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이 공간이 굉장히 특이하다고는 알고 있었다. 시간개념도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는 '지민혁'이 된지 꽤나 오래 된 것 같았고, 휴식과 운동을 반복해야 했다. 광공이란 조각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도윤씨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100억 벌기가 쉽지가 않다. 잠시 쉬며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도윤씨가 다가왔다. 광공에 대해서 또 다른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겠지.
"민혁씨는 검은 머리가 어울리겠네요."
이건 예상 못했다. 머리라니.
"어느 정도 몸이 만들어지거든 얼굴을 정해야 하거든요."
"이왕이면 잘생기고 싶은데요."
"좋은 태도네요. 그리고 그냥 잘 생긴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아주 잘생겨야 하나요?"
"정말 잘생겨야 해요."
도윤씨는 차트 뒤에 끼고 있던 파일에서 이것저것을 꺼내며 말했다.
"미인인데 선이 좀 굵어야 해요, 연약한 느낌은 아니고요. 턱선도 뚜렷한데 얼굴에 분위기있게 그림자가 질 만큼 입체적이여야 하구요. 눈도 잘생기고 뚜렷한데 뭔가 당장 뭔가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맹수같아야 해요."
"그거 참 어렵네요."
도윤씨가 들고있던 것을 우르르 내려놓았다. 책 표지처럼 보이는 무엇인가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나는 개중 하나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도윤씨가 내가 들고 있던 그림 하나를 빼서 다시 바닥에 놓았다.
"민혁씨, 여기 이 그림들요. 광공으로 환생한 분들이에요."
"어느쪽인가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좀 더 강해 보이는 쪽이요."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모두들 정장이나 셔츠를 입고 계신 쪽들 같은데요."
"그렇죠."
"머리는 깔끔하게 넘긴 흑발이 많구요."
"그러니까 방금 전에 제가 민혁씨에게 검은 머리가 어울릴 것 같다고 한 거예요."
"틀리지 않았다면 이거... 키스하고 있는 쪽도 키스 받고 있는 쪽도 남자네요."
"네 그래요."
"그렇군요."
"민혁씨는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으세요?"
"아뇨."
남자가 둘이 붙어 있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나는 되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도윤씨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다시 차트로 눈을 돌려 무언가를 써 넣었다. 그런 도윤씨를 내버려두고, 나는 그저 사무적으로 사진을 뒤적거렸다. 광공으로 환생한 선배분들의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자니, 모두 다 키보드 보다 배는 넓을 것 같은 어깨, 두꺼운 흉통, 환상적인 역삼각형 몸매와 복근을 자랑하시고 계셨다. 나는 아직 커가는 나의 몸을 바라보면서 갈 길이 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멀지 않았어요. 열심히 다시 운동 시작하세요."
도윤씨의 말에 난 옆에 있던 바벨을 다시 잡아 들기 시작했다.
"그럼 머리색은 흑발로 하고, 외모도 정말 잘생긴 맹수 계열로 갈게요."
"저야 감사하죠!"
얼굴을 찌푸리면서 바벨을 잡아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 아차 싶어서 생각난 듯 도윤씨에게 소리쳤다.
"도윤씨!"
"네?"
"머리숱 많게 해 주세요!"
도윤씨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 좀 잘 말한 것 같군.
러닝머신에서 러닝을 끝마친 후 녹초가 되어 뻗어있는 나에게 도윤씨가 물을 건넸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운동만 하고 있노라니 심심하기 짝이 없다. 헬스장에는 보통 러닝머신 위에 모니터라도 달려 있는데 여긴 그런 것도 없었다. 간간히 옆에서 말을 걸어주고 물을 건네주는 도윤씨라도 없었다면 아마 진즉에 미쳐버리겠지. 100억을 받으면 도윤씨에게 5000만원 정도는 나눠드릴 마음이 생긴다.
"민혁씨, 물 마시고 좀 쉬면서 들으세요."
"네."
"애완동물을 골라야 할텐데요."
"애완동물요?"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애완동물은 생각해 본 기억이 없다.
"도윤씨, 전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이었다. 애완동물을 들이면 챙겨줄 자신이 없었다. 밥도 챙겨야 하고, 배변교육도 시켜야 하고, 산책도 나가야 하는데 지금 나는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바쁘고 힘들어 허덕대고 있었다. 애완동물까지 언제 챙기지. 내가 걱정하는 것이 보였는지 도윤씨가 한 걸음 다가왔다.
"고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애완동물을요?"
"나머지는 국내 최고 수준의 고용인들이 잘 길러줄 거예요."
"고용인이요? 저 돈 없는데..."
"광공이 왜 연봉이 그렇게 많이 나간다고 생각해요?"
"그...그런가요? 일종의 품위유지비인가요?"
"그런 셈이죠.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도윤씨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차트 뒤에서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진돗개...도베르만...와이머라너...로트와일러.......?"
"왜 그러시죠?"
"좀 하얗고 귀여운 개는 없나요?"
"뭘 찾으시는건데요?"
"비숑이나... 말티즈나 치와와...아님 그냥 시골개도 괜찮..."
"안됩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턱을 딱 벌렸다.
"아니 무슨 개도 내 맘대로 못골라요?"
"네, 못골라요 민혁씨."
도윤씨가 방긋 웃었다. 처음으로 도윤씨가 얄미워보이는 순간이었다. 내가 부들부들 떨자 도윤씨가 옆에 앉더니 등을 몇 번 두드려주었다. 신기하게도 조금 어이가 없던 것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나마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도윤씨가 있으니 위로가 많이 된다.
"여기서 고를 수 밖에 없다니까요."
도윤씨가 달래자 한숨을 쉬었다. 반쯤 구겨진 카탈로그를 대충 펴서 훑어보니 검거나 회색의 개가 많았다. 날씬하고 쭉 벋은 대형견들의 모습은 참 멋있어 보였다. 그나마 내 눈에 익은 도베르만을 선택하자 도윤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찾는 수가 사육사일 가능성도 있겠네요."
"수요?"
"...그건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에요."
"매번 때가 되면 알려주신다고 하네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도 잘은 몰라요. 그래서 잘 못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
"민혁씨가 광공으로 태어나거든 꼭 하나 할 일이 있거든요."
"안 하면 안되는 겁니까?"
"안 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걸요."
민혁씨는 도베르만에 동그라미를 쳐 놓고는 도로 차트 뒤로 카탈로그를 넣어놓았다. 그러고보니 광공은 정확히 뭘 하는 걸까. 도윤씨는 하다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광공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 안 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고 하면서.
"도윤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궁금하네요, 광공의 삶이."
"그렇죠? 태어나보면 좀 삭막할 거예요. 지켜야 할 것도 많고."
"그거야 여기서 열심히 배우다 보면 몸에 익겠죠...익을텐데."
"익을 텐데...그리고요?"
"그냥 그것과 별개로 생각보다 참 팍팍할 것 같아서 걱정이 많아요."
내가 머쓱하게 웃으며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에 도윤씨는 애매모호하게 웃었다. 또 그 웃음. 도윤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확실하지 않은 환한 웃음에 늘 마음에 무언가 걸린 것 같이 결론이 날 때가 있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만 보면 나는 뭐라 더 캐묻지는 못하고 그냥 도윤씨를 내버려 두게 되지만. 이번에는 내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운동이나 할게요."
"네, 민혁씨. 물 좀 마시고 할래요?"
"고마워요."
물을 받아들고는 한 모금 마신다. 광공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광공조건에 또 뭐가 있을까요... 선작, 추천, 코멘트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