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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3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3/82)

00003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민혁씨, 생각보다 웃음은 빨리 익히셨네요."

그런가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까 전 도윤씨가 계속 입가를 매만져 준 덕분인지, 아니면 입가가 당길 정도로 미소를 연습해대서인지는 모르겠다. 입술은 자연스럽게 차가운 호선을 그렸다. 반사적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웃음을 지으며 도윤씨를 바라보자, 도윤씨는 어쩐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미소부터 알려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더 먼저 할 게 있었다는 소리처럼 들리네요."

"그렇죠. 보통 미소는 이렇게까지 일찍 알려드리는 법이 아니라고 해서..."

도윤씨가 말끝을 흐렸다. 도윤씨의 말끝이 흐려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그러세요."

"네?"

"아니, 도윤씨가 말끝을 흐리시길래..."

"아뇨. 그게 아니라..."

도윤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을 해 줄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내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윤씨는 나의 시선을 약간 피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앞으로 광공이 되려면 이런 미소만 지어야 할 텐데, 괜찮으세요?"

"이런 미소만 지으면 100억을 준다는데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데요."

"그래도요. 박장대소하면서 땅을 치고 뒹굴면서 웃고 싶을 때도 있을텐데요."

"네, 뭐. 그건 그렇게 제가 웃고 싶을 때 웃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다시 한번, 차갑고 비릿한 미소. 도윤씨가 말했던 입술 끝만 당겨 웃는 무기질적인 미소. 아주 많이 연습했던 미소. 예전에 아마 일일연속극에서 보았던 어느 재벌의 악역이 이렇게 웃었던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생각해도 제법 이 미소가 꽤나 얼굴에 배어 있는 것 같다. 그런 나의 모습을 도윤씨는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도윤씨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했지만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윽고 도윤씨는 차트에 시선을 고정시켜두고 가만히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민혁씨."

"네."

"키는 어쩔까요?"

예. 키요?

뒤이어 이은 말 때문이다. 나의 신경은 죄다 도윤씨의 아까 그 여운이 남은 시선에서 '키'로 쏠렸다.

"저, 도윤씨."

"네."

"광공이란 게 키도 필요한 직업인가요?"

"그렇죠...광공은요."

"광공이란게 조종사나 우주비행사같은 겁니까?"

"그건 아니예요.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점점 이 광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쏭달쏭해져간다. 무언가 영화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멋지게 보여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배우게 가깝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뭔가 아직도 설명이 모자랐다. 생각에 더 빠져들 찰나, 도윤씨가 물어보았다.

"그래서 몇 cm?"

"그러니까 그 cm가 지금 키를 말하시는거죠?"

"그럼 뭐겠어요. m로 말하시고 싶으면 그러셔도 됩니다."

"아니, 제가 말한다고 그만큼 커지나요?"

도윤씨가 만년필을 들며 화사하게 웃었다. 왜 안되겠어요? 도윤씨는 차트를 받치고 있던 받침대를 만년필 끝으로 콩콩 두드리며 물었다. 하긴, 저 차트에 '지민혁'이라고 이름을 쓰자마자 내 이름은 지민혁이 되었다. 저건 마법의 물건 같았다.

"그래서 민혁씨, 몇 cm요?"

"어...179cm요?"

도윤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더 높이 부르시죠."

"그럼...183?"

"민혁씨, 살면서 도박같은 거 안 해 봤죠?"

"어떻게 아셨어요?"

"로또는 사 봤나 몰라."

"도윤씨, 아무리 그래도 그건 사 봤습니다."

도윤씨가 픽 하며 비웃는 통에 약간 발끈했다. 나는 내 백지상태와도 같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대충 내가 들었을 때 크다고 생각되는 숫자.

"그럼 189."

"그건 떡대수 부서에서도 자주 나오는 킨데요. 광공이에요 당신은."

"그럼 얼마나 해야 하는데요. 한 195?"

"그거 좋네요. 전 198 생각했는데."

"198....진짜 비현실적인거 같은데요."

"198이면 광공하기 딱 좋은 키죠."

"도윤씨 말대로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하셨어요, 민혁씨. 광공은 자고로 다 커야죠."

어쩐히 도윤씨의 대답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내 삶이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 키가 198cm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어마어마하게 큰 키라는 건 지금의 나라도 알 수 있었다. 도윤씨가 만년필로 차트에 무언가를 적자, 내 시야가 달라졌다. 방금 전 나는 도윤씨와 서로 엇비슷하게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도윤씨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나는 조금 황당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도윤씨의 뒤통수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도윤씨의 얼굴을 덮어버릴 것 같은 큰 손이 도윤씨의 얼굴을 감쌌다.

"손도 크군요."

"민혁씨, 광공은 단풍손은 안 됩니다. 금지에요 그건."

"그럼 발도 크겠군요."

"말이라고 해요? 손도 발도 그리고..."

도윤씨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나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쩐지 그 시선이 어떤 기관을 가리키는 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둘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나는 이 시스템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이것이 앞으로의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이 되든 간에.

"저...도윤씨."

"민혁씨. 모든 사람들은 광공이 우주파괴용을 달고 있는 걸 선호하는 편이죠."

"우주파괴용이요?"

"네. 평균은 생각지도 마세요. 무조건 커야해요."

"가정파괴용은 모자라죠?"

"잘 파악하셨네요. 지구파괴용도 모자라요. 우주파괴용으로."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도윤씨, 혹시 너무 크면..."

"민혁씨. 내 말 들어요."

도윤씨는 그 어느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한낱 뿌옇고 옅은 희미한 덩어리 같았던 내가 존재감을 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내 다리 사이에 우주파괴용의 거대하고 묵직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절로 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윤씨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외모보다 더 중요한 대목일 수도 있어요."

처음으로 나는 되물음 없이 도윤씨의 말에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건 중요하지.

그야말로 거대한 덩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 사실에 적응하기가 조금 낯설었다. 팔을 휘둘러도 보고, 고개를 꺾어도 보았다. 다리를 일부러 크게 움직여 제자리에서 뛰어보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허약해 보였다. 키에 비에 팔이 지나치게 가느다란 느낌이었고, 다리도 그저 그런 모양새였다. 무언가 어색하게 태어난 느낌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민혁씨, 이리 와 보세요."

도윤씨가 부르는 소리에 그곳으로 걸어가자 도윤씨가 검은색 티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주었다. 별 생각없이 받아들고 입어보았더니 티셔츠는 헐렁했다. 바지는 길이는 약간 부족한 느낌으로 그럭저럭 입을 수 있었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옷이란 것이 여전히 헐렁했다.

"좀 헐렁하죠, 민혁씨?"

"예, 그렇네요."

"광공은 그러면 안 됩니다."

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긴장으로 굳었다.

"민혁씨는 오늘부터 운동을 할 거에요. 철저한 식단을 맞추어 하루 세끼 고구마 닭가슴살에 샐러드와 단백질셰이크를 먹으면서요."

도윤씨가 옆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어느 새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각종 기구들에 바벨과 덤벨이. 헬스장 하나를 통째로 옮겨 논 것 같았다. 또한 도윤씨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거기에 놓여 있었다. 여러가지 운동기구를 보며 나는 잠시 섬광탄을 맞은 것 처럼 멈칫했다.

"저걸 그냥 관람하라고 놔 두신건 아니죠?"

"그렇겠죠, 민혁씨?"

도윤씨가 여상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거 아세요, 민혁씨?"

도윤씨가 차려진 식단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광공이 되면 저런 것도 못 먹어요."

도윤씨의 자애롭지만 잔인한 것 같은 미소가 빛났다. 나는 그 때 광공이란 되기가 무척이나 힘들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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