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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4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14/82)

00014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어느 날, 무지개가 뜨고 파랑새가 지저귀는 아침이 오는 날, 백마를 탄 잘생긴 금발머리 왕자님이 와서 맹세의 키스를 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 어린 공주님이 그러했을까. 아니면 열네살의 생일파티에서 부모님께 사실은 숨겨진 약혼자가 있으니 그렇게 알라고 통보받은 소년과 소녀의 기분이 그럴까.

나는 본적도 들은 적도 닿은 적도 없는 사람과의 사랑을 하려고 이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단다. 차분하게 내려앉는 도윤씨의 말은 나에게 판사의 주문처럼 들렸다. 어떻게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위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런 행동을 하나요?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확정되어 있구요? 그리고 도윤씨는 그 행동을 한 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해 주었다. 미친 짓이라고. 너무나도 적절한 그 말에 나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얼빠진 나에게 도윤씨가 다가왔다.

"그렇게 얼빠지게 서 있으면 제가 놀랄 줄 알았어요?"

"딱히... 도윤씨더러 놀라라고 서 있던 건 아니었어요..."

"모두들 그렇죠. 모두들 당신처럼 이런 미친짓을 하다가 멈출 때가 있어요."

"..."

"당신 반응이 특별하지도 않다는 거에요."

도윤씨는 차갑게 말하면서도 나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아 쓸어내리며 나의 동공에 눈을 맞췄다. 도윤씨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흐려진 인상이지만 그 쯤은 대충 알 수 있었다. 나는 도윤씨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태어나기도 전에 약혼자가 생긴 기분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넌 틀림없이 그 사람을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사랑할 거라고 못박으니까..."

"못박으니까요?"

"거부감이 들어요."

자고로 누우라 하면 서고 먹으라 그러면 단식하는 반골기질 청개구리라 그런가. 나는 내 사랑을 멋대로 재단하려 드는 이 "시스템"에 대해서 조금은, 아니 많이 반감이 들었다. 누가 나를 100억을 주면서 이것들을 지키라고 한다면, 사회생활 한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기분 나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넌 내가 정해주는 사람을 틀림없이, 미칠 정도로 사랑하게 만들거라고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그건 내가 장난감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씨발, 기분이 좆같네요."

인상이 구겨졌다. 아니, 구겨졌다고 생각했는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조금만 불편한 기색으로 드러내는 소위 광공식으로 구겨졌다. 이제 이것까지 몸에 배여버렸나 하는 생각에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윤씨는 언제 만들어냈는지, 광공이 마셔야 한다는 심플한 디자인의 프리미엄 생수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민혁씨."

"하기 싫어요."

"뭐가요."

"또 뭐 어떻게 안된다 된다 그럴거잖아요."

도윤씨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윤씨의 인상이 물에 번진 물감처럼 흐려져 있어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도윤씨도 꽤나 곤란한 것 같았다. 도윤씨는 차트를 옆에 있던 탁자에 놓았다가 왼손으로 잡았다가 오른손으로 옮겨잡으면서 발끝을 딱딱거렸다. 방금 전에 내 반응이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고 차갑게 말했으면서 정작 나보다 내 반응을 신경써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도윤씨인 것 같았다.

"도윤씨."

"네, 민혁씨."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해요."

"저 그런 적 없어요."

"지금 차트 몇 번이나 고쳐잡을 줄 알아요?"

"하."

도윤씨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분위기는 망할 대로 망한 분위기였다. 더 이상 뭘 가르쳐주든지 내가 따라올 분위기가 아니었다.

"민혁씨. 당신이 광공으로 환생하지 못하면..."

"뭐 큰일이라도 나겠어요?"

"큰일이죠."

"내가요, 아님 도윤씨가요? 누구한테 큰일이 나는데요?"

"그건..."

"도윤씨가 곤란해지는거죠?"

나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 말했다. 차트가 도윤씨의 손에서 떨어지고 도윤씨는 두 손에 깍지를 꼈다 폈다 한다. 나는 손에 턱을 괴고 도윤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윤씨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연신 한숨만 내뱉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쉰 한숨 중 가장 큰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에는 흐릿함이 가신 얼굴이 보였다. 도윤씨의 얼굴이 깨끗하게 보였다. 나는 분명 예전에 한 번 보았을 텐데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윤씨, 갑자기 얼굴은 왜 보여줘요?"

"급하니까 그렇죠."

"제가 광공이 안한다고 할 까 봐요?"

"그것도 그런데...참 다 말해줄 수도 없고."

"뭘 말해줄 수가 없어요?"

"참 나,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광공 되는 동안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많이 들었잖아요."

"그래서요."

"관리자도 다르지 않아요. 얼굴도 안 보여주고 싶어서 안 보여주는 줄 알아요?"

"그것도 안 보여줘야 하는 거에요? 원래?"

"원래 관리자는 여러가지 안전상의 이유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요. 일종의 보호막이라고 해야하나...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도윤씨는 나의 팔뚝을 잡고는 고개를 위로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도윤씨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봤다. 저번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 기억을 지워버렸던 게 한이 되서 그런가, 얼굴을 자세히 못 본 게 아쉬웠었다. 차분한 머리스타일. 머릿속에 손을 넣어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머릿결이 곱다. 깨끗하고 흰 피부. 속눈썹이 굉장히 예쁘게 나 있다. 눈은 가까이에서 보아서 그런가 갈색으로 보였다. 아마 떨어지면 조금 더 어둡게 보이겠지. 입술도 야무진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저렇게 쫑알대는 입술이 웃으면 더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도윤씨가 나를 흔들었다.

"민혁씨, 이제 알았어요?"

"뭐가요."

"미치겠네. 제 말 하나도 안들었죠."

"네."

"당당하게 말하지 마요. 아니, 내가 언제나 당당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죠."

"여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만 좋다고 당신 광공하자고 한 거 아니라구요."

"네?"

"솔직하게 말하면 당신이 광공이 안 되면 나도 곤란해져요. 네, 맞아요."

"의외로 시원하게 인정하시네요."

"그런데 당신도 엿 먹는건 마찬가지라고요. 자세한 페널티는 제가 말해주면 안되니까 말은 못 하지만..."

도윤씨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또 말을 못해준단 말에 나는 팔짱을 꼈다.

"대신 남는 기간 동안은 제가 얼굴 톡 까놓고 민혁씨 교육할게요."

"얼굴 보여주면 안된다면서요."

"지금은 민혁씨가 광공 안하려고 하잖아요."

"그럼 지금 그런 간단한 이유로 얼굴을 보여주겠다는 거에요?"

"민혁씨 생각보다 지금은 훨씬 비상사태에요."

"제가 광공 때려칠 것 같은 상황이요?"

"그렇죠."

도윤씨가 팔짱을 꼈다. 이번에는 내가 팔짱을 풀었다. 도윤씨는 뭔가 쫓기는 듯 급해보였고,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도 안전상의 이유 어쩌고 한 걸 보니, 나는 잘 몰라도 자기가 크게 양보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흐릿해진 인상으로 설득하는 것 보다 저렇게 표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말하니 진정성있게 느껴졌다. 도윤씨의 얼굴은 늘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은 사고뭉치 연예인의 베테랑 매니저처럼 고요할 것 같았는데. 지금 날보고 때려치지 말라고 달래는 도윤씨의 얼굴은 급해보였다. 그런 급한 도윤씨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씨 믿고 그럼 그렇게 할게요."

"잘 생각했어요, 민혁씨."

"어차피 제가 여기서 때려친들 여기서 나갈 방법도 없는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도윤씨가 그런 얼굴로 부탁하면 마음이 약해지고요."

"얼굴 드러내기를 잘 했네요."

도윤씨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 처럼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라기 보다는 안도의 한숨같아 보였다. 도윤씨는 떨어뜨린 차트를 다시 주워올렸다. 차트에 묻은 먼지도 없을 정도로 깨끗한 공간인 것 같은데 도윤씨는 차트를 툭툭 털었다.

"민혁씨."

도윤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는 도윤씨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방금 씨발, 좆같다, 라고 하셨죠."

"제가 그랬나요?"

"네."

도윤씨가 입술을 아주 살짝 당겨 미소지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떨린다. 눈동자가 또렷해진다. 차트를 한 번 살짝 보고 나를 향해 선하게 말한다.

"광공은 욕하는 거 아니에요, 예외의 순간은 있지만요."

그리고 아, 도윤씨는 나에게 뭔갈 가르쳐 줄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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