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도윤씨가 어깨를 두드리자마자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폭포의 물줄기처럼 잠이 내 머리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정신없이 잤던 것 같다. 꿈도 꾸지 않고 그저 컴컴한 어둠만이 기억나는 잠을 잤다. 눈을 뜬 것은 나를 깨우는 도윤씨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민혁씨. 일어나세요."
"....도윤씨?"
눈을 뜨자 흐릿한 인상으로 지워진 도윤씨가 보였다. 아쉬웠다. 어제는 4K UHD영상으로 도윤씨를 보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화면에서 계단현상이 나는 240p짜리 동영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를 서운함과 답답함에 충동적으로 나를 깨우는 도윤씨를 잡아 침대 위로 당겼다. 그리고는 얼굴을 조물거렸다.
"도윤씨, 어제처럼 얼굴 보여주면서 알려주면 안돼요?"
"민혁씨, 이거 놔요!"
도윤씨는 당황한 듯 나의 손을 잡고 떼내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난 이미 도윤씨의 체계적인 계획으로 신체를 단련했는걸. 195센티미터의 거구이기도 하고. 도윤씨의 미약한 반항정도야 쉽게 제압 가능했다. 버둥거리는 도윤씨의 허리를 잡고 콱 끌어안았다. 손에 깍지까지 껴서 못 빼게 만들어놨다. 뒤에서 끌어안은 포즈로 어깨에 머리를 올리고 도윤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거대한 곰이 사람을 끌어안은 것 같은 자세였다.
"아 그러지 말고요."
"아니 얼굴에 왜 이렇게 집착해요!"
"도윤씨 얼굴이 기억이 안나거든요."
"얼굴 기억을 잘 못하시나보죠."
"지웠죠? 내 기억."
그러자 도윤씨가 잠시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떠 본 건데 맞을 줄이야. 아까 일어나면서 도윤씨 얼굴을 봤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이 보고 난 후에 단정하고 귀엽게 잘생겼다는 생각을 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눈이 어땠고 입매가 어떻고 하는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사람의 얼굴을 쉽게 잊어버린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도윤씨 때문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윤씨가 기억이나 능력을 주입해 줄 수 있다면 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광공이 되더니 난 좀 똑똑해진 것 같다.
"도윤씨, 들켰어요. 지운거 맞네."
"...."
"난 도윤씨 얼굴 봐서 좋았는데, 왜 도윤씨는 그렇게 잊어달라고 안달입니까?"
"...원래 관리자는 얼굴 보여주면 안된다니까요."
"난 원래 사람 얼굴 보면서 말하는 거 좋아해요."
"전생의 기억도 거의 지워졌을텐데 그게 말이 되나요."
"아무튼 그렇다구요. 진짜 안되는 거예요?"
도윤씨는 약간 목멘 소리로 변명을 했다.
"안그래도 어제 그 일로 혼났으니까 이제 이 손 좀 풀어요."
"혼났어요?"
"그럼 관리자가 해선 안된다는게 빈말인줄 아셨나요."
도윤씨가 혼났다는 말에 나는 결국 단단히 꼈던 손깍지를 풀었다. 도윤씨가 한숨을 쉬면서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근처를 톡톡 두드린다. 마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처럼. 나는 무언가 묻었나 싶어서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광공이면서 침 줄줄 흘리고 자지 마세요."
운동을 마친 뒤에 검은색 스포츠타올로 가볍게 땀을 닦고서는 블랙커피 한 잔을 마셨다. 샤워도 마치고 드레스룸에 가서 머리도 세팅하고 고용인들이 골라준 옷을 입었다. 오늘은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조금 더 가벼운 복장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광공은 거의 갓난아이같기도 하다. 모든 걸 옆에 붙어 다 해주는 걸 보면.
세팅을 마치고 도윤씨 옆에 서자 도윤씨가 들고있던 차트를 쳐다보았다. 아마 다음번에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아보려는 거겠지. 나는 조금 심술이 나서 내용이 보이지도 않는 차트를 건드려댔다. 도윤씨는 반응이 없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열 번 정도 차트를 툭툭 건드리면 도윤씨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툭, 툭. 여덟번째였다. 도윤씨가 차트를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인상이 흐려져 정확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대강 도윤씨가 약이 올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자꾸 그럴래요?"
"뭐가요?"
"툭툭 치는거요."
"광공은 이런 장난도 금지인가요?"
도윤씨가 우물거렸다. 아마 완전히 금지는 아닌가보지. 도윤씨가 우물거리는 것을 보자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신나서 도윤씨가 들고 있는 차트를 더 툭툭 쳤다. 도윤씨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삐딱하게 들고있는 차트만 봐도 도윤씨가 지금 살짝 화나는 정도를 넘어서 이젠 어이없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가 없네요. 재미있어요?"
"재미있는데요."
"실실 웃는 표정도 아니고 광공 미소 지으면서 그런 말 하니까 진짜 재수없어요."
"누구한테 배운건지 알잖아요."
"알죠. 제가 얼마나 잘 가르쳤는데."
도윤씨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차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도윤씨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몰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날 보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도 도윤씨를 바라보고서는 큰 몸을 구겨 앉았다. 앉아서 허리까지 좀 숙여야 도윤씨의 눈높이와 맞는다.
"무슨 생각하는데요."
"오늘 뭐 가르칠지요."
"뭐 가르쳐줄건데요."
"많긴 많아요. 아참, 외국어는 몇 개 국어 할 수 있었죠?"
"영어 알려주셨고, 프랑스어는 조금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럼 스페인어도 하나 추가해야겠네요. 중국어도 하나 더 하면 좋겠네."
"무슨 인터넷 쇼핑하듯 말하시네요."
"광공을 단기간 속성반으로 만드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도윤씨가 들고있던 차트에 꾸역꾸역 무언가를 또 써 넣는다. 저 차트에 무언가 적히고 나면 나도 방금 전에 도윤씨가 말한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편리하지만 좀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게임 커스터마이징 창 처럼 내가 마구 변한다는 것은. 다행인건 커마장인에게 커스터마이징되는 것 같다는 거?
"또 뭐가 있는데요."
도윤씨는 안그래도 작은 몸을 기울여가면서 차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턱을 괴고 도윤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윤씨의 얼굴이 보였다면 훨씬 더 이 시간이 잘 갔을 것 같다. 얼굴이 흐려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온갖 추측을 다 하게 된다. 지금은 아주 집중하고 있는 표정을 지을 것 같다.
"도윤씨."
"왜요."
"집중할 때 어떤 표정 지어요?"
나는 입술을 쭉 빼고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이런 표정?"
"헐."
도윤씨는 못 볼걸 보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민혁씨."
"네."
"광공에게 왜 잘생긴 얼굴을 준 줄 알아요?"
"글쎄요... 잘생기면 좋으니까?"
"세상은 잘생기면 다 납득해 주기 때문이에요."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요..."
"그러니까 얼굴 낭비하지 마세요. 얼굴 그렇게 쓰지 말라구요."
도윤씨가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또 금지목록이 하나 늘었구만. 이러다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으로도 사전 하나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씨는 내 얼굴을 톡톡 치며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얼굴 쓰지 마세요."
"알겠어요, 도윤씨. 그럼 뭐 가르쳐줄건데요."
나는 말을 슬쩍 돌렸다. 우스꽝스럽게 구겼던 얼굴을 다시 펴고 자연스럽게 말하니 도윤씨도 더는 혼내지 않았다. 도윤씨는 차트를 쭉 훑어보았다. 나는 문득 심심해졌다. 핸드폰 게임이나 할까. 그러고보니 저번에 셀카를 금지당한 이후로 도윤씨가 내 핸드폰을 다시 없애버린 것 같았다.
"도윤씨, 핸드폰 하나만 다시 만들어줘요."
"왜요?"
"그냥 폰게임이나 하려구요."
"안돼요."
"왜요."
"광공은 폰게임이나 컴퓨터게임하는 거 아닙니다."
"...그거 거짓말이죠?"
"왜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한국에서 게임을 못한다구요?"
"당연하죠. 광공이 폰게임깔아서 자동사냥 돌린다고 충전기 꽃고 화려한 화면을 집무실에 두는 게 상상이 되나요? 그리고 가챠돌리다가 맘에 안든다고 리셋하...아니, 리셋이 아니라 현질 쪽이겠지만 현질하고 루비나 골드 사서 지르는 것도 태가 살지 않아요."
"그럼 컴, 컴퓨터 게임은요!"
"컴퓨터 게임하다가 경쟁전이나 승급전에 지는 것도 용납이 안 돼요. 광공에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지는 그림이 그려지는 건 안된다고요. 그리고 지면 욕할거잖아요. 게임 하면서 욕 안하는 사람 없어요."
속사포로 쏟아지는 게임 금지에 나는 폰게임이 무어냐, 윈도우 기본게임인 프리셀과 지뢰찾기도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마 그리고 그 추측은 맞겠지. 광공의 컴퓨터에는 기본 게임조차 지워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광공이 할 수 있는건 뭘까. 학생도 중간고사가 끝나면 허락을 받고 PC방에 가는데 광공은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 광공은 신생아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럼 광공이 가질 수 있는 취미는 뭡니까?"
그러자 도윤씨가 손을 휘둘렀다. 내가 앉아있는 곳에 편해보이는 검은색 소파가 하나 생겨났고 난 저절로 소파 위에 털썩 하고 앉혀졌다. 그리고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무릎 위에 책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거나 읽으세요."
광공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삶을 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