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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8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18/82)

00018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나는 반말을 던져놓고 한율씨라고 부르기도 그러했지만 한율이같은 친한 호칭으로 불러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율님이나 관리자분같은 존칭으로도 써 주기에는 방금 전 대화가 마음 한 구석에서 나를 괜히 긁어댔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기분이 더러워지자 한율씨가 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뭐냐? 왜 쳐다봐?"

"너 도윤이한테도 반말하니?"

"아니. 도윤씨에게는 할 이유 없지."

"그럼 왜 나한테는 갑자기 반말이야?"

"당신이 반말을 하니까. 안 할 이유는 뭐야."

"너 표정 구려질때부터 나한테 말 놨어."

"그래서?"

"도윤이 이야기 하면서 말 놨다고. 이거 진짜 재미있네."

"도윤씨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놨다는게 도대체 무슨 재밋거리라도 되는지 모르겠군."

"내가 재미있는 건 좀 다른 쪽이야."

"다른 쪽?"

"지금까지의 교육을 보면 '수가 원하던 광공의 모습'을 주제로 좀 교육하고 있는데, 난 공 출신이라 그런지 좀 다르거든."

"당신은 수도 못 찾은 공이라면서. 공 출신이란게 의미가 있어?"

"정말 재수없다. 의미는 있지. 기질이란게 있으니까."

이한율은 재수없다는 말을 평온한 표정으로 쿡쿡 쑤셔박듯이 말했다. 더 재수없었다. 모든 것이 재수없게 느껴졌다. 이제는 표정 관리를 할 생각도 안 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는 통에 이유모르게 기분이 더 더러워졌지만.

"광공의 덕목을 아주 잘 갖추고 있군."

"뭐길래, 그게."

"말 안해줘. 이미 가지고 있는데 더 가르칠 이유도 없고."

"학습목표도 말해주지 않는 나쁜 선생이네."

"그것보다는 제자될 사람의 능력을 어찌어찌 잘 발견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선생이라고 불러줘."

"싫어."

"정말 광공답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는 점까지."

"내가 광공같다니, 도윤씨는 아직 멀었다고 했어."

"그렇게 도윤이에게만 굽히는 것도 광공스럽긴 해. 아직 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한율의 말 대로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는 점이 크리티컬이었다. 하지만 굳이 더 캐묻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한율이 긁어대기에 난 입을 다물었다. 공이라서 그런가, 그래서인지 같은 공하고는 무언가 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그랬다. 도윤씨를 도윤이라고 부를 때 부터 이미 이한율은 내게 좋은 관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 된 입장에서 너에게 충고를 해 주자면..."

"..."

"공은 색욕이 넘쳐흘러야 해."

"무슨 소리야, 그건."

"3박 4일을 밤낮으로 수와 뒹굴어도 넘치는 체력과 정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뒹굴어?"

"다 알면서 뭘 그러나."

이한율은 한 손가락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한 손가락으로.... 나는 순간 급격하게 바뀌어버린 주제와 그걸 전달하는 방식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윤씨와 만났을 때도 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한율은 너무 직구를 쏜다. 몸쪽 꽉 찬 공 깊숙히 들어오는 직구로.

"이미 우주파괴용은 장전해 놨는데, 도윤이가 이 부분은 안 건드려 놨던데."

"아...아니..."

"이건 내가 수정해주지. 이제 넌 종마야. 종마 수준이라고."

"종마..."

이한율은 신나게 차트를 수정했고 그걸 보는 나는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형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영혼상태이었을 때에도 도윤씨는 내게 인간 대접을 해 줬는데, 이한율은 만난지 3분만에 나를 종마취급하고 있었다. 물론 넘치는 정력을 가지게 된 결과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 경위가 너무 험난했다. 이한율은 탈곡기다. 나랑 상성이 안 맞는 멘탈 탈곡기.

"진짜 이한율 너는 나와 상성이라곤 맞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엄숙함과 진지함과 근엄함을 다 말아 잡수신 광공 족속들이랑 내가 좀 안 맞지. 난 끼가 넘치는 연예인공이었다니까? 배우였으면 모를까 난 아이돌이었어. 내가 앨범내면 너튜브가 들썩였다고."

"끼부리는 걸로만 친다면 당신 수도 씹어먹었을것 같다."

"그렇지. 그나저나 자꾸 내 수 들먹이지 마."

"왜? 어차피 아예 못 만나고 관리자까지 왔으면 미련도 없는거 아닌가?"

"아니야. 미련보다는 죄책감이지."

"찾고 있어?"

"거기까지는 친해야 말 해 줄 수 있어."

선 넘지마, 라면서 이한율은 손가락으로 나와 이한율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는 손을 휘적휘적 저어 나를 두어 걸음 뒷걸음질치게 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편하게 누워 도윤씨가 주고 간 것으로 보이는 차트를 뒤적거렸다. 차트를 뒤적대는 동안 나는 바닥에 앉아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강제로 일으켜진것은.

"광공은 바닥에 털썩털썩 주저앉는거 아니다."

"그럼 의자라도 주던가."

"알겠어. 무슨 의자 줄까."

"검은색 사장님 의자."

"도윤이가 잘 가르치긴 했네."

그리고는 나에게 왕좌의 게임 드라마 표지에서나 나올 것 같은 칼이 잔뜩 꽃힌 검은 의자를 들이밀고는 거기에 앉혔다.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앉힌 거니 속절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지만, 정말 도윤씨가 보고 싶었다. 이한율은 언제 가고 도윤씨가 오나.

"너 방금 전에 도윤이가 언제오나 궁금해했지?"

눈치도 빨라서 싫다.

"도윤이가 원체 둔하고 성실해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만 도윤이가 뛰쳐나갈 정도라면 너도 보통 심하게 군 것 같긴 하다만..."

"잠시만요."

"왜?"

"당신 얼굴이 왜 보이지?"

"왜 보이냐니."

"당신 표정 선명하게 보이잖아요."

"지금 내 표정이 선명하게 보이는 게 뭐가 의미가 있나?"

처음 나타났을 때 도윤씨는 잔뜩 자기 인상을 흐리게 번져놓고 나타났다. 하지만 이한율을 달랐다. 이한율은 정말 쨍한 햇빛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놓았다. 화려한 백금발 머리. 그리고 근육이 예쁘게 잡혔지만 날렵한 흑표범같은 상이었다. 그리고 너무 선명했다. 흥미로울 때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도 보였다. 처음부터 저화질 동영상을 보는 것 처럼 깨져보이던 도윤씨와 달랐다. 나는 이한율이 또 '도윤이에게 들어'같은 말을 꺼낼까봐 애서 침착해하며 말을 이었다.

"재수없게 잘생긴게 선명하게 보이니까 그렇지."

"연예인이었다니까."

"좀 흐리게 할 순 없나? 좀 흐릿하게 보였으면 좋을 정도로 재수없는데."

"인상 흐리는거?"

이한율이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나 도윤씨가 인상을 흐리게 했다는 걸 알면 왠지 이한율은 관리자가 인상을 흐리게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 들으라던가, 혹은 너와 내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걸 왜 곱게 가르쳐 주고 있냐고 할 것 같았다. 광공은 똑똑하다. 나도 똑똑하단 뜻이지. 다행히도 이한율은 잠시 인상을 구기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왜? 그건 마음이 약한 사람이나 하지."

"마음이 약해?"

"당신이 날 사랑할 리는 없잖아."

"미쳤다고."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할 리도 없고."

"그게 지금 인상 흐리게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

"그렇지."

"사람 첫인상은 얼굴에서 대부분 결정나. 얼굴도 안 보고 사랑하려면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얼굴을 가린다?"

"그렇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인상을 흐리게 하는건 이 관리국에서 쓰는 일종의 자기방어수단이라고 할까. 나도 당신도 서로 감정의 선을 긋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거지."

"사랑에 빠지면?"

"관리자만 정신 잘 차리면 사랑에 빠질 일은 없어. 그거, 관리자가 사랑에 먼저 빠지지만 않으면 괜찮거든."

심장이 그 순간 터질 것 같았다. 애써 뛰는 심장을 누르려 애썼다. 말이 빨라질까, 말이 헛나올까 신경이 쓰였다. 이한율, 그러니까 다른 관리자에게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반사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도윤씨는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얼굴을 내놓은 순간 나는 도윤씨에게 한없이 가까워졌었다. 나는 초조함을 초인적인 힘으로 누르고 말을 이었다.

"만약 너와 내가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지?"

"너랑 내가?"

이한율이 피식 웃으면서 무슨 징그러운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곧 토할것 같은 표정에서 나는 이한율이 나와의 사랑이라는 걸 전제하지도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즉, 이한율과 나는 죽어서 세번을 회귀해도 이어지지 않을, 서로가 서로를 역겨워할 사람이라는 거겠지. 오히려 안심이 된다.

"만약이라고 했잖아, 이한율."

"지민혁, 이름으로 부르지 마. 관리자한테 버릇이 없어 버릇이..."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집착하지마, 징그러우니까. 뭐가 어떻게 되긴 되겠어. 기억도 지워지고 공도 수도 아닌 아무하고도 이어지지 않는 짝사랑공이나 짝사랑수로 배정받겠지."

"그건...끔찍하겠군."

"끔찍하지.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라고. 보답받지 못할 헌신이라는 벌이 생각보다 얼마나 가슴아픈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 이한율은 다시 차트를 뒤적거리다 말했다.

"야, 너 빠진거 있다. 광공은 근면해야 해!"

이한율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만약, 도윤씨를 짝사랑에서 끝나지 않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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