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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2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2/82)

00002 1부 : 광공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 =========================

"아, 일어나셨어요?"

밝게 웃으며 나를 깨우는 도윤씨의 모습을 보이자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다시 기절했다가 깨어난들 내가 원래 살고 있던 현실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숨을 몰아쉬며 다시 일어나자 도윤씨가 체크보드를 들고서 나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광공이 되시려면 함부로 쓰러지셔도 안됩니다. 체력이 우선이에요."

"저기, 그러니까 계속 광공광공하시는데, 광공이 뭡니까?"

"어... 여기로 불려오실 정도면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닐텐데요."

"모릅니다."

도윤씨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되는 거거든요.."

"어떤 사람이요?"

"광공부서로 떨어진 영혼에게 광공을 설명하려니까 좀 신선하긴 한데... 이럴거면 광공이 아니라 그냥 다정공쪽으로 보내는 게 나았을려나요."

"다정공이요? 저는 무슨 축구공이나 야구공이 되는겁니까?"

"아니, 아니, 그건 진짜 아니구요."

도윤씨가 작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잠시 고민하던 도윤씨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쉽게 생각해서, 연봉 100억씩 받는 직장에 취직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00억이요? 광공은 무슨 신의 직장입니까?"

"그만큼 해야하고 지켜야 할 일이 좀 많긴 해요."

"100억이면 해야죠!"

나는 흥분했다. 100억이라니, 그것도 평생 100억도 아니고 연봉 100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금액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보증금 1억 2천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100억을 준댄다. '광공'을 하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평생 돈에 쪼들리고 산 나로써는 아주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자본주의의 노예여 돈앞에 무릎꿇고 빌빌 기어다니리.

"그런데 이게 일종의 인턴 기간이라..."

"인턴기간, 예, 있을 법 합니다!"

"그 동안 광공이 지켜야 할 규칙이 몇 가지 있거든요."

"예, 예. 그래서요?"

"그걸 잘 숙지하시면 광공으로...일종의 환생을 하시는거죠."

침이 꿀꺽 넘어갔다. 로또에 당첨되도 요즘은 아파트 하나를 살까 말까한 이 험난한 시대에 연봉 100억의 직업을 누군가가 제시했다. 나는 자세를 절로 하고 도윤씨를 바라보았다.

"그럼 도윤씨가 제 사수신가요? 막 평가도 하고 그러시는?"

"일종의...그런 셈이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윤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도윤씨를 바라보는데, 꼭 천사같았다. 신의 직장에 합격시켜줄 대천사. 후광도 보이고 날개도 여섯 장씩 보이는 그런. 아주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럼 이름부터 지어야 해요."

"예. 그런데 제가 이름을 기억을 못해서요."

"아니요, 광공은 이름부터가 멋있어야 해요. 과거의 이름은..."

도윤씨는 들고 있던 차트를 슬쩍 넘겼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펜으로 벅벅 그 위를 긁어대었다. 누가 봐도 저도 기억못하는 제 이름을 지우고 있으시군요.

"이름을 지어야 겠네요."

"하지만... 옛날 이름은..."

"그건 광공 이름으로써의 가치가 한 톨도 없습니다."

어쩐지 단호한 말에 기가 죽었다.

"광공의 이름은 좀 강력해야 해요."

"네...."

"들었을 때 멋있어야 해요. 허약해보이거나 유순해 보이는 이름은 안됩니다."

"네....제 예전 이름은..."

"여권 심사를 위해 내밀었을 때 기억도 안 날 이름입니다."

"그렇게 단호하실 필요까진 없으실텐데요."

"어디 한 번 좀 세 보이는 이름을 불러보세요."

나는 조금 고민했다. 최대한 강력한 이름. 들었을 때 도망갈 이름은...

"곽두팔은 어떨까요?"

도윤씨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면서 실소가 흘렀다. 서둘러 도윤씨가 새어나온 웃음을 수습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그건 너무 조폭같은 이름인데요. 공이름이 곽두팔이면..."

"최대한 강해보이는 이름을 생각하라길래..."

"태격포는 어떨까요?"

"지금 장난하세요?"

"그럼 우용범..."

"좀 우아해보이셔야 해요."

더 이상 듣다보면 별 이름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았는지 도윤씨는 내 말을 잘랐다. 곽두팔, 태격포, 우용범... 내가 볼 때에는 굉장히 강력한 이름 같은데 도윤씨는 계속 다른 의미로 강력해야 한다고 한다.

"강하긴 한데, 강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구요. 우아한 올블랙 스포츠카같은 그런 이름이요."

"김철수는 안 되겠죠?"

"될 리가 있겠나요?"

"제, 강, 도, 환, 차, 혁, 태... 뭐 이런 글자들 있잖아요. 광공이 쓸 법한 그런."

"그런 글자로 만들면 됩니까?"

"그렇죠."

"그럼 제환강은 어떻습니까?"

"그 글자로도 그렇게 환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시네요!"

도윤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떡하라고... 평생 이름이라곤 지어본 경험이 없었다. 아이디도 '파란생수병'이나 '흰색핸드크림'같이 앞에 있는걸 보고 지을 정도였는데.

"그럼 차ㅇ..."

"그건 연예인 이름이잖아요. 누굴 멍청이로 아나. 상도덕이 있지 그걸 왜 써요."

"넵 알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현대배경이라서 쉬운거예요. 시대물이나 서양이름이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당장 자주 쓰는 서양이름부터 검색해서 a부터 봐야 한다고요."

도윤씨는 모든 '공'들이 그러하다지만 광공 이름은 짓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말했다. 다행인 건 나는 서양식 이름으로는 짓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서양식 이름으로 지으라고 했으면 나는 제일 먼저 우리 강아지 이름인 알렉산더부터 들이댔을 텐데. 아마 지금까지 내 이름에 퇴짜를 놓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이름도 퇴짜를 놓을 확률이 높아보였다. 서양식 이름을 짓지 않는데 다행이지.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윤씨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네."

"좀 특이한 성씨 불러봐요."

"특이한 성씨요?"

"특이한 성씨가 좋거든요. 좀 없는거."

"손씨, 마씨, 차씨, 제 친구 중에 여씨도 있고, 피씨, 추씨, 지씨...?"

"좋네요. 거기에 살면서 봤던 제일 괜찮은 이름 좀 붙여봐요."

"지민혁 어떨까요."

도윤씨의 얼굴이 좀 더 밝아졌다.

"지금까지 들은 이름 중에는 제일 괜찮네요. 지민혁."

"그럼 이걸로 된거죠?"

"이걸로 하죠. 지민혁."

도윤씨가 '지민혁'이라고 들고 있던 차트에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서 지금까지의 나의 이름이 지민혁이었던 것 처럼 느껴졌다. 거부감이 너무 없어서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정도로. 어쨌거나 드디어 이 이름 짓기의 지옥에 벗어났다 싶어 기쁨에 실실 웃자, 도윤씨가 다가와 손가락으로 입술을 내려주었다.

"잘 들어요. 광공이 하면 안 될 것들 중에 하나는 실실 웃기에요."

"예?"

"실실 쪼개면 안됩니다. 웃음은 무조건 '차갑게 미소'짓거나 '화나서 웃어야'해요."

"아니, 사람이 희노애락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웃나요."

"할 수 있어요, 민혁씨. 방금전에 제가 도와 줬으니까."

"아니 입술 좀 땡긴거 가지고요?"

"웃어봐요. 연봉 100억이 기다릴텐데."

그러나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렇지. 실실 안웃는 댓가로 100억을 준다면 누구든 "실실 안 웃겠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 입술 끝을 당겼다.

"좀 더 비릿하게 웃어야 해요."

"이렇게요?"

"좀 더 무기질적으로 웃어야 해요."

"저기, 광공은 그래야 합니까?"

"네."

단호한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당겼다. 몇 백번쯤을 연습했을까.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입술을 요리 당기고 조리 당기던 도윤씨의 도움이 통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도윤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환한 미소에 화답하듯 나는 입술 끝만 당기고 가라앉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민혁씨. 그런 웃음이에요."

그의 칭찬에 내 입술이 다시 한 번 당겨졌다. 실실 쪼개는 웃음이 아닌, 도윤씨가 당부한 '광공'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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