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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5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5/82)

00005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뒤에 검은색 수건으로 가볍게 땀을 훔치면서 숨을 깊게 내쉬었다. 라벨도 달려 있지 않을 정도의 프리미엄 생수병을 따며 가볍게 물을 마시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게 다 도윤씨가 옆에서 운동할 때마다 잔소리를 해 준 덕분에 몸에 배여버린 버릇이었다. 러닝머신을 하고 내려와서 큰 대자로 뻗어있는 나의 어깨를 때려 광공은 운동을 하고 나서도 퍼질러져 있으면 안됨을 가르쳐 주었다. 생수병도 그렇다. 무심코 자주 먹던 생수가 없냐고 물어보자 요란한 라벨이 달린 생수는 금지고 한 병에 몇 천원은 하는 프리미엄 생수를 마셔야 한다며 건넸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은 허락받았지만 그것도 말하자면 긴 이야기였다.

"도윤씨."

"네, 민혁씨. 조금 쉬다 할까요?"

이 공간에는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근육이 붙는 속도도 빠르고, 몸이 만들어지는 시간도 월등히 빠른것 같았다. 벌써부터 근육이 잡혀 제법 두툼해진 팔로 먹던 생수병을 운동기구 옆에 두었다. 슬금슬금 도윤씨 옆에 앉아 차트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 차트는 그저 시커멓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윤씨가 이 차트, 내 눈에는 안 보일 거라고 했다. 도윤씨는 뭔가 열심히 쓰고 있는데 난 할 것이 없었다. 심심하다. 배가 고프다.

"배가 좀 고픈데 어디 야식같은 건 없나요?"

"야식이요?"

"네...야식...뭐 냉동식품같은..."

"광공은 냉장고에 생수밖에 들어있지 않아요."

"광공이 요정도 아니고 이슬만 먹고 삽니까!"

"매일 가정부가 장을 봐 와서 신선한 재료로 요리해주고 갈 텐데요. 냉장고가 필요없는 삶이죠. 굳이 먹고 싶으면 수가 만들어주는 음식만 먹을 수 있고."

"수가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정말 광공의 행복 그 자체처럼 들리네요."

"비슷해요."

"도윤씨, 진짜 냉동식품은 없는겁니까?"

"아, 네."

그거 뭔가 부내나면서도 진짜 서글픈 말이었다. 냉동식품이 없는 삶이라니.

"광공이면 라면도 못 끓여먹나요."

"네. 광공이 구석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예..."

"어."

도윤씨는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도윤씨는 빈 공간으로 갔다. 빈 공간에는 헬스 기구들처럼 조리대가 저절로 생겨났다. 도윤씨가 부리는 마법에 나는 그저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았다. 도윤씨가 나를 매섭게 돌아보며 말했다.

"입 닫아요. 뭘 헤벌레 하고 있으세요."

"넵."

입을 꾹 닫았다. 광공이 뭔지 몰라서 계속 묻던 나도 이제 눈치가 생겼다. 광공이 입을 헤벌레 벌리고 곧 침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은 광공의 인의예지에 어긋나는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입을 꾹 닫고는 도윤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도윤씨는 뚫어져라 차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요리를 한 두개정도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아니, 재료가 없는데요?"

"그 정도는 고용인들에게 전화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되니까 걱정마요."

그놈의 고용인들. 마치 광공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필요한 것은 모조리 지원해주는 마치 백설공주의 생쥐 친구들 같은 분이다. 도윤씨는 손을 휘저어 파와 양파, 버섯과 쌀 같은 간단한 요리재료와 요리 도구를 나타나게 했다.

"민혁씨, 운동을 좀 쉬죠. 대신 뭐 좀 하나 배워볼까요."

"보나마나 요리겠군요."

"네, 야채죽이에요."

"왜 하필 야채죽입니까? 뭐 맛있는 음식 많잖아요."

"당신이... 그러니까 나중에 어떤 사람을 좀 힘들게 해서 간호해야 할 일이 분명 있을거거든요."

"제가 왜요?"

"왜냐뇨."

"전 모범시민인데요! 누굴 힘들게 할 순 없어요."

난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지금 힘들게 하고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 도윤씨는 알까. 급격한 운동량 증가로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민혁씨."

".....네."

"광공으로 환생해서도 그렇게 말하는지 봅시다."

민혁씨는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식의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묘하게 광공 웃음보다 서늘하고 차가워서인지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나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쉬고, 고개를 얕게 저으면서 팔을 걷어붙였다. 검은색 윗옷 소매가 밀려 올라가며 제법 두꺼워진 팔이 나온다. 민혁씨는 그 팔을 톡톡 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은 있군요."

"도윤씨, 지금 제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 줄은 알고..."

"먼저 쌀이나 씻고 밥할 준비나 하세요."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쌀을 씻었다. 어쩐지 도윤씨의 지시에는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멋진 맹수처럼 커가고 있는데 어쩐지 내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 온 사육사를 만나 쭈그러드는 느낌처럼. 쌀을 씻어 밥솥에 밥을 안치고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호박에 당근을 썰고 있는데 신기하게 야채가 잘 썰렸다. 나는 뭔가 좀 신이 나 도윤씨에게 자랑했다.

"도윤씨, 저 천재인가봐요."

"왜요."

"야채를 너무 잘썰어요."

"....."

도윤씨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도윤씨가 나를 어떻게 보거나 말거나 간에 열심히 양파에 버섯까지 예쁘게 썰어 볶기 시작했다. 도윤씨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흠. 전생의 기억은 사라져도 몸에 배인 기억은 날아가진 않네요."

"그게 무슨 소린데요?"

도윤씨는 잠시 곤란한 듯 말을 멈췄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분명 몸에 배인 기억이라고..."

"말해줄 수 없어요."

"아니 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긴장에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갔다. 초조해졌다.

"당신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금기에요."

도윤씨는 칼같이 말을 잘라내었다. 어찌나 깔끔하고 차갑게 말하는지, 내가 말을 더 못 붙여볼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상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썰던 야채를 내려놓고는 조리대를 등지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도윤씨를 노려보았다. 도윤씨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등을 두드려주었다. 얼굴을 바라보니 조금은 미안한 표정. 그 표정에 내 마음도 약해진다.

"미안해요, 민혁씨.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럴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도 당신, 방금 전에 굉장히 광공스럽게 화를 낸 건 알아요?"

"정말요?"

"물론 완벽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신 굉장히 절제되고 차갑고 무서웠어요."

"제가 무섭다고요?"

"조금은요."

도윤씨는 다시 내 팔짱을 풀고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마음이 더 약해졌다. 나는 결국 도윤씨가 한 번 더 미소를 보이며 어깨를 두드리자 뒤로 돌아 칼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칼로 야채를 다지고 밥을 끓여 야채죽을 만드는 동안, 도윤씨는 이것 저것 말했다.

"원래 광공은 요리를 좀 못해도 상관없거든요."

"네."

"근데 민혁씨라면 야채죽이랑 몇 가지 정도는 좀 가르쳐서 보내고 싶었어요."

"왜요?"

"잘 할것 같으니까요....그리고 수가 좋아할 것 같으니까요."

도윤씨는 익어가는 야채죽의 맛을 보았다.

"맛있네요. 이정도면 훌륭해요."

"그런가요?"

"민혁씨가 아직 갈 길이 먼데, 잘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도윤씨가 웃었다. 그래. 잘 가고 있으면 된 거지. 나도 그렇게 애써 나를 달랬다.

야채죽에 프로틴이라는 괴상한 조합의 음식을 먹은 뒤 민혁은 다시 운동을 하러 갔다. 도윤은 조금 멀찌기 떨어져 차트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작은 진동소리에 도윤은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전생에 요리를 했던 기억이 잘 사라지지가 않았어요, 선배."

이어지는 말소리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전화를 얼른 끊어 주머니에 넣었다. 도윤은 만년필 끝을 입으로 깨물며 까득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하긴...그 정도 작은 기억은 가지고 가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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