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도윤씨는 분위기를 좀 바꾸어보자며 옷이라도 바꿔보자고 했다. 도윤씨의 얼굴이 주는 생동감에 취한 나는 내 옷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정색 일색이던 옷이 진회색으로 바뀌었다. 회색 와이셔츠에 좀 더 진한 회색 수트를 입었다. 무슨 재질인지는 몰라도 세로주름이 원래 져 있는 것 같은 신기한 원단이었다. 거기에 아주 짙은 빅체크 회색코트를 걸치자 마치 겨울 북부를 배경으로 한 공작같아 보였다. 넓게 벌어진 가슴과 큰 키 덕분에 뭘 입어도 옷 태가 살아났다. 도윤씨도 만족한 얼굴처럼 보였다.
"민혁씨는 회색도 어울려요. 이렇게 입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검은색만 입히길래 평생 검은색만 입고 살 줄 알았어요."
"좀 더 캐주얼하게 검은 목폴라티에 검은 바지를 입고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옷걸이가 좋죠?"
능청스럽게 묻자 도윤씨가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 작품인데,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제가 잘난 덕이죠."
"조용히 하고 이제 향수나 골라볼게요."
"뿌려야 하는 향수까지 정해져 있나요?"
"대부분 묵직하고 무게감 있는 향을 쓰긴 해요."
도윤씨는 눈 앞에 향수 진열대를 나타나게 했다. 백화점 1층에서 향수 매대만 쏙 빼와서 그대로 가져 온 것 처럼 향수만 가득 차 있는 진열대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씨는 눈 앞에 향수를 하나 집어 들더니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인상이 번진 물감마냥 흐릿할 때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확대해서 볼 때 온갖 비즈와 꽃장식이 눈에 들어오는 것 처럼, 도윤씨의 표정 하나하나가 넘치는 활력감으로 다가왔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포근한 침대같은 향을 줍니다. 이건 광공용은 아니네요."
"그렇지만 도윤씨, 그게 오히려 반전같은 매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별로요. 그리고 그런 반전같은 매력을 줄 거면 수 앞에서만 엉엉 울때나 나오겠죠. 이런 향수로는 택도 없어요."
"그럼 이건 어때요. 가을의 단풍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가을의 단풍은 좋은데요."
"오렌지 홍차 향기."
"취소하도록 하죠."
"소나기가 지나간 정원의 흙 냄새...이건 좀 미묘하네요."
"이거 좋겠네요. 클래식 섹시, 묵직한 우드 향의 성숙함을 극대화했습니다."
"뭔지 알 것 같아요. 이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봐요, 도윤씨."
"고급 맞춤정장의 안감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도 좋네요."
도윤씨와 나는 향수 진열장 앞에서 다섯 개 정도의 향수병을 두고 저울질했다. 결국 맨 처음 도윤씨가 좋다고 한 묵직한 우드 향의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도윤씨가 마지막까지 두 개의 향수를 두고 고민했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더 재미있어서 질질 끌었다. 도윤씨는 아주 작은 표정변화가 많은 편이었는데, 그 세세한 표정변화로 말하기도 전에 자기 생각을 얼굴에 다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도윤씨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때 이런 것들을 다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도윤씨가 그거 고를 줄 알았어요."
"민혁씨도 이게 좋았나요?"
"아뇨, 도윤씨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도윤씨는 좀 더 마음에 드는 쪽을 볼 때 아랫입술을 살짝 앙다문다는 걸 지금 알았으니까. 나는 펄스 포인트에 향수를 뿌린 뒤에 내 몸에서 은은하게 퍼져가는 잔향을 느꼈다. 맥박이 뛰면서 아마 도윤씨가 잘 맡을 수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차트를 살펴보던 도윤씨는 시간이 지난 뒤 살짝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내 향수 냄새가 내 체향과 섞여 나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민혁씨, 향수 잘 선택한 것 같네요."
"누구 작품인데요."
도윤씨가 아주 조금 웃었다. 만족한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핸드폰으로 도윤씨의 얼굴을 찍고 싶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손에서 들고 있던 핸드폰이 미끄러질 뻔 하면서 하마터면 사진이고 뭐고 다 깨먹어 버릴 뻔 했지만.
"도윤씨, 핸드폰 그립톡 같은거 줄 수 있어요?"
도윤씨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안되는 거죠?"
"네."
"표정을 보았을 때에는 핸드폰 케이스도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렇죠. 좋게 봐줘도 심플한 것들이구요."
"방정맞은 거 하지 말라는 거죠? 데코덴같은?"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어린 조카가 만들어준 케이스라고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요?"
"뭐라구요?"
"그리고 이왕이면 대형 키링이 달린것도 좋은데. 폼폼이나."
도윤씨는 데코덴 케이스에 짠 생크림에 먼지라도 끼면 보기가 흉하며, 거대한 농구선수가 분홍색 프릴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는 꼴이라며 조목조목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설득했다. 폼폼케이스나 키링케이스도 학을 떼었다. 사실은 나도 그런 케이스는 쓸 마음이 없었다. 다만 도윤씨가 싫어하면서 하나 하나 따질 때 표정이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조근조근 나의 핸드폰 케이스 취향을 갱생시키려고 하는 도윤씨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왜, 뭐에요, 민혁씨?"
"도윤씨."
"왜요."
"내가 그걸 진짜 쓸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듣고 배운게 있는데?"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도윤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도윤씨는 내가 도윤씨를 놀리려고 작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도윤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도윤씨는 살짝 숨을 뱉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민혁씨가 많이 배우긴 했나보네요."
"그렇죠?"
"그럼 대답해보세요. 또 뭐가 있겠어요?"
"광공은 와이파이 금지일거구요."
"음... 생각지는 못했는데 좋은 지적이네요."
"어디 갈 때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 물어보는 광공은 뭔가 좀 그렇지 않나요."
"그렇죠."
"그리고 무선충전기 써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이건 언젠가 말해주려고 했는데."
"유선 충전기 앞에서 쪼그리고 스마트폰을 쓰면 처량할 것 같아서요."
"가르친 보람이 있네요."
"궁금한 게 있는데, 광공은 휴대폰 메세지 보낼 때 오타나도 되는 거에요?"
"휴대폰 메세지는 보통 비서가 보낼 거에요."
"그래도 내가 연락할 때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럴 경우에는 오타는 되는데 맞춤법만 안 틀리게 해 주세요."
"아."
"광공 재교육 첫번째 사례가 맞춤법 안 지키는 광공이었어요."
"어떻길래요?"
"수씨 우리 '아뭏든'간에 '사기'는거 '맛죠?'ㅎ 이렇게 보냈다니까요."
"와."
"그리고 나서 수 쪽에서 한 번은 참고 다시 답장을 보냈는데 답장도..."
도윤씨는 말없이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 메세지 캡처 창이 떴다. 거기에는 '숙기없는 표정도 타에 추정을 불허하게 귀여워요ㅋ'라고 쓰여져 있었다. 나는 절로 고개를 외면했다. 그 분이 누군지 간에 국어파괴력이 상당해 보였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수 쪽에서 깼다고... 공을 차버려서..."
도윤씨는 짜증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거 수습하느라 광공 재교육하고 수랑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러니까 민혁씨는 바르고 고운 우리말을 사용해주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자신감이 든 복학생처럼 ㅋ이나 ㅎ만 하나 문자 뒤에 붙이지 말아주세요."
"그건 지켜야 할 규칙인가요?"
"권고사항이에요. 그렇지만 제가 길러내는 광공들은 그런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금지하고 있어요."
"저도 그러도록 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도윤씨를 안심시켜 주었다. 도윤씨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같이 끄덕여 주었다. 도윤씨는 내 손을 톡톡 두드리면서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암. 우리 말은 지켜야 제맛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