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나는 고개를 기울여 도윤씨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윤씨의 조금 빨라진 숨결이 내 뺨에 닿았다. 도윤씨는 너무 놀라 뒤로 뺄 생각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도윤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아올리듯이 잡았다. 도윤씨의 동그란 뒤통수가 내 손 안에 꼭 맞게 들어왔다. 도윤씨의 얼굴을 밑에서부터 눈으로 훑었다. 그렇게 쉽게 붉어지던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속눈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나는 한쪽으로 도윤씨의 여린 목덜미를 잡았다. 내가 손을 대는 곳 마다 도윤씨의 맥박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 맥박소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도윤씨의 목덜미에서 울리는 맥박소리에 입을 맞추었다. 맥박소리를 따라 올라가며 도윤씨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도윤씨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한 것은 충동성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사람은 이런 맥박소리까지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도윤씨의 입술을 정말 여린 살결이었다. 조금만 치아에 힘을 주어 깨물면 새빨간 피를 흘리며 찢어질 것 같은 여리고 붉은 입술이었다. 그 붉은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내 어깨와 허리가 크게 움직이며 당황해 굳어버린 도윤씨를 더욱 껴안았다.
비집고 들어간 것은 입술인데, 발끝과 목덜미 부근에서 짜릿한 전기같은 것이 올랐다. 온 몸을 얕게 뒤흔드는 쾌락과 그 여진이 있었다. 쭈뼛 머리칼이 설 정도로 도윤씨의 키스는 끝내줬다. 내가 키스를 잘 하는지는 도윤씨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도윤씨와의 키스가 끝내주게 좋았다는 건. 나는 입술을 떼고 도윤씨를 내 쪽으로 당겨 안겨 다시 물었다.
“도윤씨, 광공은 키스도 잘 해야 해요?”
도윤씨의 얼굴이 폭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였다. 도윤씨는 붉다못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마 도윤씨가 때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윤씨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 도윤씨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씨는 나를 때리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퉁기더니 뿅 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도윤씨?”
나는 어쩐지 허망해져서 그 자리에서 멍하게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 백색의 공간에 누군가가 다시 나타난 것은 몇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다행히 도윤씨가 침대를 없애두고 가진 않아서 침대 위에서 누워 있었지만, 도윤씨가 사라졌다는 충격에 잠은 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부끄러웠나, 아니면 내가 많이 잘못했나를 번갈아가며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고민에 빠져있는 나를 부른 것은 오히려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니가 이번 광공이야?”
“누구세요?”
“뭐긴 뭐야, 도윤이 부탁받고 온 관리자지. 그나저나 도윤이가 이렇게 SOS친 일은 처음 있는 일인데. 너 도윤이 애 많이 썩였냐?”
그보다 나는 도윤씨를 도윤이라 친근하게 부르는 저 모습에 오히려 경계심이 올랐다. 도윤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흐려진 인상의 사람이 아니다. 또렷하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백금발머리에 맨투맨과 청바지로만 코디를 했지만 누가 보아도 직업은 연예인인 것 같았다.
“별로 썩인 적 없어요. 그나저나 도윤씨랑 꽤 친하신가 봐요?”
“나 그 녀석 직속 선배잖아. 직속 선배라고 해도 내가 관리자 될 때랑 민도윤이 관리자 될 때랑 별로 차이가 안 났어. 우리 둘이 관리자 될 때 너무 힘들어서 서로 통곡어워드 열었다가 친해졌지.”
“뭐가 그렇게 힘들었길래요?”
“민도윤이 말 안 해줬니?”
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도윤씨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관리자는 도윤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차고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거슬렸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른 이야기 많이 하느라 도윤씨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민도윤이 별일이네. 그래도 조금은 하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입니까?”
“내가 도윤이가 아니니까 말해줄 수는 없지.”
얄밉게도 굴어댄다. 슬쩍 흘려주면 어때서. 하지만 또 저렇게 헤프게 말을 했다간 나도 다른 의미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라 뭐라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 이야기는 해 줄 수 있어.”
나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어쩌면 이 사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윤씨의 이야기가 조금은 별책부록마냥 나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왜, 자기 이야기하다보면 남의 이야기를 설렁탕에 후추를 치듯 살짝 나오는 경우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왠지 신나보였다. 도윤씨를 잘 아는 척 하다니 정말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꼴 보기가 싫었다.
“난 원래 연예인공이었거든.”
“당신도 공이었습니까?”
“어, 왜? 불만있어?”
“아뇨, 근데 광공은 아닌 건 확실하게 알 것 같아요.”
“아니 광공이랑 비교하면 좀 그렇지. 난 연예인공이라서 광공처럼 그렇게 수도자의 삶을 살 필요가 없기도 하고.”
“그건 좀 부럽네요.”
“응. 근데 수를 안 찾고 너무 열심히 연예인활동에 매진해서 엄청나게 유명한 연예인이 되었지. 대한민국에 날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 그리고 삶을 마무리하니까 다시 유명해지기 전의 연예인으로 기억을 가지고 회귀한거야.”
“회귀해서요?”
“회귀당하면서 어떤 소리를 들었지. 나보고 찾으라고 했었어.”
“다시 수를 찾아서 사랑하라 하던가요?”
“응. 수를 찾아서 사랑하라고 했는데...내가 계속 안 그랬어.”
“왜요?”
“너랑 나랑 친한 것도 아닌데 거기까진 말하진 못하지.”
너무나 당당하게 선을 긋는 모습이 오히려 시원시원하니 좋아보였다. 그래, 이상한 거짓말을 하면서 대답을 피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 못한다고 말해주는 편이 더 나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어딘가에 적당히 걸터앉아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어느 날 관리자를 하라고 하더라고.”
“왜요?”
“수가 포기했대. 날 기다리다가.”
“그게 무슨...”
“몇 번의 회귀동안 수도 같이 회귀했나봐. 그런데 회귀해도 수에게 지독하게 괴로운 삶이었대.”
“괴로운....”
“웃기지, 수를 찾으라고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안 알려줬어.”
“그걸 알았으면 달라졌을까요?”
“그걸 알았다면 찾았을 거야.”
“찾아서요?”
“적어도 괴롭지는 않게 해 줬을거야.”
“도윤씨도 괴로웠나요?”
“도윤이도 그랬겠지. 도윤이는 너무 도망을 잘 가서 공이 못 찾았어.”
“도망이요?”
“도윤이 도망수였잖아. 우리끼리는 괴도라고 해. 너무 잘 도망갔거든.”
“공이 열심히 안 찾은 거겠죠.”
나는 말을 툭 던졌다. 동시에 추격과 감금영역에서 시험까지 봐 가며 나를 열심히 훈련시킨 도윤씨의 모습이 생각났다. 시뮬레이션에서 나는 도망가는 수를 지독하게 쫓아가야 했다. 현금만 쓰는 수, 장물 팔아 연명하는 수, 원래 부자라 해외로 날아버린 수, 미국 촌구석에서 적적히 살고 있는 수까지 찾아야 했다. 나는 도윤씨가 그토록 나를 열심히 교육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있자, 연예인공이었다던 그 관리자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말실수를 했군. 그것조차 못 들었구나.”
“정말 전 아무것도 못 들은 것 같네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도윤씨가 말해주지 않은 것이 섭섭했다.
“통성명이나 하죠. 전 지민혁입니다. 광공이 되야 하구요.”
“나는 이한율. 전직 연예인공 현직 관리자야. 오늘 하루 잘 부탁해.”
한율씨는 잠시 멈칫거렸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뭐가.”
“표정이 구려. 엄청 속상하다는 표정이다?”
“그럼 구리지 안 구리겠냐?”
반말을 쓰는 한율씨에 나도 슬그머니 말을 내렸다. 다행히 한율씨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지 내 반말에 딱히 반응이 없었다. 한율씨는 백금발의 제 머리를 지분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니가 왜?”
“뭐가.”
“도윤이 이야기하니까 구려지는데, 너 도윤이 좋아해?”
와, 메이저리그의 강속구를 머리에 정통으로 맞아도 이것보다 심하기 힘들 것 같았다. 몸 쪽 꽉 찬 직구에요. 타자가 몸에 공을 맞았어요! 타자가 1루로 출루도 못하고 맞은 곳을 부여잡습니다! 말로 때렸는데 폭행죄로 신고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도윤씨가 가르쳐 준 포커페이스를 하고 태연한 척 하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관심 있으면, 잘못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