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공부할 때에는 신문 사설조차 재미있다고 했던가. 나도 공부할 때에는 공부 말고 딴 건 다 재미있는 그저 보통 사람이었는지, 도윤씨가 건네준 책이 재미있었다. 의외로 도윤씨가 건네 준 책은 소설일 줄 알았는데 영어로 된 인문교양서적이었다. 자리에 진득히 앉아서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재미있어서 어느새 꽤나 많이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민혁씬 그게 재미있어요?"
"컴퓨터 게임도 안된다, 폰게임도 안된다, 이거라도 재미있어야죠."
"그렇긴 하네요."
"그러고 보니 할 수 있는 운동은 헬스가 전부에요?"
광공은 취미도 제한적이니 할 수 있는 운동도 제한적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광공이 되기 위해 한 운동이라곤 헬스와 러닝이 전부였다. 그래도 게임과는 달리 운동은 좀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도윤씨에게 운을 떠 보았다. 하지만 가볍게 던져 본 내 의도와는 달리,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도윤씨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면서 머뭇거렸다. 나는 도윤씨를 바라보며 한 가지씩 질문을 던졌다.
"테니스는요?"
"그건 괜찮아요. 이미지가 좋잖아요. 흰 테니스복을 입는 것도 비주얼적으로 괜찮아보이구요."
"그럼 스쿼시 같은 것도?"
"그것도 괜찮죠. 집 안에 스쿼시 할 수 있는 전용 공간도 만들어 놔야겠네요. 그럴 거면 펜트하우스 말고도 주택도 하나 추가해야겠네요."
"집 한채가 또 생겼네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걸 축하해요, 민혁씨."
"도윤씨 덕분이죠. 그럼 수영은요?"
수영을 물어보자 도윤씨는 좀 더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도윤씨는 팔짱을 끼고 차트를 바라보지 않기 시작했다.
"집 안에 혼자 수영할 수 있는 수영장을 만들어줄게요."
"왜요. 호텔 수영장이나 공용 수영장으로는 부족해요?"
"수모를 쓰는 게 미관상 취향을 타는 부분이더라구요."
"의외네요. 전 수영복이 오히려 취향을 타는 부분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민혁씨 건 너무 커서 삼각을 입으면 엄청난 비주얼이 나올 걸요."
"삼각은 지양하라는 뜻인가요?"
"잘 판단해서 입어야 한다는 뜻이죠. 아, 맞다."
"뭐가요?"
"팬티는 삼각으로 입지 마세요. 무조건 드로즈."
"거기서 갑자기 왜 드로즈가 나옵니까?"
갑자기 분위기 드로즈에 나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올 때부터 주어진 속옷이 드로즈뿐이라 드로즈만 걸치고 있었지만 삼각이 안된다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제재를 당한 느낌이라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잠시 아랫쪽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쳐들고 다시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뜨끈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부끄러워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광공은 함부로 부끄러워하면 안돼요."
"부끄러워 하는 것도요?"
"부끄러워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수 앞에서만 해 줄래요?"
"아니, 그럼 제 속옷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민혁씨가 두둑하고 거대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앞에 대놓고 말해도 넘어갈 수 있는 능청스러움을 가지세요."
그렇게 말하며 도윤씨는 내 뺨을 톡톡 치며 한 번 쓸었다. 차가운 도윤씨 손길인 걸까, 마법인 걸까. 뺨에 오른 열감이 순식간에 내려가면서 다시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방금 전 말하던 주제가 무엇인지 기억났다. 테니스, 스쿼시, 수영. 그리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한 것들이 몇몇 가지가 더 있었다.
"농구는요?"
"그건 좀... 농구를 하기에 나쁜 몸은 아니지만 농구랑은 뭔가 어울리는 느낌은 아닌 걸요."
"그럼 축구는요?"
"축구도..."
"조기축구회나 사회인축구단 가입할까 했는데."
"거기에 수는 없도록 설정값을 짜 놓을테니 그만 포기하시죠."
"아쉬운데요, 그래도."
"그럼 구단주나 해 볼래요? 축구나 농구... 야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스케일이 남다르시네요."
안된다는 말을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하게 하는 도윤씨의 대답이었다. 스케일이 쓸데없이 커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만든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구단주라고? 어떤 구단주까지 가능하지? 이왕 할 거 영국 프리미어리그쪽 구단주로 부탁해볼까, 아님 프로 1부리그 중 하나로?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다.
"민혁씨, 뭘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찾아보니까 액션 영화 도입부에 암벽등반이 있는 걸 봤는데..."
"예..에?"
"실제로 산에서 암벽타는 것도 추천드리지만 광공 품귀 현상때문에 혹시나 죽으면 안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실내암벽등반이나 안전장치 있는 실외암벽등반장까지는 허용해드릴게요."
"네..."
"전세 헬기 동원해서 알프스 산에서 타는 스키는 괜찮구요. 스케이트 하시고 싶으시면 크리스마스에 스케이트장 하루 전세내서 조명 밑에서 수랑 타는 것도 좋겠네요."
"어쩐지 꿈꾸던 걸 말하시는 느낌인데요."
"수랑 재벌광공이 데이트할 때 돈을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혼자 생각 많이 해 봤거든요. 하나하나 따지다 보니까 스케이트장까지 생각이 미쳤네요."
"또 생각해 본 데이트는 없어요?"
나는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흐려진 얼굴이 아쉽다. 지금 도윤씨는 신나하면서 말하고 있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내가 도윤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눈은 반짝이고 입술은 말하느라 엄청 오물거리겠지. 이왕이면 뺨도 말하면서 점점 붉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윤씨는 자기가 생각했던 광공과 수의 데이트를 늘어놓았다. 도윤씨의 팔짱은 풀린 지 오래였다.
"일단 광공은 수와 데이트할 때에는 공간을 통째로 빌려야 해요."
"듣고 있어요."
"백화점에 쇼핑하러 갈 때에는 백화점에 광공과 수 밖에 없는거죠."
"그럼 쇼핑하기 편하겠네요."
"그래서 광공이 수가 부담스러워 하지만, 이거 이거 빼고 다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도윤씨만 믿을게요. 저 재벌로 태어나게 해 주셔야 그거 할 수 있어요."
"걱정마세요. 그리고 레스토랑에 갈 때에는 레스토랑도 통째로 빌렸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자기 집에 유명한 셰프를 불러서 요리를 즐기던가."
"이것도 새겨놓을게요. 또 생각한 건 없어요?"
"크리스마스 전날, 새해 전야, 아니면 수의 생일에 박물관을 통째로 빌려서 거기서 둘이만 자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천문대를 빌리는 것도 좋구요. 다른 의미로 로맨틱할 것 같으니까요."
"도윤씨는 그런 걸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나 보네요."
내가 도윤씨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도윤씨는 헛기침을 하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머쓱한지 다시 팔짱도 끼고는 차트를 찾는다. 그런 도윤씨를 보며 나는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도윤씨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수에 대해서 이제는 정말 모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늘 궁금해하던 수의 정확한 정의. 내가 환생할 광공이라는 정체는 수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도윤씨가 말하는 것을 보면 수라는 사람에 대해 감이 와요."
"이제 감이 오신다면 다행이네요."
"도윤씨는 내가 수를 찾아야 한다고 했죠."
"찾지 않고는 미쳐버릴 거라고 했죠."
"그리고 데이트나, 요리를 해주거나, 쫓아갈 정도로 절박해지거나. 내가 알기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런 관계는 흔치 않아요."
"그래서요?"
"수라는 사람은..."
나는 말하기 전에 한 번 말을 멈추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을 꺼낸다면 아마 엄청난 정적이 찾아올 것 같았다. 언어로 어떠한 한 사실이 확정되면서, 아주
흔들 수 없는 강력한 현실이 되어버리는 그 순간에 찾아오는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내가 환생하고 나서 사랑할 사람이란거죠?"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 처럼 이 공간이 매우 조용해졌다. 도윤씨와 나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너무나 조용해 도윤씨와 내가 주고받는 시선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무척 넓어진 것 같았다. 마치 흰 벽만이 가득찬 공간이 매우 넓어지고 나와 도윤씨가 무척 작게 느껴지는 이질감이 들었다. 아마 정곡을 찌른 대가겠지. 도윤씨는 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는 거죠. 이 미친 짓들을. 아니면 왜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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