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정산 보고서
우진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이 오려는 것 같았다. 눈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투명하게 녹아, 그 안에 돋아나는 연두색의 새순이 보일 정도로 맑은 겨울의 아침이었다. 우진은 분명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이마를 짚던 따스한 손길을 기억했다. 출근하기 전까지 자신의 목덜미를 잡고, 뺨 위로 내려앉는 김신의 입술을 느꼈다. 시간이 무척이나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직 약 기운이 남았기 때문이라는 의사의 말을 김신의 손을 잡고 들었다. 며칠 동안은 과거의 기억이 혼재되어 현실에 나타나기도 했다. 한 달 정도 여유를 두고 쉬라는 의사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견뎌낼 만한 시간이었다. 그건 오로지 김신 덕분이었다.
“잘 잤냐?”
찰칵, 하고 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지훈이 서 있었다. 검사 결과 강지훈은 멀쩡했다. 약물 투여 흔적도 없었고, 외상도 없어 바로 퇴원했다. 시우가 옆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지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심해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던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지훈은 주완과 함께 우진을 찾아냈고, 같이 돌아왔다. 그날로부터 도망친 기억도 데리고.
“응.”
“누워서 쉬니까 살이 좀 오르나보네.”
“그래?”
“이쁘다. 잘 먹고, 잘 자고.”
지훈은 손을 들어 조금은 멈칫거리며 우진의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조금 걷어냈다. 눈부신 표정을 하는 지훈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우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탈수증상이 있어, 목소리가 탁하게 나왔지만 우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매듭은 늘 꼬이기만 한다는 사실을 이제 우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어릴 때, 난 너랑 어딘가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뭐?”
“네 생일파티에 매년 초대받아서, 내심 기뻤어. 고모가 무서워서 가진 못했지만.”
서로 방향성은 달랐지만 어릴 때의 지훈은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있었다.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외향적으로 변한 지훈과는 달리, 우진은 그 나약함을 내면에 가두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게 막았다. 그걸 뚫었던 단 하나의 섬광 같은 순간은 다름 아닌 김신이었다. 그것이 지훈이었다면, 서로는 더욱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말해봤자야.”
“난 생일파티도 못 했는걸.”
“…어머니, 내일 입국하셔.”
“축하해.”
무엇을 축하해야 하는 걸까. 꼬인 타래가 풀린다고 해도 시간을 돌릴 방안은 없었다. 우연히 틀었던 뉴스에서는 몇 달 전 한차례 파란이 일었던 청부살인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다. 회사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 뉴스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할아버지는 꽃바구니를 보냈고, 배명훈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검찰로 송치될 예정이지만 증거 부족으로 풀려날 것이다. 이제는 회사에서 영원히 이준을 볼 일이 없다. 하나제약은 늘 그랬듯, 자취를 남기는 법이 없었다.
“배이준은 이마가 찢어져서 4센티나 꿰맸대.”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야윈 지훈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서늘한 표정이, 어찌 보면 우진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핏줄이니까. 그 안에 끼고 싶어서 다정하게 굴었던 이준도 기억났다. 우진은 섬세한 지훈의 프로필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준이는, 너를 좋아했던 거 같아. 내 생각엔.”
“…뭐?”
지훈이 황당하다는 듯이 우진의 침대에 걸터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매력적인 남자였다. 따듯하고 다정하면서, 섬세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이중적인 면이 있었지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었다.
“여러모로 내가 싫었겠지.”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준은 늘 다정했다. 우진과 지훈에게 이것저것 나눠주거나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곤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우진은 이준이 불편했던 경험이 떠올라 아마도 그것은 질투의 감각과 배명훈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모든 것은 할아버지가 결정하실 사안이야. 난 빠지기로 했어.”
“고모는 아닐 거야.”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건 고무적인 일이야. 이제 약도 끊으셨고.”
“….”
“삼촌이 영원히 돌아오시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려.”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눈 아래가 떨리고 있었다.
“난 네가 고모를 미워했던 20년이 아쉬운데.”
“…어머니께도 죄송하지.”
손안에서 놀아난 가족사였다. 끔찍하고 후회스러울 만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마치 그런 조율이 필요했다는 듯이. 우진과 지훈은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시우 씨는 어때?”
“아침부터 난리야.”
“…김주완은?”
“나한테 묻고 싶니.”
시우에게 주완의 상태를 말하지 않은 건 우진의 의지였다. 지훈은 그걸, 너무나도 찜찜해했다.
“아직도 시우 씨에게 말하고 싶어?”
“그래. 죄책감 같은 거 느끼고 싶지 않아.”
“깨어나면 말해.”
“총을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안 깨어나는 거야. 대체.”
주완은 칼에 찔렸다. 총소리는 우진에게 보내는 지훈의 신호탄이었고. 다행히 그 누구도 총상을 입지 않았지만, 과다출혈로 인해 쇼크가 온 주완은 일주일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GPS를 심은 건 신의 한 수였어.”
“그것도 주완 씨가 충고한 거였지.”
“그러게. 그거 아니었으면 얼굴 볼 이유도 없었어.”
우진과 지훈은 납치 전, 몸에 추적 장치를 삽입했다. 그건 주완이 가장 마지막에 한 조언이었다. 강지훈이 우진을 찾아낸 건 다행이었지만, 혼자 우진을 구해내는 건 어려웠다. 건물에서 주완과 우연히 마주친 건,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그가 신호탄을 들고 있었다. 지훈에게 건물 밖에서 신호탄을 몇 번 쏘라고 지시한 뒤, 주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우진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배에 칼을 맞은 채로. 민지가 응급치료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그는 의식 불명 상태가 아닌 시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주완, 깨어날 거야.”
“안 되면 뺨을 때려서라도 깨울 생각이야.”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이 하얀 커튼과 함께 눈부시게 빛났다. 그들에게 좀 더 살아갈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지훈은 한쪽 손을 왼쪽 가슴에다 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봄이 오긴 하려나 보다.”
정말이지, 봄은 봄이었다.
***
“병가라니, 둘이 사이좋게.”
연우는 탕비실에서 마주친 김신을 붙잡고 우진과의 이것저것을 물었다. 우진과 친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월례 브리핑에서 만난 김신에게 연우가 금방 달려와 궁금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커피를 마시러 나온 김신을 따라 탕비실까지 쫓아온 터였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인사발령 떴잖아요. 게시판에. 배이준 주임 권고사직.”
“…그게 왜?”
“심지어 강지훈과 최우진 대리 동시에 병가랑 휴가.”
“또?”
“그리고 최근에 친족살해 관련해서 뜬 그 뉴스 우리 회사라던데.”
“주가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어머, 나 우리 회사 주식 샀는데.”
그렇게 말하며 손을 입으로 가져가 눈으로 웃는 연우에게서 호기심이 잔뜩 묻어났다.
“나도 잘 몰라.”
“무슨, 잘 모르긴. 오빠 최 대리님이랑 고교 선후배 사이라면서요?”
김신이 그 말에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다 놀란 얼굴로 연우를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어?”
“우와 맞네. 최 대리님, 지난번 회식에서 말했어요. 나 그때 기겁.”
“…뭐?”
“우리 지난번에 저녁 회식하는데, 그러던데요. 실장님이 최 대리님 회사에 친한 사람 없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그러면서 오빠 이름 댔잖아.”
“….”
“최 대리님 그런 얼굴 첨 봤어요. 웃으면서, 자기가 굉장히 선망하던 후배였다고.”
갑자기 공기 중의 소음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 김신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 아래를 가렸다. 귀 아래부터 턱까지 혈관이 돋고, 열기가 솟았다. 심장이 쿵쾅쿵쾅하고 뛰어서,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김신이 비틀거리자, 연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래요?”
“아, 당황해서.”
“뭐야, 안 친했던 거야?”
“친했어. 같은 기숙사였거든.”
“그랬구나.”
연우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튼, 그러니까 아는 거 있음 이야기해줘요.”
“없어.”
“뭐야? 싱겁긴.”
“정말 아프대. 원래 몸이 약했어.”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서둘러 탕비실을 나섰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훅, 하고 들어올 줄 몰랐기에 급하게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연우가 따라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강 대리님도 의외네요. 집안일로 자리를 이렇게 오래 비울 때가 있었나.”
“그러게.”
대충 대답하고 홍보팀으로 돌아온 김신은 의자에 털썩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최우진.
아직도 김신에겐 회사에서 처음 우진을 마주쳤을 때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김신은 우진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시선에서 차가운 열기를 느꼈다. 그게 전부였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저 사람만은 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 사람. 그런 사람이 어느 순간 긴장감을 던졌고, 열기를 피우는 도화선이 되었다.
“…미치겠네.”
누군가가, 김신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조금은 머뭇하다가 답으로 말할 것 같은 최우진. 아주 먼 길을 돌아, 두 번의 짧은 마주침이 선사한 인연이었다. 그걸 놓칠 수 없어서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
“무슨 생각해?”
우진은 퇴근 후 자신의 병실에 들른 김신이 저녁 식사를 먹고 병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걸 보며 물었다. 김신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여 물었더니 김신이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는 다채롭게 웃었다. 눈꼬리가 접히는 간지러운 웃음.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고는 입을 열었다.
“기분 좋아 보여.”
“그래요?”
그 말에 김신이 소파에서 일어나 우진이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와 털썩 앉았다.
“오늘 자고 가도 돼요?”
“응.”
“매일 자고 갔음 좋겠죠?”
“응.”
“그러니 얼른 나아요. 같이 손잡고 우리 집에 가야죠.”
우진이 솔직하고 투명하게 변할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주는 애정 덕분이었다. 그 대답을 기다렸는지 김신은 우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코까지 내려와 입술에다 자신의 호흡을 묻었다. 후, 하고 내쉬는 숨에 얼그레이 향이 짙게 풍겼다. 아까 마신 홍차 덕분이었다.
“귀여워요.”
“너도.”
“이렇게 덩치가 큰데?”
“그래도 귀여워.”
우진이 손을 들어 뒤통수를 만지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
“숨 쉬듯 이야기하고 고백해줘야지. 생각했어요.”
“언제?”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가 우진을 당겨 가슴 깊이 묻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 어디 가지 말아줘요.”
“…응.”
“어디 가더라도 쫓아갈게요.”
“알아.”
“정말?”
“응.”
푸른 밤이, 기억났다. 파랗고 어두운 새벽 마주한 그 얼굴. 아주 오래전부터 첫눈에 반해서 여기까지 돌아왔던 운명을 기억했다.
“나도 사랑해.”
사랑과 사랑이 마주하는 순간, 삶은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우진은 생각했다.
INTRO
“야 뭐 하냐?”
열일곱의 여름. 김신은 수영장 뒤편에 있는 작은 화단 근처 벤치에 누워 있었다. 방학 때의 훈련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 몰래 쉬러 나온 김신을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정시우였다.
“방학 내내 트레이닝?”
“그렇대.”
“역시 빡세다. 운동.”
“난 공부가 더 빡세던데.”
보충수업이 있다는 이야길 듣긴 했지만, 이렇게 한여름에 아이들을 가둬두고 에어컨도 돌리지 않는 교실은 지옥불과 다름없었다. 시우는 크게 숨을 내쉬며 그늘 아래 누워 있는 김신의 옆에 가 털썩 앉았다. 그러자 김신이 시우의 다리를 밀어냈다.
“비켜. 안 보여.”
“뭐?”
김신은 그렇게 말하며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털어내고 일어섰다.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뭘 봐?”
“너 뭐라고 하지 않았어? 안 보인다고?”
“알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하며 김신은 그늘을 벗어나 수영장 쪽으로 걸어갔다. 반바지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다리가 다갈색으로 타 있었다. 긴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김신의 뒷모습이 금방 시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싱겁긴.”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김신이 누웠던 자리에 누워 책을 펼쳤다. 잠이 솔솔 오려는 거 같아 시선을 먼 곳에 두려는데, 바로 코앞에 기숙사 건물이 보였다. 체육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낮은 건물의 기숙사. 벤치에 눕자 바로 1층에 있는 한 방의 창문이 시야 정중앙에 들어왔다. 하얀 커튼이 펄럭거리는 게 인상적이라 계속 보고 있던 시우는 그 커튼 사이로 갈색 머리칼의 한 소년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바람에 머리칼이 파르르 날리는 그 소년은 하얗고 마른 거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금방 시우의 호기심을 앗아갔다.
“뭐야. 난 여자애라도 있는 줄 알았네.”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책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지이잉, 하고 매미가 우는 초록의 여름이었다.