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민혁씨."
"예. 갑자기 이름만 부르시니까 괜히 불안하네요, 도윤씨."
도윤씨가 방긋 웃었다. 웃지마요 도윤씨. 수라는 사람을 잡기 위한 추노 시뮬레이션만 계속을 외치며 서른네 번을 돌리는 도윤씨의 집요함을 이미 겪어서일까. 서른네 번의 시뮬레이션 시작동안 한 번도 웃음과 친절함을 잃지 않은 도윤씨의 인내력에 나는 경외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도윤씨가 웃을 때마다 또 어떠한 인내력이 발휘될까 나는 두려움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웃지마요 도윤씨. 이름만 부르지도 말아주세요, 도윤씨.
"민혁씨와 함께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를 제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요."
"그런 것 까지 분석을 하실 정도로...사려가 깊으시군요."
"아무래도 민혁씨는 광공에 대한 기초개념이 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민혁씨가 살게 될 집에서 하루 정도 생활하는 모습을 보려고 해요."
"예? 집을 먼저 주신다고요?"
"그러니까 광공의 하루를 살아보자는 거죠. 운전면허 보셨죠?"
완전히 전생의 기억을 지운것은 아닌 듯 드문드문 남아있는 기억들이 있었다. 도윤씨가 말했다. 아마 난 광공 교육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찌꺼기처럼 남아있을텐데, 그 중에도 기억이 좀 많이 남은 편이라고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운전면허라면 전생의 기억 중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기능시험이 기억난다. 차 안에 달려 있는 기계채점기에서 삑-소리가 나면서 감점요인을 하나하나씩 읊어주었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 3점 감점입니다. 중앙선 침범으로 30점 감점입니다. 탈락입니다. 차에서 내려 기능장 시험으로 돌아가세요.
"민혁씨가 운전면허처럼 광공이 해선 안되는 행동을 할 때 제가 장내 스피커로 알려드릴거에요."
"광공면허 장내기능시험장이었던건가요, 여기..."
"좋은 비유네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도윤씨가 시작하자고 말하자마자 내가 눈을 뜬 곳은 침대 안이었다. 저번에 본 인간미와 생활감이 동시에 없던 그 인테리어를 하고 있던 집인듯 했다. 일단 이불이 짙은색이었다. 온통 어두컴컴한 주위에 내가 잠시 얼굴을 찌푸리면서 기지개를 키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장내 스피커에서 도윤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울려퍼졌다.
[민혁씨, 기지개는 허용이더라도 머리 긁으시면서 일어나시면 3점 감점입니다.]
진짜 기능면허시험이냐고! 진짜 기능면허시험이냐고!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두 번 말하는 것은 광공의 품위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지적받은 것이 기억나 꾹 눌러 참았다. 내가 그 동안 도윤씨에게 듣고 파악한 대략적인 광공의 상은 드라마에서 본 재벌 남자주인공의 삶과 얼추 비슷한 바가 있었다. 나는 최대한 절제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내쉬었다.
[심호흡은 감점 대상 요소가 아니지만 땅이 꺼질듯이 쉬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한숨은 감점 요소에요! 안내드립니다.]
네 도윤씨. 감사합니다. 속으로 말하며 나는 커튼을 손으로 걷었다. 암막커튼의 무게가 있어 잘 걷히지 않았다. 무거운 암막커튼을 손으로 걷어내려고 하는데 암막커튼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왜 안 움직여? 나는 암막커튼을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 동안의 운동으로 다져진 팔 근육때문이었을까. 암막커튼이 두두둑하고 뜯기는 소리가 났다.
"헐 이게 뭐야."
[민혁씨. 광공은 쓸데없는 줄임말과 유행어 금지입니다. 유의하도록 하세요.]
"아니 헐도 안돼요? 헐도!"
[헐, 대박, 와, 쩐다, 진짜는 대답으로 금지합니다. 그리고 헐 두번 말하셔서 10점 감점되셨어요.]
입을 다물고 살아야지. 나는 속으로만 투덜대며 암막커튼을 잡고 흔들었다.
[암막커튼은 자동입니다. 침대 옆에 버튼 있으니까 눌러서 해결하세요.]
"이건 고용인 없어요? 고용인이 와서 열어주고 아침까지 딱 좋겠구만."
"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민혁님."
"왁!"
어느 새 내 뒤에는 고용인이 서 있었다. 단정한 복장을 한 고용인이 아침을 차려 드렸으니 나와서 드시라는 전언과 함께 사라지자 도윤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전 호들갑을 떨며 놀라던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도윤씨는 지금도 웃고는 있겠지. 아주 불길하고 인내심 많은 표정으로.
[고용인에게 그렇게 경박스럽게 놀라지 말아주세요....감점 5점.... 벌써 감점 18점 되셨어요. 일어나자마자 지금 10분도 안 되셨거든요, 민혁씨.]
도윤씨의 타박아닌 타박을 듣고서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나가면서 나의 잠옷을 보니 검은색 옷에 긴 길이의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집에 있는 커다란 미술품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정말 조각같이 잘 생기고 키가 큰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도윤씨의 스파르타식 운동스케줄로 인해 어깨도 넓고 가슴도 떡 벌어진 사내가 거기 서 있었다.
새삼스럽게 도윤씨의 지도력에 감탄하며 거실로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 나가니 거기에는 블랙 커피 한 잔과 신문 몇 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걸어가 식탁에 의자를 빼고 느릿하게 앉았다. 또 털썩 주저앉듯 않다가는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고용인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흰 도자기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노라니 정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거 영어 신문이잖아...?"
[민혁씨, 전생에 영어는 못하셨나봐요. 영어 능력은 지금 제가 조정해드릴게요.]
잠시 후 신기하게도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토록 신비하고 간단한 능력습득이라니 조금은 기뻤다. 적어도 로스앤젤레스 날씨는 어떻습니까? 나는 기분이 좋습니다 부터 배울 필요가 없어진 거 아닌가. 나는 영어 신문을 내려놓은 뒤에 다른 신문을 하나 집어들었다. 역시 외국어였다. 모르면 도윤씨가 또 능력을 조정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집어들었다.
"이건 프랑스어네."
신기하게도 프랑스어는 눈에 들어왔다. 아주 전문적인 용어까지는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띄엄띄엄 읽을 수는 있었다. 아마 이것도 전생의 기억이겠거니 감은 잡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영어는 잘 모르는데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었던 기억이라니. 나는 도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잠시 깊어지는 고민에 잔을 들이키자 커피가 얼마 넘어오지 않았다. 커피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꺾어 남은 커피의 바닥까지 털어 먹은 뒤에 고용인에게 물었다.
"저기, 그래서 아침은 언제 주나요."
"예?"
"아침이요."
"아침으로는 늘 블랙커피 한잔을 드셔서...죄송합니다. 무엇을 준비해 드릴까요?"
"아. 감점당하겠다."
[커피 한잔으로 시작하는 저탄수화물 무지방의 광공 아침식사 식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게다가 고개를 그렇게 끝까지 들면서 커피를 드시다니, 광공은 아이스 음료일 경우 빨대로 소리내면서 바닥 긁어먹기 금지, 그리고 뜨거운 음료면 고개 들어서 마지막까지 마시기 금지에요. 민혁씨. 술 빼고요. 10점 감점이에요.]
광공기능시험에서 도윤씨의 말은 무슨 마법같은 것이라도 걸려있는지 감점당하는 족족 감점행동을 할 의욕이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커피 말고 해쉬브라운과 달걀프라이, 그리고 토스트와 과일에 면 요리를 얹어먹는 푸짐한 한국식 호텔 아침식사를 기대하던 마음이 반토막으로 꺾였다. 그래, 광공인데 무엇을 바랄까. 아침으로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광공의 아침부터가 결코 쉽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