은 느슨한 입을 가지고 있다.
"뭘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냐."
"이 광공 교육 언제면 끝나지?"
"뭐, 지루하냐? 보충수업 넣어줘? 더 고통받게?"
이한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트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허공에 뭔가를 검색하는 것 처럼 보이더니 나를 향해 시큰둥하게 말했다.
"80%가량 완료됐는데? 너 빠르다?"
"빠른건가."
그러면 안 된다. 민도윤과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하니까. 그렇다면 광공이 되고 자시고 간에 큰 대 자로 누워서 바닥에서 농성하고 뻗대면 어쩌려나. 배 째라 모른다 나는 못간다 간다 못간다.
"내가 안 한다고 뻗대면?"
"그럼 관리자가 처벌받겠지."
"어떤 처벌이야?"
"시말서 정도 쓰겠지."
도윤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시말서정도 쓰는 거라면 좀 더 감수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힘든 것만 아니라면.
"관리자가 시말서 쓰기가 힘든가?"
"그거 쓰는게 뭐가 힘들어? 그냥 몇 마디 적으면 되는건데."
"그래도 계속 쓰게 될 경우에는 힘들지 않겠나."
"시말서도 2장이면 끝이야. 그 뒤에는 형벌이지."
"형벌?"
"그래. 페널티를 받지. 그러고 보니...당신..."
"왜?"
"나 혹시 엿먹이려고 이런 거 물어보나?"
관리자에게 시말서를 쓰려고 하는 것 까지는 맞았는데 대상이 틀렸다. 도윤씨가 시말서를 쓰면서 나와 좀 있는 시간이 길어지길 바랐다는 거지, 이놈은 아니다. 영 멍청하다. 나는 잘 나가다가 끝에서 한 발 삐끗한 이한율 차게 식어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놈과 길게 있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빨리 사라져주고 도윤씨가 오길 바라는데 왜 나대는 거지?
"당신과 같이 있기 싫어서라도 당신 말은 잘 들을 테니 걱정마."
"그럼 다행이군. 형벌은 끔찍하지."
"얼마나 끔찍하길래?"
"당신 나 싫어하잖아. 듣고 싶어지면 형벌을 주고 싶어질걸?"
"뭔데?"
"싫어. 안 말해."
이한율은 낄낄대며 들고있던 펜을 던졌다. 펜이 내 눈 앞까지 왔다 멈추고는 다시 이한율의 손으로 돌아간다. 나는 거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없는 객기같으니라고. 나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무작정 뻗대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만 알아냈으니 되었다. 형벌이란 말의 어감은 무척 좋지 않았다. 굳이 다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윤씨를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어감이었다. 그렇다면 수업 연장을 고려해 볼 때다.
"보충수업이라고 했지?"
"보충수업이나 재교육이나 그게 그거지."
"그건 왜 하지?"
"보충수업을 왜 한다고 생각하냐? 질질 짜대면서 못하겠다고 엉덩이 뒤로 빼고 넘어가는 광공이나, 자존감 완전 튼튼하고 정신상태 너무 좋은 자낮수나, 죽어도 엉덩이 뒤로는 뭘 꽂을 생각이 없는 떡대수나."
"한마디로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받는다는 거군."
"그렇지. 자낮수들이 많이 받아. 뼛속까지 후려치거든. 하는 쪽도 맘이 안좋지만 어차피 공을 만나면 다 치유받을 영혼들이니 뭐... 강수들도 마음 약하게 굴면 갯벌에서 하는 해병대 캠프도 보내줘. 그러면 악이 받쳐서 강수 되서 오더라."
"그건 당신과 같이 받나?"
"아니? 다른 사람들이랑 받거든. 관심있어?"
"없다."
보충교육으로는 도윤씨와 있는 시간을 늘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결론은 한 가지다. 도윤씨와 있는 시간을 늘리려면 도윤씨를 관리자에서 끌어내 내가 광공으로 다시 태어날 곳으로 쳐박는 것. 도윤씨가 아파도 어쩔수 없다. 조금 힘들어도 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짝사랑수로 배정받을 도윤씨를 끌어내 내 옆에서 사랑해줄 수 있을 자신이 있었다. 광공의 감정이란 격하다. 격한 감정에 불이 붙는 것은 마치 수영장 속에 전기가 오르는 도선을 한 움큼 쥐어다 넣어놓은 것 같았다. 수영장의 어느 곳에 있다 한들 강력한 감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한율이 눈 앞에 손을 휘저었다.
"무슨 생각하냐?"
"왜 그런건 신경써? 관심있어?"
"관심이야 당연히 있어야지. 그래도 도윤이가 부탁했는데."
기분이 나빠 휘적대는 손을 슬쩍 밀어내었다. 그리고 이한율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튼 알아둬. 광공은 근면해야 한다."
"부지런하게 살아야 될 것 같긴 하더라."
"그래. 회사일은 최소의 자원으로 최고의 효율을 내야해. 가족과의 시간도 점차 줄여나가야 하고. 그래야 수만 쳐다보고 살지. 얼마나 노동강도가 강한데?"
"그래서 체력을 그렇게 길러대는건가."
"뭐, 몸도 좋아야 한다지만 기본적으로 그렇지. 광공이 체력이 좋아야 할 이유는 또 있어."
"뭔데?"
"침대 위에서 수 다리 버둥대는 것도 잡아야 하고, 속옷도 내리면서 키스도 해야하고, 손도 깍지끼고 잡으면서 밑도 지분거려야하고. 그리고 수 눈앞에 흰색 세계가 펼쳐질 때까지 허리도 움직여야 하고. 가끔 보면 팔 여덟 개에 눈 일곱개, 허리 두개 달린 것 같은 신들린 멀티플레이를 보여주는 광공들이 많거든."
"유용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인걸."
"물론 처음부터 상냥하게 시작하는 공들도 있지만."
"그건 내가 아닌 것 같군."
"당신 광공이니까. 다정공이나 대형견공갔어도 참 좋았을텐데."
"광공은 뭐야 그럼."
"다정이 너무 많아서 병인 듯 하여 돌아버린 놈들이지."
이한율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뜯어보며 말했다.
"만약 말이야..."
이한율이 뜸을 들인다.
"도윤이가 관리대상 재배치를 신청하면 어쩔꺼야?"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한율 말대로라면 도윤씨는 다시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왜 갑자기 재배치를 논하는거지? 나는 적어도 도윤씨를 다시 볼 줄 알았다. 도윤씨를 다시 보아야 나와 함께 환생을 하도록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난 잠시 멈칫거렸다.
"얼굴봐라. 너 정 많은 편이지?"
다행히 오해를 한 것 같지만.
"도윤이랑 얼마 봤다고 그렇게 벌써 정이 들었어? 옛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지. 다정도 병이란 말이 맞다니까."
"그래서 뭐가 문제라도 된다는 겁니까?"
"다정함에서 눈돌아가면 미치는거지. 결국. 넌 다정한 편이니 광공의 자격도 충분하다니까."
"다 아는 듯 말하는 게 진짜 싫다."
"그리고 말 나오니까, 말인데. 목소리도 좀 바꾸자."
"내 목소리가 어때서?"
내 목소리는 평범한 편이다. 조금 굵은 느낌이야 있었지만 그건 남자라서 그렇고. 그런대로 평범한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를 바꾸자니 아마 더 굵게 만들 모양이었다. 이한율은 다가와 양 손으로 내 목을 지긋이 눌렀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목을 조르는 모양새라 기분이 더러웠다.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은..."
"거기서부터는 내가 할게, 한율아."
뜻밖의 등장이었다. 좀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도윤씨가 어느 새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반가워 고개를 돌리고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반갑다고 인사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야, 아직 말하면..."
"안녕하떼여!"
새된 소리가 내 목에서 나왔다. 거대한 덩치에서 모기소리가 나오는 모양새에 내 얼굴이 처음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도윤씨 앞에서 체면을 구긴 것이 너무 치욕스러웠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한 주먹에 담아 이한율의 어깨를 한 대 쳤다. 이한율도 내 꼴이 엄청나게 우스워진 죄를 알았던 모양인지 피하면서도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나는 결국 도윤씨가 도착했는데 한 마디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이한율을 배웅하는 도윤씨를 보면서 그저 따라만 가고 한 마디도 못했다. 이것은 이한율의 큰 그림이다. 내가 떠나는 길 육두문자로 배웅해 줄 것을 알고 목소리를 이 모양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민혁씨. 목소리 귀여웠어요."
하지만 곧 웃는 도윤씨의 얼굴에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기 앉아봐요. 어느 정도 되면 목이 풀릴테니까 내가 눈짓하면 아, 아, 하고 소리 내 봐요."
나는 얌전히 앉았다. 도윤씨가 방금 전 처럼 양 손으로 목을 지긋이 눌렀다. 이한율보다 더 세게 목을 쥔 것 같은 느낌인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손에 힘을 약간 주고 목을 매만졌다. 곧이어 목이 트이는 느낌에 나는 아, 아, 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변한다. 적당히 나른하고 배부른 맹수의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도윤씨, 반가워요. 잘 쉬고 왔어요?"
아주 여상스럽게. 아무 일 없던 것 처럼. 새카만 집착을 산뜻하게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