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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9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9/82)

00009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아침식사를 끝나고 샤워를 막 끝마친 나는 검은 샤워가운을 입고 나와 욕실의 상태란걸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일단 방인 줄 알고 다시 한 번 나왔다. 커다란 화장실에 창문이 있고 창문 앞에는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욕조 옆에 와인셀러도 있었지. 와인셀러에 들어있는 와인을 생각없이 꺼내는데 도윤씨가 이번 2017년에 맛 좋은 와인으로 선정된 와인이라며 소개를 하길래 괜히 쫄려서 집어넣었다. 도윤씨는 그 정도 와인이면 매일 한 잔씩 저녁에 목욕을 하며 즐길 정도는 된다며 설명해 주었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와인을 도로 공손하게 넣었다. 마치 넥타이핀을 돌려 넣었을 때 처럼.

욕조 옆쪽에 샤워실이 있기에 가 보았더니 샤워실도 독특하게 샤워 부스도 아니었다. 그저 넓은 공간에 샤워를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공간이 좁아서 공간을 활용하겠다는 의지따위는 보이지 않은 넓은 샤워실을 보자니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씻어야 겠다 싶어서 열심히 샤워하던 도중 어김없이 도윤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혁씨, 샤워 할 때 다리 벌리고 때까지 밀지는 말아주세요. 어차피 따로 샤워할 때 수는 보지 않을 거니까 감점은 안 되지만 어쩐지 판타지가 박살나는 기분이네요.]

"도윤씨, 샤워하는 것도 보시는건가요...왠지 격렬하게 감시당하는 기분이네요."

[민혁씨 거기도 제가 우주파괴용으로 만들어드리면서 볼 거 다 봤는데 새삼스럽게 뭘요. 부끄러워 마세요.]

"그건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자세가 공손해진다. 마치 드라마에서 노래가 나오고 남자 주인공이 상체를 탈의한 상황에서 물을 맞고 서 있는 것처럼 샤워를 하려고 했다. 샤워를 하기 위해서 물을 틀자 깨달았다. 샤워기가 없었다. 당황해서 거품투성이인 얼굴을 들어 위를 보자 샤워기는 간데 없고 천장에서 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샤워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서 옷을 고르는 것은 걱정했던 것 보다 어렵지 않았다. 잠시 거대한 옷더미와 시계 더미, 그리고 커프스와 넥타이핀 앞에서 고장난 컴퓨터마냥 버벅대던 나를 구해준 건 고용인이었다. 고용인 두 명이 와서 내 앞에서 옷 입는 것을 서포트해주며 이것 저것 골라주는 동안 도윤씨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퍼졌다.

[앞으로 옷은 고용인들이 골라줄 거예요.]

"제가 옷을 고를 일은 없다는 거죠?"

[그렇죠.]

"어쩐지 이상한데요."

[뭐가요?]

"도윤씨가 뭔갈 가르쳐 줄때는 늘 옆에 있었잖아요. 옷도 도윤씨가 뭔가 골라줄 줄 알았어요."

[제가요?]

"계속 제 옆에 계셨는데, 없으니까 뭔가 섭섭하단 뜻이예요."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짧게 웃어보였다. 도윤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도윤씨?"

[...네?]

"말이 없으셔서요."

[...아니에요. 의외로 허를 찔렸다는 기분이라서.]

"뭐가요?"

[신경쓰지 마세요. 옷은 다 입으셨나요?]

그러고 보니 고용인들이 커프스 단추까지 끼워주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아주 짙은 남색빛이 도는 쓰리버튼 베스트까지 입은 정장 차림이다. 이름이 소매 끝에 은사로 새겨진 흰 와이셔츠는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워져 있지만 워낙 체격이 예술적으로 좋아 답답해 보이기 보다는 권위가 있고 차가워 보였다. 같은 색의 넥타이에는 푸른색과 녹색의 보석이 박힌 넥타이핀이 있었다. 넥타이핀과 세트인 커프스단추는 굵은 손목과 크고 우아한 손과 잘 어울렸다. 그야말로 도윤씨가 보여준 여러 장의 선배 광공들의 모습에 어느 하나 뒤질 것이 없어보였다. 나는 나의 모습을 잠시 넋나간 듯이 바라보았다.

[잘 생겼죠?]

"그렇네요."

[이제 외투 입으셔야죠.]

"아 네."

내가 봐도 좀 잘 생겼다. 나는 나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는데 고용인이 코트를 들고 왔다. 나도 모르게 밖이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딩은 없나요?"

[광공은 패딩 금지에요. 패딩이 뭐야. 코트만 입고 평생 살라구요!]

"아니 그렇게까지 화를 낼 정도로 광공의 미덕에 어긋났나요?"

[네. 패딩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봤어요. 10점 감점해버릴거예요.]

"진짜요?"

[.....]

도윤씨가 답이 없자 나는 참 잘못했나보구나 싶었다. 그저 나는 입을 얌전히 다물고 순순히 고용인이 가져다 준 코트를 입었다. 코트는 소매를 빼고 어깨에만 걸치고 다녀도 괜찮다는 추천에 그렇게 해 보았더니 정말 멋있었다. 이윽고 고용인이 건네준 핸드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키고 전신거울 앞에서 한쪽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이 찰칵 소리가 난다. 기본 카메라 어플로 찍어도 잘생김이 화면을 뚫고 넘실거린다.

[지금 셀카 찍으셨나요?]

"아."

[맨날 그렇게 '아'만 하실건가요. 패딩도 패딩이지만 셀카.... 3점 감점입니다. 광공은 셀카 금지구요, 기본 어플 쓰셨으니까 3점만 감점처리에요.]

"아니 그럼 어플도 못씁니까?"

[광공이 휴대폰을 쓸 때에는 일, 가족, 수 이 세가지 뿐이예요.]

"광공은 친구도 없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경쟁사에 있는 죽마고우까지는 봐 드리죠. 어쨌든 그 핸드폰에 토끼 귀나 곰 귀를 씌우는 필터가 달려있는 카메라 어플 따위 받을 생각 하지 마세요.]

"안할 겁니다."

사실 하려고 했는데.

[하고 싶으면 연예인 하시던가요.]

"매번 어떻게 제 마음을 이렇게 읽으시나요, 도윤씨..."

[당신 얼굴에 너무 감정이 잘 보여요. 이김에 이것도 지적해야겠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게 하세요. 이것도 3점 감점.]

"예, 예...."

계속 되는 감점에 나는 출근이나 해야겠다며 서둘러 현관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너무 서두른듯 구두를 신다가 한쪽 발에 구두를 신고 한쪽 발은 양말만 신은 발로 깽깽이발을 하며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춤을 추었다. 아... 이건 안봐도 감점이다.

[민혁씨, 3점 감점입니다.]

회사에 도착한 이후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도윤씨,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사가 데려다 줄 거예요. 그나저나 민혁씨 경영천재인건 알아요?]

"경영 천재요? 경영 수업도 받은 적 없는데요?"

[그런 건 제 선에서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들어가거든 회사에 민혁씨의 얼굴이랑 이력이 있을 거예요. 한 번 보고 들어가요.]

기사가 데려다주는 대로 회사로 가 보니 과연 민혁씨 말 대로 나의 사진과 함께 엄청난 이력이 써 있었다. 영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뒤에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도 대학을 나와 학위도 두 개. 게다가 대학원과정까지 미국에서 밟고 왔는데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엄청난 천재적 두뇌의 사람이다.

[대단하죠?]

"이건 미쳤는데요."

[음. 민혁씨는 아버지 기업에서 나와 작은 사업으로 시작했어요. 주식도 대박이 나고 아버지 힘을 빌리지 않은 사업도 대박이 나 지금은 어엿한 신흥 기업의 대표이사에요. 이건 어때요?]

"더 못 믿을 이야기 같습니다. 저는 로또도 된 적이 없어요. 붕어빵타이쿤 해 봤는데 저 거기에서 붕어빵 다 태워먹어서 사이버 붕어빵 가게도 말아먹었거든요."

[여기선 아닌가 보죠. 민혁씨 아버지가 아주 흐뭇해하며 세 자녀 중 그룹을 이을 사람으로 민혁씨를 낙점하고 있어요.]

나는 그야말로 우주 너머로 날아가는 느낌이 들며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참 다양한 의미로 이런 아득한 사람이 나라니. 도윤씨가 조근조근 설명하는 동안 난 수행원의 안내로 꼭대기실에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대표이사 지민혁.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5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일제히 공수 인사를 했다. 나도 엉겁결에 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도윤씨의 스피커가 진동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이건 나도 드라마에서 봐서 좀 알지. 내가 인사할 짬이 아니를 이야기를 하시겠구나.

[민혁씨, 뭘 잘못했을까요?]

"제가 인사하면 안되죠?"

[네. 들어오자마자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시고 보고하라고 하면 됩니다. 3점 감점되셨어요.]

"정말 사정없이 깎여나가네요..."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회장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보고해. 그 말에 다시 한 번 5명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네, 하고 대답했다. 별도로 마련된 대표이사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쪽에서 사람들의 가벼운 한숨이 슬쩍 들렸다. 아마 내 모습에 숨통이 꽉 눌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거겠지. 방금 전에도 거울을 보며 느꼈다. 이 외모는 잘생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위압감이 있다. 판타지로 친다면 블랙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앉아 있는데 갈색 반곱슬 머리에 175센티미터 정도 되어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내가 키도 덩치도 커서 그런지 그 사람은 조그마한 동물같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는 나 자신을 느끼며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나에게 보고를 이어 나갔다. 그 사람에게 풀어지는 나 자신을 보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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