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도윤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뭐가 문제지. 도윤씨의 얼굴을 그대로 쥔 채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도윤씨의 눈이 점점 커졌다. 눈이 동그래지다가 다시 작아지더니, 이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윤씨, 뭐가 문제에요?"
"광공 될놈은 뭘 해도 광공 된다더니..."
"예?"
"광공 후보라기엔 처음 행실이 너무 허당기가 넘쳐서 대형견공 부서에 갈 사람이 잘못 왔나 이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거 보니까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도윤씨는 내 손을 볼에서 잡아 뜯어내듯이 떨어뜨렸다. 도윤씨는 긴 손가락으로 내 손을 털어내듯 치웠다. 도윤씨는 어쩐지 냉정해보였다.
"광공이지만 아무나 홀리고 다니지 말아요. 위험하네요. 광공은 수 하나만 보고 미쳐돌아가야 하니까. 괜히 미칠 광자 붙여서 광공이라고 하겠어요?"
"이번에는 몇 점 감점인데요, 도윤씨?"
"10점이요."
"알겠어요, 주의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사람같은 사람과 대화를 하니 신이 났다. 하지만 도윤씨가 실실 웃지도 말고, 주접스럽게 굴지 말랬으니까. 나는 도윤씨가 혹여나 마음이 틀어져 다시 흐릿해진 인상에 평범한 옷차림을 한 '관리자'로 돌아갈까 봐 태연하게 굴었다.
"민혁씨, 이제 밖으로 나갈거에요."
"네, 도윤씨."
"절 수행비서쯤으로 생각하세요. 어차피 광공으로 환생하면 수행비서에게 뭔갈 시키는 데 익숙해지긴 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제게 뭘 시키진 마세요. 전 지금 민혁씨께 도움을 드리러 왔으니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도윤씨가 먼저 나가라는 뜻이었는데 도윤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재벌 3세가 일개 수행비서한테 문까지 열어줘요?"
"문...열어줄수도 있지 않나요?"
"3점 감점입니다. 광공은 일종의 유리 온실 속에서 곱게 큰 멸종 위기종 시베리아 호랑이 같은거라구요. 이 세계가 광공이 손끝하나 허투루 쓰는 일이 없도록 아주 친절하게 도와줄건데 뭣하러 이런 수고를 해요."
"네, 도윤씨."
"문은 제가 열고 나가면 알아서 밖에서 잡아 줄 거니까 그냥 나오세요."
"잡아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마세요."
도윤씨는 간결하게 맥을 끊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도윤씨가 만들어낸 허상들이 인사를 하며 회사를 나서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윤씨가 한 번 겪어보자고 했던 광공의 하루가 지나기까지는 아직 먼 걸까. 회사에서 퇴근을 했는데도 광공이 지켜야 할 것들은 끝이 없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들어가 한숨을 쉬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씨와 정장을 입은 한 허상이었다.
"민혁씨."
"네."
"운전기사 있어요. 뒤에 타세요."
"몇점이에요?"
"3점 감점이요."
광공이 지켜야 할 것들은 정말 끝이 없다.
집에 돌아오는 길도 녹록치는 않았다. 고층 빌딩 꼭대기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을 들러서 한바탕 도윤씨에게 잔소리를 듣고 감점당하고 와야 했었다. 레스토랑에서 에스코트를 받아 프라이빗한 룸으로 이동한 뒤에 가져온 메뉴판 때문이었다. 주문에 지나친 공을 들여 고민하고 끙끙댔다고 한 번, 가격이 왜 안 써있냐고 물어봤다가 한 번, 도윤씨에게 저 알러지 없냐고 물어봤다가 한 번. 도윤씨는 그것이 광공의 미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 알려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도 주문되냐고 한 번 더 농담삼아 물어봤다가 광공은 소주, 맥주, 소맥 말아먹기도 금지라는 소리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을 주문할 수 밖에 없었다.
"도윤씨."
"네, 민혁씨."
"야식먹으면 감점되나요?"
"어느 야식을 먹으면 감점될까요?"
"어..."
도윤씨가 레스토랑에서와는 달리 미묘하게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물어보았다. 평소의 도윤씨는 이 공간의 힘인지, 아니면 도윤씨 개인의 선택인지 인상이 흐려서 그저 못마땅해하고 있구나, 정도로 도윤씨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도윤씨는 세세한 표정까지 볼 수 있었다. 진짜 사람이 가르치는 것 같아 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지만, 제일 좋은 점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광공스러운지 아닌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도윤씨는 내가 광공스럽지 않은 행동을 하면 눈썹 부근이 먼저 살짝 움직이곤 했다.
"음...족발이나 닭발은 안될 것 같구요."
"맞아요."
"국물있는 건 안될거구요."
"네."
"치킨이나 피자가 된다면 이렇게 물어보지는 않았을 거 같고."
"좋아요."
"그럼 적당히 치즈스틱 정도로 타협을 보면 안될까요?"
"거기서 치즈스틱이 왜나옵니까."
"치즈스틱도 안된다면 과자 정도는..."
"...."
"과자도 안 되는 거군요."
"네."
"그럼 적당히 볶음 라면으로 하겠습니다."
국물없고, 손으로 들고 먹는 것도 아니고, 기름기가 너무 많지도 않고, 튀긴 음식도 아니니까 볶음 라면정도면 꽤 괜찮은 느낌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도윤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윤씨."
"네."
"지금 눈썹 완전 일그러지셨거든요."
"그건 무슨 뜻일까요?"
"그건 제가 뭔가를 또..."
"광공은 야식이 금지에요. 평생 먹을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광공앞에 누군가가 떡볶이를 더블치즈로 토핑해서 먹어도 한입만을 외치면 안된다는 뜻이죠."
도윤씨는 냉정하게 말하면서 내 어깨를 약올리듯이 두드렸다. 어차피 여기에서 도윤씨가 주는 음식만 먹을 수 있으니 야식을 먹을 수는 없겠군. 나는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어 도윤씨를 살짝 째려보았다. 그러자 도윤씨가 같이 째려보며 말한다.
"민혁씨."
"네."
"광공은 그렇게 째려봐도 안됩니다. 그렇게 째려볼 수가 없어요!"
세모낳게 떴던 눈을 조용히 밑으로 내렸다.
"광공은 눈을 깔아 밑으로 소심하게 내려보는 안됩니다. 3점 감점."
도윤씨가 내 눈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세모 네모로 뜨던 눈을 도로 곱게 떴다. 어쩔수 없지.
"도윤씨."
"네."
"언젠가 환생하면, 진짜 도윤씨가 가르쳐 준 규칙을 다 어기고 방탕하게 살 거에요."
"민혁씨."
"네."
"민혁씨가 광공이 지켜야 할 규칙을 너무 많이 어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어떻게 되는데요."
"재교육 받아요."
재교육이요? 나는 지난 며칠간에 걸친 광공 교육을 떠올려보았다.
"그럼..."
"그럼 뭐가요?"
"그럼 다신 도윤씨에게 받나요? 재교육은?"
나는 도윤씨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도윤씨는 처음으로 당황한 듯해 보였다.
"민, 민혁씨는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죠. 당연히."
"왜요?"
"왜긴 왜냐뇨. 광공교육인데 당연히 선생님이 중요하죠."
3월에 학교에 가면 가장 걱정하는 건 담임선생님이 누굴까였다. 광공 교육도 굉장히 팍팍하고 힘들긴 했지만 나름대로 도윤씨가 다정하게 대해 줄 때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육 다시 받을래? 라고 물어보면 좋다고 말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윤씨가 다시 해 준다면 적당히 참고 다시 한 번쯤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윤씨가 다시 재교육 해주면 한 번쯤은 다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마운 말이라고 해야할지, 위험한 말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도윤씨는 난처하면서도 조금은 즐거워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도윤씨가 늘 나에게 하듯 어깨를 두드리려고 했다. 광공의 규칙을 어길 때 마다 나에게 규칙을 가르쳐 주며 도윤씨는 어깨를 두드려 응원해주곤 했으니까. 도윤씨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도윤씨는 은근슬쩍 피했다.
"왜 피해요?"
"어깨 두드리는 건 저만 할게요."
도윤씨는 어쩐지 조금은 경계하듯 말했다.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나는 갈 데 없는 내 손을 잠시 허공에 띄운 채로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도윤씨가 차고 있는 시계에서 삐빅거리는 신호음이 들린건. 동시에 도윤씨의 인상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도윤씨의 마지막 얼굴은 굉장히 난처하고, 뭔가 놀라워보였다. 하지만 곧 흐려진 인상 덕에 도윤씨의 섬세한 표정은 마치 오래된 건물의 벽돌 끝처럼 뭉개지고 말았다.
"...민혁씨."
"시간이 다 되었어요? 이제 도윤씨 얼굴은 더 못보나요?"
"네. 그렇게 되었네요."
도윤씨는 잠시 들고 있던 차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윤씨는 말없이 차트를 바라보다 어쩐지 피곤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민혁씨가 오늘 광공의 하루를 살아보자를 했는데... 100점만점에 91점이 감점되었어요. 그만큼 오늘 배운 게 많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럼 9점이네요. 운전면허면 취소감인데."
"좀 특별히 고생했으니 오늘은 조금 쉴게요."
도윤씨는 손을 휘저어 침대를 마련해 주었다. 티끌 하나 없는 흰 침대에 흰 베개, 흰 이불이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커다랗고 푹신한 슈퍼킹사이즈의 침대에 호텔침구처럼 세팅되어 있었다.
"전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때가 되면 깨워 줄게요."
나는 정장을 벗고 검은 가운을 걸치며 도윤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뭉개지고 흐려진 인상에서도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도윤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과는 달리 표정을 알 수 없다. 안개가 낀 것 처럼 답답해 나는 침대에 들어가는 와중에도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도윤씨는 그런 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며 말했다.
"푹 자요, 민혁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