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10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10/82)

00010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갈색에 가까운 반곱슬 머리. 키는 한 175센티미터쯤. 눈도 옅어보였다. 전반적으로 색소가 부족해보이는 인상. 입가에 미소는 띄고 있었지만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보고하는 내내 그 사람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전부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꼼꼼히 보았지만 무언가 충격적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기억은 뇌 속에서 멈칫거리며 저장되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 사람만 허상이 아닌 것 같았다. 유일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느낌이 드는 사람. 아무것도 현실감이 없는 이 공간에서 그 사람만 유일하게 생동감이란 것이 있었다. 잠자기 직전 눈을 감았을 때 듣는 나의 맥박소리처럼. 나는 그 사람이 나가고 난 뒤 문이 확실히 닫힌 것을 확인한 뒤에 의자에 푹 기대 앉았다. 혹시나 사람이 갑자기 들어와서 광공스럽지 않은 추태를 보일까봐 의자를 문 반대 방향으로 돌려 앉기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이면서.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도윤씨."

[네.]

"아까 그 사람 뭐예요?"

[누구요?]

"방금 전에 보고한 사람이요."

[왜요?]

도윤씨가 이상하다. 말을 질질 끌었다.

"아니, 알잖아요. 그 사람 뭐냐니까요."

[허상이에요. 별거 아니라니깐요.]

"아니 그게 어떻게...."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내가 별거라고 말하는데 지금 무슨 말이세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좀 내밀고 있는데, 문득 이것도 분명 감점 요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장내방송으로 감점이라고 나오지가 않았다. 도윤씨가 답지않게 슬슬 빼며 실수하는 모습에, 나는 무언가 가닥이 잡혔다.

"도윤씨."

목소리 쫙 깔고. 미간 살짝 찌푸리고. 자세 바로 하고.

"그 사람 도윤씨죠?"

[.....하.]

"맞죠?"

[아닌데요.]

"....."

도윤씨가 원래의 그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나는 내 짐작이 예리했지만 잘못된 곳을 찔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윤씨가 원래 페이스를 찾고서는 단호해졌다. 더 이상 찌를 구석이 없어져버린 탓에 나는 조금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늘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계세요. 5점감점입니다.]

원래 페이스를 찾은 도윤씨의 친절한 목소리가 장내에 명랑하게 울려퍼졌다. 내가 도로 그 말에 어깨와 허리를 폈다. 어쩐지 일이 꼬이는 듯한 느낌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태블릿PC와 서류를 보았다. 도윤씨가 미리 손을 써 둔 탓인지 보고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유의하면서 서류를 읽는다. 모든 내용을 숨쉬듯이 읽어내려가는 내 모습에 나도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민혁씨가 좀 신기하네요. 역시 광공이라서 그런가?]

"...도윤씨?"

[방금 그 사람, 다른 관리자쪽에서 잠깐 부탁한 '수'에요.]

"수가 사람이었습니까."

[민혁씨....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공처럼 수도 다 사람입니다.]

"그,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잠시 맡아둔 '수'인데 귀신같이 알아차린 걸 보면 좀 신기하네요. 저도 궁금해서 잠시 민혁씨께 보여드린거라.]

"뭐가 궁금하셨길래요."

[민혁씨가 자기가 만나야 할 수를 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수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에요?"

[꼭 만나야죠, 그럼.]

"그럼 도윤씨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 같아요? 전 그 사람 잘 알아볼 것 같아요?"

[....지나치게 예민하네요. 너무 잘 알아볼 것 같아요.]

"그건 칭찬으로 들을게요."

드물게 들을 수 있는 도윤씨의 칭찬에 나는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옅고 시린 미소가 내 입가에 걸렸다.

[민혁씨, 미소는 어쨌거나 이제 꽤나 멋있네요.]

이어진 임원들과의 회의는 신기함의 연속이긴 했다. 마치 판타지 세상에서 스킬을 쓰는 것 같았다. 성에 차지 않거나 미봉책식 보고는 저절로 눈에 들어와 반려하고, 괜찮다 싶은 것들은 희한하게도 귀신같이 보이곤 했다. 영국의 사립고등학교와 미국의 대학교라는 어마어마한 학력, 차기 그룹을 이어받을 유망주지만 자기 사업체를 키워본 경험이 있다는 멋드러진 타이틀이 그저 구색 좋은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회의를 마친 뒤 머리를 쓸어넘기고 비서실 쪽에 연락을 해 냉수 한 잔을 가져오라 말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노크한다. 들어오라 말한 뒤에 얼굴을 슬쩍 보았다. 혹시 그 사람일까. 다른 관리자가 맡겼다는 사람.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은 처음 본 터라 궁금하고 설렜다. 당신은 무슨 교육을 받는지, 당신 관리자는 어떤지 궁금함을 가득 품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실망했다. 냉수를 내려놓고 가는 사람은 도윤씨가 만들어낸 여느 허상과 다를 것 없이 희미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쩐지 조금 아쉬워져 도윤씨에게 물어보았다.

"아까 그 사람 갔어요?"

[시간이 시간인 만큼. 돌려보냈어요.]

"네."

[왜요, 아쉬워요?]

"좀...그렇죠. 아무래도 저와 같은 사람은 처음 만나다 보니."

[그런가요.]

"신기했어요. 어쩐지 인상이 뚜렷해서."

[인상이요?]

"좀 사람같았어요. 도윤씨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어쩐지 생동감이란게 좀 부족한 느낌이라..."

[그런가요?]

"좀 흐릿하다고 해야 할까요..."

[미안해요.]

"아니, 그게, 미안하실 것 까지는 없고요. 그냥 정말 사람이랑 대화한다는 기분이 드니까 어쩐지 좀 신이 났나봐요."

도윤씨는 잠시 침묵했다. 도윤씨가 미안하단 말을 하게 하다니, 나는 괜히 내가 도윤씨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안절부절했다. 침묵이 길어져 가고, 결국 참지 못한 내가 일어섰다. 침묵이 어색해져 못 견딜 것 같아 내가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하고 문을 향해 들어오라 말했다.

"....?"

문이 열리자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한 175센티미터정도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방금 전 그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색소가 옅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겨서 잘 생겼다, 예쁘다, 같은 판단을 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면, 이 사람은 다른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단정하고 깨끗한 느낌이 강했다. 잘생겼니? 라고 물어본다면 그 사람 참 정갈하게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렸다.

평범하고 차분한 머리스타일에 도자기같은 깨끗하고 흰 피부. 또렷하고 선명한 눈과 야무지게 다문 입술. 어딘가 이질적일 정도로 튀어보이는 느낌은 없었지만 도윤씨가 만들어 낸 허상과 다르게 뚜렷한 존재감을 보인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당신도 또 다른 수에요?"

그 사람이 조금 난처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여기 다른 사람도 왔다 갔어요. 나랑 말해도 괜찮을거예요. 나는 광공이래요."

여전히 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말하면 안되는 규칙이라도 있나? 나는 너도 죽어서 왔냐, 당신은 수냐, 내가 찾아야 할 사람은 너냐, 같은 질문이 마구 맴돌아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이 사람이 방금 전 사람처럼 보고만 마치고 또 사라지기 전에 한번이라도 좀 제대로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초조했졌다.

"도윤씨, 이 사람이랑 대화하면 안되는거예요?"

도윤씨도 말이 없었다. 미치겠네. 왜 다들 이렇게 말이 없지.

"도윤씨?"

"괜찮아요. 말 해도 됩니다."

"....도윤씨?"

도윤씨의 말이 감점안내사유 장내방송으로 나오지 않고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선명한 인상의 사람에게서 들려온다. 그럼 이 사람이 도윤씨라는 거야? 방금 전 들어온 사람이 뺨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손을 올리자 익숙한 차트가 보였다.

"민혁씨가 좀 심심해 하는 것 같길래."

"도윤씨에요?"

"네. 오늘만 좀 놀아드릴게요. 원래 관리자는 얼굴 보여주는 거 아닌데, 너무 심심해 하시니까..."

"...."

도윤씨의 인상을 선명하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엄격한 목소리 때문에 깐깐한 사감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PT 트레이닝을 계획적으로 잘 하는 모습 때문에 PT 트레이너같은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아주 짧게 자른 머리거나 혹은 대머리인가 상상도 하면서 속으로만 나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도윤씨의 모습은 생각과 많이 달랐다. 난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도윤씨의 볼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 도윤씨의 조그만 머리통이 손 안에 너무도 쉽게 들어왔다.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세워 도윤씨의 볼을 지긋이 눌러 세로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딘가에 홀린 것 같았다.

"생각한 거랑은 많이 다르네요, 반가워요, 도윤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